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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탕평을 TK끼리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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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윤호
논설위원

낙하산 인사에도 스타일이란 게 있다. 누군가 딱 찍어 내리꽂는 게 구식이긴 하지만 간단명료하다. 반면 추천이다, 공모다 하며 투명한 절차로 낙하산을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가 주로 그런 식이었다.

 5년 전 이맘때 한국거래소 이사장 인사부터 그랬다. 청와대·정부는 대통령과 가까운 분을 이사장에 앉히려 했으나 거래소의 후보추천위가 그를 탈락시켰다.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느니, 말을 안 들었다느니 말이 많았다. 그 뒤 거래소는 검찰 수사를 받은 데 이어 공공기관으로 지정됐다. 증권가에선 낙하산 항명죄에 따른 치도곤으로 해석했다. 윗분의 뜻에 거슬러 합법적으로 선임됐던 이정환 전 이사장은 1년7개월 만에 사임하면서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비슷한 시기 주택금융공사 사장 공모도 희한하게 진행됐다. 응모자 중에서 후보자를 추렸지만 청와대·정부가 “적임자가 없다”며 퇴짜를 놓았다. 이어 재공모, 공모 마감 연장 등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위에서 점 찍은 분이 후보에 들지 않은 탓에 벌어진 소동이었다. 1차 응모자들은 죄다 들러리 서다 말았다.

 공모제라는 미명하에 이뤄진 낙하산 인사는 정권 말기까지 비일비재했다. 순진하게 들러리 섰던 사람들은 바보가 됐다. 그중엔 헤드헌터 회사의 제의에 따라 응모하고도 들러리 노릇을 한 분이 적잖다. 그런 경험이 있는 한 금융인은 “투명하게 뽑나 보다 하며 응모한 게 실수였다”고 말한다.

 그 같은 인사를 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대통령일까. 경우에 따라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만기친람형 대통령이라 해도 공공기관·공기업까지 일일이 챙기긴 어렵다. 결국 대통령을 팔아 자기 사람을 심는 세력이 있다는 얘기다. 낙하산 인사를 가지고 노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진행 중인 공모도 취소해 버린다. 지난해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공모가 중단됐던 것도 그와 유사한 사례라 하지 않나.

 인사 농단에 따른 불만은 돌고 돌아 대통령을 향한다. 대통령이 아무리 탕평을 외쳐도 지역색 강한 낙하산 한둘이면 금방 물이 흐려진다. 호남 총리, 호남 장관을 많이 쓰는 게 탕평의 전부는 아니다. 총리나 장관의 탕평은 민초들에겐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실제 인사 불만은 공공기관·공기업 경영진이나 간부 인사에서 많이 나온다. 그들의 생계형 불만이 입에 입을 거쳐 번지면 그게 여론으로 굳어진다.

 공기업 사장 한 자리에도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 왔다 갔다 한다. 예컨대 기관장이 특정 지역 출신이면 조직 내 주요 보직은 그 지역 인맥으로 채워지기 쉽다. 이렇게 5년이 흐르면 다른 지역 출신은 크질 못한다. 나중에 탕평을 하려 해도 씨가 말라 쓸 만한 사람을 못 찾는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에서 낙하산과 지역 편중인사 탓에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권력에 취해 있으면 그들의 뭉근한 분노를 알 수 없다.

 그런 연장선에서 최근 청와대의 인사·민정 라인이 TK에 기울어 내정된 것은 지난 정부의 좋지 않은 기억을 들쑤신다. 공공부문의 허울뿐인 공모제를 그대로 둔 채 또다시 이너서클이 뽑고 거르는 실권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나. 탕평이라는 천사의 슬로건 뒤에 TK 인맥이라는 악마의 디테일이 숨어들었다고 극언하는 이도 있다.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영역으로 번질 경로는 애초부터 차단하는 게 맞다. 혈연 다음으로 지연·학연이 중시되는 우리 풍토에선 특히 그렇다.

 물론 아직 나오지도 않은 인사를 앞서서 걱정하고 미리 비판하는 건 과민반응일 수 있다. 장관 인사가 마무리된 뒤 공공부문 인사 쓰나미를 두고 보면 된다. 그때 체감형 탕평으로 장관 인사의 실점을 만회하느냐, TK끼리 해먹는다는 비아냥을 듣느냐, 앞으로 TK 하기 달렸다. 5년 뒤엔 인사 탓에 가슴에 피멍 들었다는 사람의 씨가 마르길 기대한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