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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강남스타일과 낡은 휴대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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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다니엘 튜더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때때로 영국 런던의 상사는 이렇게 묻는다. “한국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뭐냐”고. 하지만 필자는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 특히 세계 언론이 ‘현재’라는 교묘한 단어로 한 나라 전체를 포장하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한국인들이 모두 ‘강남스타일’에 흥분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모두 경제민주화를 합창하는 것일까. 한 나라를 외부에서 바라볼 때 애매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다. 다만 전체 국민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흐름은 끌어낼 수 있다. 가령 필자는 영국인이다. 얼핏 신사처럼 보이고, 동시에 축구에 미친 얼간이일 수 있고, 그리고 끊임없이 차에 탐닉하는 괴짜처럼 보인다(아마 이들 중 딱 하나만 진실이겠지만).

 만약 한국의 시대정신을 말하라고 하면 필자는 딱 하나를 끄집어 낼 수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길게 봐서 굳이 두드러진 흐름이라면, 그것은 ‘향수’다. 바깥에서 보면 한국은 미래에만 골몰하는 듯 보인다. 끊임없이 정보통신 속도를 끌어올리고, 높고 휘황찬란한 건물들을 짓는다. 물론 상당 부분 진실이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면 ‘촌스럽다’(나는 이 단어에 대한 글도 쓰고 싶다)고 할까. 하지만 필자는 한국이 차츰차츰 지난 과거를 따뜻한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다.

 내 친구인 건축가의 말이다. 1980년대에 그는 한옥이라면 촌스러운 유물쯤으로 배웠다고 한다. 요즘 한옥은 돈 좀 있고, 뭔가 예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갖지 못해 안달이 났다. 여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때의 가옥을 그리워하는 로망이 담겨 있다. 으레 서양 현대작품들로 넘치던 갤러리에도 민화와 보자기 전시로 북새통을 이룬다. 대중문화에서 좋은 사례가 ‘응답하라 1997’일 것이다. 옛날 한국 가요를 틀어주는 바들도 곳곳에 생기고 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스쿨 디스코’에는 30·40대들이 옛날 교복을 입고 신나게 춤을 춘다. 나미의 ‘빙글빙글’이 흘러나올 때 한국 중년세대들이 열광하는 것과 닮은꼴이다. 지난해 말 취재했던 신중현 콘서트의 관객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영국에서 ‘노스탤지어’는 뭔가 좀 안 좋은 어감이다. 그것은 상당수의 영국 사람들이 미래보다 과거가 더 좋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영국이 예전 같은 중요한 나라가 될 수 없고, 더 이상 비틀스와 같은 스타도 나오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거북하지만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은 좀 다른 느낌이다. 가끔 필자는 한국 사람들이 왜 과거를 자랑하는 데 인색한지 어리둥절하다. 그것은 아마 과거는 잊으려고 노력하고 하루빨리 발전하고 싶은 한국 특유의 구도로 이해된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현대화로 치닫는 것은 금물이다. 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까지 분리수거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앞으로만 치닫는 한국의 자세는 이른바 ‘선진국’에 대한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 건너온 것은 무엇이든 좋다’는 잘못된 선입관도 그 뿌리의 하나일 것이다. 현대화되고 글로벌화할수록 뭔가 힘이 세고 그럴싸하게 간주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오히려 필자의 눈에는, 한국인들이 옛 물건들을 새롭게 재평가하기 시작하는 흐름이 매우 긍정적인 현상으로 여겨진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진정한 발전과 자신감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필자는 할 수 없이 두 손 들고 스마트폰으로 전향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한 꼬마가 필자의 구형 LG 피처폰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엄마! 저거 옛날폰! 하하”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필자도 웃어넘길 수밖에…. 그래, 필자가 괴짜일지도 모른다. 삼빡하고 쿨한 스마트폰 대신 2년 넘게 낡은 휴대폰만 고집했으니! 어쩌면 시대정신이 무엇이든, 그런 흐름에 분명히 뒤처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너무 목을 매지 말았으면 한다. 앞을 내다보는 것만큼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니엘 튜더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필자는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정치·경제학 학사로 맨체스터대 MBA과정을 졸업하고, 영국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한국 : 불가능한 나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