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베트남에서 온 訃告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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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며칠 전 베트남에서 팩시밀리를 타고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호치민 팜반하이 거리에서 라이따이한(베트남의 한인 2세)을 돌보며 사는 올 68세 고령의 정주섭 선생이 보낸 것이었다.

"이곳 베트남에서 인간문화재 감이었던 유남성(柳南城)옹이 1월 6일 새벽 별세했다네. 지금 막 남사이공 주택가에 차려진 빈소에 애도를 표하고 돌아왔네. 그 노인에게 관심을 쏟았던 許기자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는 걸세. 서울의 딸에게 연락 취해주게나. "

사연을 읽다말고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8년9개월 전인 1994년 4월 말, 호치민으로 유남성옹을 찾아 나섰던 장면이 휘돌아 지나갔다. 그러다가 기억 속에서 살아생전 그가 남긴 의미 있는 문구를 하나 건져냈다. "전쟁은 길 위에서 헤어지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올 날을 약속하고…."

국제전화로 정주섭 선생을 찾아 장례비를 걱정했다. "우리끼리 해야지. 너무 오래 투병을 하다 보니 이젠 이곳 영사관에도 유남성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

수화기를 놓으며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랐다. 94년 5월 초 수소문 끝에 찾아간 호치민 쩌라이 병원과 거기 한 병실에 의식을 잃고 누운 유남성옹의 모습만 또렷할 뿐 구체적인 사연은 가물가물했다.

낡은 취재수첩을 펼쳤다. 깨알 같은 노트 속 메모에서 그는 조금씩 되살아났다. 5개 이름으로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떠돈 부평초라는 표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17년 강원도 양양군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 이름이 '수근(洙根)'. 황해도.함경남도 등을 유랑하며 철령 금광에 일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부터 '남성(南城)'으로 불리며 광물 전문가로 성장해 갔다.

그러다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동남아지역 희귀금속 탐사 요원으로 차출됐다. '야나이 가쓰오'라는 이름의 일본 군인 신분이었다. 그의 42년 12월 어느 날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 건강을 빌던 늙으신 어머니, 거기다 서빙고역에서 노량진역까지 울면서 따라오던 임신 3개월의 처…. 그들과 생이별이 될 줄이야. "

야나이 가쓰오는 45년 일본의 패전 후 귀국 기회를 놓치고 북베트남에 잔류했다. 이제 그의 이름은 '레 반 응'. 54년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승전 직후 남긴 그의 소회는 눈물겹다. "9년의 전쟁 기간 중 베트남 아내를 얻고 내 손으로 2남2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예쁜 아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라리아로 떠나보낸 기구한 운명이 어디 있을까. 내 품에서 숨을 거둔 아이를 차례로 거적에 싸서 파묻어야 했던 애달픈 사연들…. "

이후 그는 부인과 둘이서 17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베트남으로 탈출해 '리유 남 타잉'이란 이름으로 새 삶을 꾸렸다. 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이 월맹군에 접수된 후 부인과 함께 서울행 비행기를 탔지만 한국에서의 생활 또한 순탄치 않았다.

부인을 병으로 잃고 홀몸이 된 그는 결국 94년 2월 다시 베트남으로 떠났다. 거기서 그는 불과 두 달 후 중풍으로 쓰러졌다가 이제사 호치민 남쪽 롱안의 야산에 묻혔다.

92~93년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으로 발칸반도에 머물면서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했던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책을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야만의 기록'이라는 그 책의 부제를 되뇌었다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유남성옹의 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을 뒤로 하며 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해답은 다음과 같은 피터 마쓰의 마지막 멘트에 있다고 해야할 듯하다. "문제는 저기 어딘가에 아직도 인간의 야수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

허의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