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토리우스, 악몽의 밸런타인데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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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승리의 상징이던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7·남아공)가 여자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14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피스토리우스는 이날 오전 3시쯤 남아공 프리토리아에 있는 자택에서 권총으로 여자 친구의 머리와 팔 등을 네 차례 쏴 숨지게 했다. 현장에 있던 피스토리우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응급구조대원이 여자 친구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숨진 여성은 남아공 출신의 유명 모델 리바 스틴캠프(30). 영국의 유명 남성잡지 FMH 등에 나왔던 그는 다수의 광고에 출연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 남아공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서 처음 만났다.

 현지 언론들은 피스토리우스의 집이 경비가 삼엄한 부촌 내 대저택이며 외부 침입 흔적이 없다는 점, 이날이 밸런타인 데이(2월 14일)라는 점 등을 토대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펼치려고 들어오던 스틴캠프를 피스토리우스가 절도범으로 오인해 총격을 가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스틴캠프는 사건 몇 시간 전 트위터에 밸런타인 데이 계획에 대한 기대감을 언급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는 현지 보도에 대해 “그런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고 밝혀 오인 사살 보도와 거리를 뒀다. 이전에 피스토리우스 집에서 가정문제로 추정되는 분쟁이 있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체포된 피스토리우스는 경찰 조사를 마친 뒤 곧바로 법원에 출두할 예정이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오른쪽)와 그의 여자친구 리바 스틴캠프가 지난해 11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서 나란히 서 있다. [요하네스버그 AP=뉴시스]

 피스토리우스는 ‘패럴림픽의 우사인 볼트(27·자메이카)’로 불릴 만큼 독보적인 기량을 가진 장애인 육상선수다. 선천적 기형으로 두 다리를 절단한 그는 무릎 아래에 특수 제작한 탄소섬유 의족을 착용하고 역주를 펼쳐 세계인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는 2008년 베이징 패럴림픽에서 100, 200, 400m 3관왕으로 단거리를 석권한 뒤 비장애인들과의 경쟁에 나섰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부터 일반 육상대회에 참여한 피스토리우스는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400m에서 준결승에 진출했고 1600m 계주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트랙을 달렸다.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두 다리를 절단한 선수로선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이어진 패럴림픽에서도 금메달 2개를 따내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냈다. 잘생긴 외모까지 겸비한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카메라 세례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불과 다섯 달이 지난 뒤 살해 혐의로 체포되면서 그동안 쌓은 명성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피스토리우스의 조국인 남아공도 충격에 휩싸였다. 범죄 발생률이 높은 남아공에서는 백인 등 부유층을 중심으로 강력 범죄에 대비해 집 안에 총기를 보관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 사건이 전해지자 곧바로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현지의 한 케이블 방송은 피스토리우스가 출연한 광고 캠페인을 즉시 중단키로 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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