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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노장은 살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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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정진홍
논설위원

# 84세의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어제와 그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포디엄 위에 섰다. 포디엄 위에는 만약을 대비해 간이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7번의 4악장 피날레를 장식할 때는 여느 젊은 지휘자도 흉내내기 힘들 만큼 강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하이팅크의 손끝이었다. 지휘하는 내내 그 손끝이 살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연주가 끝났을 때 객석에 앉아있던 나로 하여금 용수철 튕기듯 일어나서 박수 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손끝에 녹아든 그칠 줄 모르는 ‘생의 기운’ 때문이었던 것 같다.

 # 지휘자들은 대개 장수한다. 68세에 죽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오히려 단명한 축에 속한다. 80세를 넘긴 이들은 수두룩하고 90세를 넘긴 이들도 적잖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툴리오 세라핀이 90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91세,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는 95세까지 살았다. 단지 그때까지 생물학적으로 연명만 한 것이 아니었다. 스토코프스키는 94세에 미국 CBS방송과 6년간의 녹음 계약을 새로 체결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그가 숨을 거둔 것은 그 이듬해였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는 현역이었던 셈이다.

 # 그제 점심 무렵 프레스센터 19층에서 대학 시절 은사이자 지도교수였던 김지운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이분도 1929년생인 하이팅크와 동갑이다. 노(老) 은사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역사』라는 750여 쪽에 달하는 두툼한 번역서를 내 손에 들려줬다. 그동안 내놓은 저술과 번역이 모두 22권이었고 이것이 23권째라고 하셨다. 초벌 번역만 하는 데 매일 3시간씩 꼬박 6개월이 걸렸다며 웃으셨다. 그러면서 내게 2000년 이후의 커뮤니케이션 연구방법론에 대한 거시적 관점의 책을 번역하고 싶으니 좋은 원서가 눈에 띄거든 알려달라 하셨다. 나뿐만 아니라 젊은 교수들의 얼굴이 붉어질 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 사실 그분은 박사 학위가 없다. 지금이야 대학 교수들 중에 박사 학위 없는 이가 드물지만 당시엔 박사 학위 없이도 실력 있는 교수들이 적잖았다. 더구나 그분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구실을 지키며 공부했고 또 가르쳤다. 일년 365일,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에도 학교 연구실을 나오셨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가짜 학위와 대필 논문이 난무하고 정치판 기웃거리느라 바쁜 폴리페서와 연예인 뺨치는 텔레토비 같은 교수들과는 사뭇 격이 달랐다. 깐깐하기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의하러 들어오시면서 아예 강의실 문을 잠가버려 1분만 늦어도 강의실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엄격했다. 전공필수 과목임에도 수강한 학생 거의 전원에게 F학점을 줘 졸업하는 마지막 학기까지 적잖은 학생들이 그 과목의 좁은 문을 통과하느라 쩔쩔매게 할 만큼 혹독하게 가르쳤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와 동기들이 조금은 더 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은사께서 메로탕을 즐겨드신다 해 그것으로 소박한 점심을 함께 했다. 식사 중에 삼십 년 전 어느 날 교정을 함께 걸어 내려오다가 “나는 20대부터 500g도 편차가 없어”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 지금도 그러시냐고 묻자 “지금에야 몸무게가 500g 편차는 넘었겠지만 kg씩 차이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철저하게 건강하신 게다.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느냐고 재차 묻자 “매일 40분에서 1시간가량 집 근처를 산책하고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 맨손체조를 꼭 하며, 식사는 밥 공기의 5분의 3만 하는 소식을 줄곧 유지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만 보니 자네 너무 짜게 먹어. 소금기를 줄이게!”라고 말이다. 그러곤 ‘많이 떠들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건강수칙의 제1항이라며 크게 웃으셨다. 하이팅크의 지휘하는 손끝처럼 노 교수의 번역하고 연구하는 손끝도 그렇게 살아 있었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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