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피의 대가를 달라|신혼1년에 징용 갔던 우씨 경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일제의 발악이 나로 사나 와지던 44년 8월, 경북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 15 우한기(44)씨는 제1차로 징용 영장을 받았다. 꿀 같은 신혼 생활 1년 만에 날아든 청천벼락이었다. 우씨는 처음엔 어떡하든 빠져 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나 매일처럼 집에 찾아와 들볶아 대는 주재소 순사·면서기의 등쌀에 견딜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전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둥 협박하는 바람에 우씨는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지로 끌려갔던 것. 그때의 나이 23세. 아내 손분선씨는 19세의 어린 나이였다.
당시 생후 6개월의 핏덩이 종협(22)군을 남겨 둔 채. 「오끼나와」의 「미야꼬시마」에서 군수물자 하역 작업에 동원된 우씨의 징용표번은 612호. 월노임 1백65원(당시 화폐)으로 노예처럼 혹사당했다. 게다가 미군기의 공습은 날로 더해 눈앞에서 순식간에 동료 38명이 폭사 당하는 생지옥. 종전 임박해서는 식량 공급마저 끊겨 산에 올라가 풀을 뜯어먹으며 목숨을 이었다.
광복 이듬해 3월, 벅찬 꿈을 안고 돌아온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이 아니었다. 떠날 때 몇 마지기 남아 있던 농토마저 다 남에게 팔리고 쓰러져 가는 토막집에서 늙은 부모와 처, 그리고 어린 아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왜놈들이 매달 고향에 부쳤다는 노임은 한푼도 받지 못하고, 이참 상속에서 재기를 다짐한 그는 날품팔이 막벌이도 마다 않고 소처럼 성실히 땅을 일궈 지금은 양계로 부업을 곁들여 마을의 부농이 되었다 한다. 다시 오는 8·15를 맞아 그는 피의 대가, 징용 노임이라도 받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상인=최순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