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ade in Korea 하나둘 먹히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인도네시아의 대형 파이프 제조사인 스핀도에선 요즘 역전된 한국과 일본의 가격표가 화제다. 지난달 말 계약한 일본 도쿄제철 열연코일 계약 가격은 t당 660달러. 한국산은 이보다 비싼 t당 680~690달러에 계약했다. 이 계약 물량은 4~5월 공급된다. 철강 공급을 중개하는 한국계 상사의 지점장은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지 20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본 제품은 한국산보다 적어도 1~2% 비싸게 팔렸다. 그는 “일본 업체가 물건이 없다고 해야 한국 것을 사는 실정”이라며 “이대로 가면 한국업체는 5~6월 선적분은 어쩔 수 없이 밑지고 팔아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엔저 공포가 현실이 됐다. 해외 시장에선 가격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품목이 나타났다. 한국의 100대 수출품 중 일본과 경합 관계에 있는 제품은 절반(49개)에 이른다. 이 중 전자·정보기술(IT) 업종을 제외한 상당수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이 한국 제품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당장 비상이 걸린 곳은 자동차업계다. 서울 양재동 기아자동차 사옥 19층 재경본부에 들어서면 커다란 환율 전광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최근 엔저로 환율 모니터링팀은 24시간 가동되고 있다. 재경본부 관계자는 “시시각각 변동하는 환율 상황을 체크하면서 손익 변화를 계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 해외영업본부 임원들은 지난해 10월부터 매일 아침 A4 용지 3~5장짜리 환율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으로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한 임원은 “최근에는 일본 업체의 프로모션 정보가 자주 올라온다”며 “일본 업체의 마케팅이 공격적으로 변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도요타 등 일본차는 미국에서 명목상 가격은 내리진 않았지만, 딜러에게 돌아가는 몫과 마케팅 비용을 확대했다. 혼다는 미국 딜러와 공동 마케팅 펀드 조성을 추진 중이고, 미쓰비시도 2005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서 TV광고를 재개할 계획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뉴포트리치 현대 대리점의 딜러 스콧 핑크는 “올해 판매는 예년과 비교했을 때 속도가 더디다”며 “현대차가 ‘차세대 도요타’로 불릴 만큼 성장했지만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엔화 대비 원화가치가 10% 오르면 자동차 수출액은 12% 줄어든다. 2011년 수출액을 기준으로 하면 54억 달러(약 5조8400억원)가 날아간다. 꽤 큰 중소기업 38개의 매출이 환율 하나에 사라지는 셈이다. 현대·기아차 협력업체인 한라공조 김경남 상무는 “최근 엔저는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만든 것 아니냐”며 “우리 정부가 원화가치 변동을 5% 안팎으로 관리해 주지 못하면 상황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종도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다. 지난달 28일 정부 과천청사 지식경제부 6층 회의실에선 자동차와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주요 제조업 단체 본부장 10여 명이 모였다. 산업연구원 연구위원도 긴급 호출됐다. 엔저의 산업별 영향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비공개 회의였다. 기계업종에선 현재 2억8000만 달러의 수출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됐다. 만약 엔화가치가 달러당 100엔까지 가면 수출 감소는 11억1200만 달러(약 1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미 한·일 간 희비가 엇갈리는 품목도 여럿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 수출 1위 품목인 등유 등 석유제품은 지난해 12월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9.2% 줄었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3.3% 늘었다. 전기 회로 관련 제품 수출 역시 한국은 12.6% 감소했으나 일본은 8.4% 증가했다. 새로 열린 과실, 앞으로 열릴 과실을 먼저 따먹는 것도 엔저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일본 업체다. 툰드라·타코마 등 경트럭 부문이 센 도요타는 미국의 주택 신축이나 보수가 늘자 경트럭 판매가 올 들어 20% 늘었다. 신흥시장에서도 일본의 공세가 강화됐다. 도요타는 오만에서 자동차 값을 최대 18% 인하했고, 닛산은 쿠웨이트에서 최대 3500달러(380만원) 가격 할인을 하고 있다. 일본 빅3의 지난해 중동 판매(88만여 대)는 전년 동기 대비 30% 늘었다. 특히 지난해 중동지역 자동차 판매 증가의 70%는 도요타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프리카·호주 등에서도 일본차의 할인 마케팅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제품 판매만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KOTRA무역관 윤여필 차장은 “가장 우려되는 게 ‘엔캐리”라고 말했다. 일본 업체가 값싼 엔화를 대량으로 갖고 들어와 현지 투자를 늘리면 몇 년 후 일본 업체가 시장을 싹쓸이할 것이란 우려다. 그는 “일본이 인도네시아 신항만·신공항 프로젝트를 다 먹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 업체는 발목이 잡혔다. 자동차에 쓰이는 고무제품을 납품하는 부산의 한 업체는 최근 일본 자동차 업체와 납품 협상이 깨졌다. 업체 관계자는 “계약이 성사될 무렵이었는데 엔저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며 “지난해에는 우리 제품이 30% 정도 가격 경쟁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고 말했다. 성시준 한국기계산업진흥회 정책조사팀 과장은 “한국이 연평균 15% 이상 성장하며 일본 기계 산업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엔저로 발목이 묶였다”고 말했다.

이상재·이가혁 기자

[관계기사]

▶ 텅 비어있던 日도쿄 유흥업소, 예약 손님들로 '북새통'
▶ 수출 제국 일본의 부활…도요타, 전세계서 주문 쇄도
▶ 추월 급한데…현대·기아차, 세계 5위도 흔들
▶ 정부, 엔저 대응책 마련 비상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