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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편의점에서 일하며 인생 2막 시작한 전직 대법관이 부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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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은퇴는 가위눌리는 현실이다. 은퇴 후의 삶을 ‘제2의 인생’ ‘인생 2막’ 등으로 우아하게 표현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겐 새로운 밥벌이 수단을 찾아야 하는 고단한 인생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오래전 ‘은퇴 후 어떤 일을 할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회부·경제부 기자 경험을 살려 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면 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실 과거의 미숙함을 보상하려는 심리가 한몫했다. 대학 졸업 후 여고에서 2년 정도 가르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때 세상 물정 모르고 가르쳤다’는 반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원에서 사회교육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코스워크를 마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교사가 되려는 젊은이들도 자리 잡기 어려운데…’. 한 살씩 더 먹을 때마다 조금씩 더 철이 들다 보니, 내 은퇴 후가 젊은 후배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어선 안 된다는 자각도 들었다. 다시 교단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제자들에게 예전의 미숙함을 보상해줄 순 없다.

 그러다 은퇴한 김능환 제17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행보를 보며 은퇴 후 삶의 실마리 하나를 찾았다. 총리 후보로도 거론됐던 대법관 출신인 그분은 퇴임 후 부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단다. 이를 놓고 ‘참다운 공직자의 모습’ ‘청백리’ 등 찬사가 줄을 잇는다. 한편으론 동기를 의심하는 내용의 트윗을 날리거나 삐딱한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있고, 대법관까지 지낸 전문지식을 살려 공익에 봉사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 남의 말은 다 부질없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른다. 다만 법조 기자 시절, 살짝 스쳤던 인연이 있었다. 이 일로 서로 이름 정도 알게 됐다. 몇 달 후 다른 문제로 전화를 했는데, 그분이 내 이름을 듣더니 그 일을 화제로 삼기에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었다. 자신이 맡았던 일에 섬세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신의 일에 열심인 사람들에겐 공통적으로 있는 느낌, 공명심에 들떠 매명(賣名)을 일삼는 사람들에겐 없는 그런 성실한 느낌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인지 편의점을 지키는 그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봉사’ ‘기여’ 등 온갖 수사와 명분을 동원해 또 다른 자리를 탐하는 인생 2막이 아닌, 소시민의 노동을 하며 사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다. 인생 1막을 특별하게 산 사람이라고 2막도 특별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구도 죽을 때까지 잘나가기만 할 순 없다.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직(職)에 대한 미련을 떨치고, 형편에 따라 자기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살아가면 그뿐이다. 편의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미리 그런 터전을 잡아놓은 아내가 있는 그분의 행운이 부럽다.

글=양선희 논설위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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