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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이조중엽-말엽인물중심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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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승훈(숭훈)은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시대에 정권을 잡고있던 남인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배경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의 교리책을 연구하다가 몸소 북경에 들어가 「베드루」(반석 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회릍 이 땅에 처음으로 세운 우리 동방 국의「베드루」였다 . 그는 강원도 평창에 본관을 두었던 삼간 이동욱(동욱)의 맏아들로서 1756년에 한성부 서부반석방(중림동)에서 태어나 자를 자술 또는 계경(계경), 호를 만천 (만천)이라 일컬었다.

<10세때에 경서>
아버지는 1766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사·삼간 등의 벼슬을 지내고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얻었으며 어머니는 남인의 실학자 이익의 종손녀이며 당대 일유의 문장가이던 이가환의 누이였다.
이와 같이 쟁쟁한 양반집의 자손으로 태어난 만천은 또한 재주가 뛰어나 어릴 때부터 글을잘배워 10세매부터는 벌써 경서를 읽기 시작하고 20세때에는 그 이름이 선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할 유명한 다산 정약용(약용)의 누님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 처남들과 더불어 특히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의 학술서를 많이 읽고 있었다. 그는 옛성현들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하여 학문과 덕행으로써 보다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고 스스로 덕을 닦음에 힘썼다.
그리하여 덕천은 24세때를 전후하여 그의 집이 있던 서울 서교에서 선비들과 더불어 향사례라는 활쏘기 모임을 열게되니 모인 선비가 백여명을 헤아렸다. 그러므로 모두 말하기를 『중국 삼대(하·은·주)의 예의와 문물이 다시 밝혀졌다』라 하고 그를 따르는 선비가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에 있어서도 그는 글을 닦음에 힘써서 25세때에는 소과에 급제하여진사가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를 치를 공부를 하는 한편 동지들과 더불어 천주교를 연구하고 이를 믿고 있었다.

<북경에서 영세>
아버지 이동욱이 1783년 겨울에 동율사의 서상관이되어 북경에 가게되니 그는 천주교 교리 연구회를 지도하던 이벽(벅)들의 권유로 그 아버지를 따라가 그해 l2월에 북경에 이르렀다. 그가 이곳에 머물렀던 40여일 동안에 자주 북 천주당을 찾아가 서양인 성직자들에게 세례를 받기를 청하니 예수회의 「프랑스」 신부이던 「그라몽」(Louis de Grammont)은 필담으로 그를 다루어 본 끝에 그가 천주교의 교리를 잘 깨닫고 있음을 알고 이듬해(1784) 2월에 그에게 「베드루」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정식의 세례를 받게된 덕천은 그곳에서 삭십종의 교리책과 십자고상 묵주(묵주)성상등을 얻어 가지고 곧 서울로 돌아와 이러한 물건들을 이벽에게 넘겨주는 한편 그 동지들에게 대세를 주었다. 그로부터「요안세자」라는 교명으 로 세례를 받은 이벽은 곧 그해 가을부터 전교에 나서서 권철오·일신형제와 정야종·야전·야용 3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범우)들에게 세례를 주고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감을 보고 서울명례동(명동)에 있던 김범우의 집을 교회로 삼아 주일 행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벽은 머리에 두건(책전)을 쓰고 모인 삭십명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우리천주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관혜의 첫박해>
이와 갈이 밖으로부터 어떠한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합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된 것은 온 세계의 전교역사상에있어서 우리민족만이 가지고있는 자랑된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교인들은 서로 교우라고 불러 엄격했던 그때의 계급제도를 타파하려하며 조상의 신주를 신처럼 모심을 걷어치우고 언문이라고 불러 업신여기던 우리 한글로써 교리 책을 만들어 사랑의 복음을 폄에 힘썼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세워진 우리 천주교회는 이듬해인 1785년3월에 관혜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만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양으로 귀양가 2연후 죽게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첫 박해를 받게되니 동방의 「베드루」이던 만천도 그 아우 이치훈(치훈)들의 등쌀에 못 이기어『천주교를 물리친다』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2년후 마음을 돌려 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닦던 반촌(성균관)에서 다시 교회를 세우고 권일신을 주교로 받들며 스스로 이단원· 유관검· 최창뢰들과함께 신부라 일컬으면서 주일미사 등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가성직제를 만들어 몇 해를 지내는 사이에 1789년10월 서울을 떠나 북경에 다녀온 교우 윤유일들의 보고로써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못하다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만천은 마음을 벼슬에 두어 임금의 특명으로 1789년 33세때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그는 그 벼슬자리에 나아가서 공자들을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하지않았다는등의 탓으로 2년후 그 벼슬을 뺏기게 되었다.

< 주신부의 입경>
한편 우리교회를 이끌어가던 권일신들은 배경주교로부터 가성직제를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윤유일들을 그곳에 거듭 보내어 정식의 신부를 보내줄것을 간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북경주교 「구베아」(Gowvea)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주신부는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들어와 강완숙이라는 여교우의 집에 숨어서 4천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윤유일만을 잡아죽이고 만천을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주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돌아다니면서 전교에 힘쓴 결과 1800년까지에는 1만명의 교우를 거느리게 되었다.

<만수리에 묘지>
이러한 때에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그의 계할머니이던 벽파의 금대비 정순왕후가 11세의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정권을 잡게 되어 그는 그해구월부터 교인들을 잡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에는 3백여명의 교우를 죽이는 첫 번째의 큰 박해인 신유교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만천도 잡히어 2월9일 의금부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그달사일에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큰처남 정야종들과함께 피를 흘림으로써 이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으니 때에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의 시체는 며칠후자손들이 몰래 거두어 고향인 인천 만수리(장준동)에 묻게 되었다.<문거·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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