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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8) 총리의 종이 한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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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3년 4월 8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왼쪽), 정찬용 인사보좌관(오른쪽)과 얘기하며 웃고 있다. 정 보좌관은 2003년 12월 인사수석이 됐다. [중앙포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 장관 인선 작업은 청와대의 내부 인사위원회가 맡았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차관급)이 실무를 챙겼고 나와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위원회 멤버였다. 인사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관련된 청와대 수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고위 공무원의 경력 관리를 맡고 있는 인사위원회(법정조직)와는 별개였다. 이렇게 새 정부의 장관 인선 시스템이 갖춰졌다.

 정부가 출범하고 5개월이 지난 2003년 7월 16일의 일이다. 김영진 농림부 장관이 사표를 냈다. 행정법원의 새만금 공사 중단 결정에 대한 항의 차원이었다.

 후임 인선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농림부 장관 후보로 청와대는 민병채 전 양평군수를 추천했다. 민 전 군수는 친환경 농업 전문가다. 농림부 장관으로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세계 농업시장을 놓고 각국이 외교전을 펼치고 있던 때다. 국제협상 무대에서 밀리지 않을 능력이 농림부 장관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난 허상만 전 순천대 총장과 박상우 전 농림부 차관을 천거했다.

장관을 임명제청할 때 썼던 서면 제청서양식. 고건 전 총리는 ‘국무위원(國務委員)’이라고 쓰인 자리 옆 빈 공간에 임명제청할 사람의 이름을 쓰고 아래 서명을 했다고 한다. [고건 전 총리 제공]

 7월 23일 청와대 내부 인사위원회는 비공식 장관 청문회를 했다. 국회에서도 총리 청문회는 있었지만 장관 청문회는 없던 시절이다. 나, 청와대의 문 비서실장, 정 보좌관과 유인태 정무수석, 문재인 민정수석 등 5명이 면접을 맡았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별다른 형식은 없었다. 한 명씩 따로 불러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었다. 요지는 이랬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한 도하 라운드 무역협상 체제로 가면서 농업 개방은 현실이 됐습니다. 우리 농업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내부 청문회는 꽤 밀도 있게 이뤄졌다.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그리고 내부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면접 결과를 바탕으로 위원회는 박상우 전 차관과 허상만 전 총장 2명을 추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허 전 총장을 택했다.

 인선이 마무리됐다. 초대 내각을 꾸릴 때 인선 협의가 잘됐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서면으로 제청권을 행사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헌정 사상 처음 등장한 서면 제청서다. 제청 서류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 뒤 탁병오 총리 비서실장 편에 직접 청와대로 보냈다. 7월 24일 청와대는 허 전 총장을 농림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초대 내각을 꾸릴 때는 서면 제청서를 쓰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장관이 바뀔 때마다 이 서식을 썼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2004년 5월 총리에서 물러나고 이렇게 서면으로 임명제청한 일은 다시 없었던 걸로 안다.

허상만

 내부 청문회도 허 장관 임명 때 한 번만 하고 안 했다. 후보자에 올랐다가 낙마하는 사람도 있는데 불러서 인터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청와대에서 부정적이었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서면 제청서든 내부 청문회든 이제는 모두 사라진 유산이다.

 노무현 정부 총리로 일하며 각료 해임제청권은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 이렇게 두 번 행사했다. 윤 부총리 해임 건의는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을 둘러싼 교육계 분열이 발단이었다. 교육부 장관 경험이 있는 안병영 연세대 교수를 후임 교육부총리로 발탁했다. 당시 나이스 문제 등 교육계 갈등이 심각했다. 그래서 부총리직 인수인계 과정을 내가 직접 입회해 챙긴 기억이 난다.

 이런 복잡한 장관 교체 과정에서도 내가 잊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개각 발표 직전 물러나는 장관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말하는 일이다. 여기에 얽힌 사연이 있다.

 1982년 전두환 정부 시절 내가 농수산부 장관으로 일할 때다. 5월 21일 모내기 현장 확인차 지방으로 가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막 경기도 양평을 지나던 때 라디오에서 개각 발표가 흘러나왔다.

 “…국방부 장관 윤성민 합참의장, 농수산부 장관 박종문 강원도지사….”

 “…!”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사전 언질은 물론 없었다. 그때의 황당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잘린 장관 마음은 잘려본 장관이 안다고 했던가. 분초를 다투는 장관 교체 과정에서도 내가 꼭 당사자에게 미리 연락을 하게 된 이유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도하 라운드

2001년 11월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시작한 무역 자유화 협상.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TO 4차 각료회의에서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고 해서 도하 라운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식 명칭은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산물, 공산품은 물론 서비스 같은 무형의 상품까지 협상 대상이었다. 상품을 수입할 때 물리는 관세를 크게 낮추거나 아예 없애서 전 세계가 무역을 자유롭게 하자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자유무역협정(FTA)은 1 대 1 또는 몇 개 국가가 뭉쳐서 하는 반면 도하 라운드는 WTO 회원국 대부분을 아우르는 협상이다. 하지만 무역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진국과 그렇지 못한 개발도상국 사이에 의견 차가 커서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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