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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와 진정한 칭찬|남의 칭찬을 칭찬으로만 받아서는 안 된다-홍종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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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8·15 스물한돌을 맞이하면서 우리국내에서는 저마다 성년의 기쁨을 축하하는가하면 외국의 인사들도 우리나라 경제의 자립적발전과 국제적 지의의 향상을 많이 축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성년의 기쁨을 축하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5개년의 건설사업은 자립경제의 중요한 단계에 이른 것 만은 사실이다. 앞으로 제2차 경제5개년계획에 다시 희망을 걸어 부족이나 결함이었으면 고쳐가면서 더 크게 노력하여야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더 큰 의욕과 아울러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도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 반면에는 국민의 소비경제가 건설계획보다 지나치게 왕성하고 농촌의 궁핍한 상태에 비하여 도시만이 지나치게 흥청거리고 있지 않는가하는 비판도 크다. 그러나 오늘의 도시국민의 소비, 또는 필요이상의 건축사업이란 것도 나라전반의 생산의 뒷받침이 그 만큼 커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경계하여야할 것은 우리들이 성년의 기쁨을 어느 정도로 기뻐해야 옳을는지? 그런 중에서도 외국친구들의 칭찬 특히 미국측의 치하를 어느 정도로 고맙게 받아들여야 좋을는지? 우리나라측에서 우리의 노력을 자축하고 있다면 미국측에서는 미국의 원조사업을 자축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귀담아들어야 할 것은 미국측의 칭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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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기회가 있어서 8·15 다음날 부산에 왔다. 부산에 오니, 8·15 해방의 감격을 생각하기보다도 6·25로부터 1· 4후퇴 후의 피난살이 기억이 아직 골수에 젖어있음을 한번 더 느끼면서 6·25의 공산괴뢰 침략 바로 전해 겨울이었던가, 우 리국군의 22문단장이었던 로버트소장이 한국을 뗘나던 그때 한국군에 대한 터무니 없는 칭찬이 과연 무엇을 뜻했던가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우리국군이란 것이 어째서 「극동의 가강 우수한 강력한 군대가 될 수 있었던가. 태평로에서 사열식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군대였다는 것은 6·25의 공산괴뢰침략에서 명백히 증명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 때 로버트소장의 우리국군에 대한 칭송은 우리국민으로 하여금 국군에 대한 신뢰감을 높여주었다기 보다도 미군의 철퇴와 아울러 북한괴뢰에 침략의 목표를 더 굳게 가지는데 도움이 되지나 않았던가 싶었다. 속담에도 있듯이 석사란 것은 때로는 가강 큰 흑살 로 대치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생각케 되는 것이다. 6·25를 돌아본다면 북한괴뢰가 10만의 대군과 2백대의 전차를 22선으로 향하여 동원한다면 적어도 수삼개월의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인데 그때 미국당국은 그만한 정보를 왜 가질 수 없었던가. 또 그후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기 전에「맥아더」장군은 웨킨드에서 「트루만」대통령에게 보고하기를 북한 괴롸군은 이미 멸했고, 중공군은 압록강 저편에 30만이있으나, 북한으로 넘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었으나 그 후 초산과 혜산진으로 진격하던 그 때는 이미 중공군이 북한에 잠입해 있었다.
그 때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사업이란 그렇게도 허무한 것이 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던가. 남의 칭찬은 그 어떤 좋은 친고의 것이 조심스럽게 받아 들여야할 것 아닌가 하는것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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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성년을 부산의 역사와 괴피당시의 기억에서 다시 더듬어 보고자 한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상륙한 곳이 바로 부산이다. 선조 방년 4월13일이었던가. 그 후 불과 보름이 못되어 서울의 수두가 뒤 흔들리며 선조대왕이 북으로 평양을 거쳐 의주로 소위 몽진의 피난을 하게 되었을 때 압록강변에 꺼져가는 등잔불같이 남실 거리는 당시의 정부란 것은 여전히 당파싸움으로 날이 샐 줄을 몰랐다.
당시의 허잘 것 없는 당파싸움을 가장 슬피 여긴이가 다름아닌 선조대왐 자신이었다. 이것은 그 옛날의 묵은 역사뿐이 아니었다. 1·4후퇴 후 부산을 임시수도로 하고 온국민이 헐벗그 굶주려 있는그 때, 우리국군장병의 피가 온 산하를 적시고 있을 그때 그당의 우리 경제란 어떤 것이 었던가. 3백수십년 전 임진왜란에 압록강가로 피난갔던 그 당시의 조정과 아무런 다름 없는 당쟁으로 벌떼, 백골단의 사태가 연속해서 벌어졌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일을 어찌 지난날의 일이라고만 할수있으며 오늘의 정치는 어떤것인가, 오늘의 혼란한 여.야의 싸움은 어떤가, 성년을 진정으로 축하할 날은 이제 앞으로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근래의 극동의 정국, 중공과 북한의 침략전쟁 준비의 극성스러움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남의 청찬을 칭찬으로만 받아들이기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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