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3)이조말엽∼중엽 인물중심으로 유홍열|국제무역의 선구자 가포 임상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임상옥은 북경에 왕래하던 우리 사신들을 따라 그곳에 거듭 가서 영약이라고 불리던 우리 인삼을 많이 팔아 큰 부자가 되고 그 공로로 벼슬까지 지내게 된 인삼무역의 거상이었다. 그는 전라도 전주에 본관을 두었던 상인 임봉복의 아들로서 1779년 12월 10일 평안도 의주에서 태어나 자를 경약, 호를 가포라 일컬었다. 그의 조상은 본래 평안도 안주에서 살다가 증조 할아버지 때에 의주로 옮겨 살게 되고 그 아버지는 상인으로서 거듭 북경에 왕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의주에 본거를 두었던 만상(의주의 별명인 용만에서 지어진 이름)의 아들로 태어난 임상옥은 뛰어난 재주와 치밀한 수완과 비상한 담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글을 잘 배우고 장사 일에 익숙하며 중국말도 귀 익혀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조 20년(1796) 18세 때부터 장사 길에 나서서 우리 사신을 따라 거듭 북경에 왕래하는 사이에 찬밥을 먹으며 길 잠을 자야하는 등의 온갖 고생을 겪는 한편 중국 사람들의 장사하는 기술을 익혀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806년 28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게 되고 그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빚돈으로 말미암아 복중에도 장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부국 위한 수출>
이러할 때에 그를 어려운 고비에서 구제하여준 높은 어른이 있었으니 그는 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돈영부 판사(종1품) 박준원의 아들이던 박종경(1765∼1817)이었다.
박종경은 정조 14년(1790)에 소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음공으로 서울의 사학교관을 거쳐 평안도 순안 현령을 지내다가 서울로 돌아와 1801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이후 홍문관교리, 동제학 병조판서, 양주목사, 훈련대장, 이조판서 등의 높은 벼슬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뜻이 굳고 일을 처리함에 밝고 날래며 국비를 절약하여 항상 남음이 있게 하고 특히 소방수진을 만들어 서울의 상가에 두게 함으로써 상인들의 찬송을 받았다. 그가 상인 임상옥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순안 현감을 지내던 때부터의 일인 것 같다.
이리하여 서울로 돌아와 병조판서를 지내게된 박종경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1810년에는 임상옥을 비롯한 의주상인 5명에게 국제무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출품인 인삼의 무역권을 주게 하였다. 인삼은 원래 우리마라와 그 북방의 장백산맥의 산악지대에서 야생하던 불로장생의 영약으로서 산삼이라고도 불러왔으며 특히 중국의 귀인들 사이에 다시없는 회춘의 신약으로 알려져 이를 복용하는 일이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상재 뛰어나고>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의 수용에 맞게끔 그것을 많이 생산하고자 하여 영조말년(1776)쯤부터 산삼의 씨를 경북도 영주의 산악지대에 심게 함으로써 인공재배에 성공하게 하니 이 법은 그 후 전라도를 거쳐 개성지방에까지 퍼져 정조 때부터는 그것을 쪄 말려서 홍삼이라는 이름으로 국제무역에 쓰게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귀중한 인삼의 무역권을 얻게 된 임상옥은 일찍부터 그 지방은 물론 서울에도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그는 같은 평안도 지방에 살던 선비 홍경래를 알게 되어 한때 그를 서사로 쓴 일이 있었으나 그의 성격이 사납고 뜻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고 그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런데 홍경래가 과연 1811년 12월에 반란을 일으켜 한때 정주성을 차지하게 되니 그 지방의 부호들이 모두 이에 휩쓸려 돈을 바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나라로부터 인삼무역권을 얻은 임상옥은 관군을 도와 의주성 등을 잘 지키게 함으로써 이 반란을 5개월만에 가라앉히게 하였다. 이 반란을 가라앉히는 일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병조판서는 바로 임상옥에게 인삼무역권을 주게 한 박종경 이었으므로 이후 이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는 1816년 38세 때에도 많은 인삼을 가지고 북경에 들어갔었는데 이번에는 중국상인들이 그 값을 낮추기 위하여 불매동맹을 맺고 돌아오기 며칠 전까지도 그림자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이러한 흉측한 중국상인들의 잔꾀를 알게 된 임상옥은 어느 날 창고 속에 쌓아두었던 인삼부대를 뜰에 끄집어 내놓고 많은 중국인들이 보는 가운데 그것에 불꽃을 당겼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벌떼같이 모여든 중국상인들은 그 불을 끄면서 부대를 끄집어 내놓고 마구 값을 올려 부르던 끝에 임상옥의 요구대로 10배의 엄청난 값을 치르고 이를 모두 사갔다.
이리하여 단번에 큰 부자가 된 임상옥은 많은 은 덩어리와 비단을 바꾸어 가지고 귀국하여 그의 늙은 어머니에게 여쭙기를 『은 덩어리를 쌓으면 저 마이산만 하고 비단을 쌓으면 저 남문루만 하겠습니다』라 하였다하니 그의 부력을 짐작할 수 있다.
임상옥은 그 후에 있어서도 이 돈벌이를 계속하다가 1821년 10월에는 진주사 이호민의 역관이 되어 북경에 들어가 청국에서 만든 「황청통고신편」이라는 책에 실린 우리나라의 경종조 당쟁기사가 잘못된 것을 고치게 함에 성공하여 관계를 얻었다. 이에 따라 아직 과거시험조차 치러보지 못하고 있던 그는 1832년 54세 때에는 임금이 특명으로 평안도의 곽산군수가 되었으니 이는 서북인으로서 보기 드문 영예였다. 그는 이 벼슬을 지내는 사이에 어진 정치를 베풀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고 다른 지방관처럼 백성의 피를 긁어먹지 않았다. 더우기 1834년에 큰 홍수로 의주지방의 백성이 많은 손해를 입게 되자 그는 많은 자기의 돈을 내서 그들을 구제하여 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그 해 6월에 국방상 요지인 귀성부사가 되었으나 국방의 일을 맡아보던 서울의 비변사에서 그를 헐뜯는 말이 생겼다함을 듣고 이를 그만두고 의주로 돌아왔다. 그는 벼슬을 그만둔 후 이 큰집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읆다가 1855년 5월 20일에 77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저서로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읊은 수천의 시를 모은 「가포집」과 그 혼자만이 읊은 시를 모은 「적중일기」가 있다. <문박·서울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