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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외교 물꼬 튼 탁구영웅 좡쩌둥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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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71년 4월 4일 중국 선수단 버스에 탔던 미국 선수 글렌 코완(오른쪽)이 좡쩌둥(왼쪽)에게서 선물 받은 황산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 4월 4일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던 일본 나고야. 체육관에서 몸을 풀다 자국 선수단 버스를 놓친 미국 선수 글렌 코완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이때 옆에 있던 중국 선수단 버스에서 ‘차에 타라’고 손짓한 중국인이 있었다. 국제사회가 20년 넘게 냉전의 양 진영으로 갈라져 있을 때다.

적성국 선수를 부른 이는 ‘체육영웅’ 칭호를 듣던 좡쩌둥(莊則棟). 중국 선수단 버스에서 코완이 내리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좡은 코완에게 황산(黃山)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했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좡은 나중에 “처음엔 무척 망설였지만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를 만난 것을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코완은 기자들 앞에서 “안 가본 나라를 방문하고 싶다”며 중국 방문의사를 밝혔다. 소련과 대립하며 손잡을 기회를 모색하던 미·중 양국으로선 천재일우였다. 마오 주석은 즉시 미국 선수단을 중국에 초청했고 이들은 수만 명의 환영 인파에 휩싸였다. 3개월 후 헨리 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이 베이징을 비밀 방문했고, 이듬해엔 리처드 닉슨이 미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죽(竹)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 ‘핑퐁외교’의 계기를 제공한 좡쩌둥이 10일 눈을 감았다. 73세. 2008년부터 결장암으로 투병해오다 베이징 시내 병원에서 숨졌다. 열 살 때 탁구를 시작한 그는 61, 63, 65년 세계선수권 남자단식을 3연패하며 중국 탁구 세계 최강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마오쩌둥의 전처이자 문화대혁명기 ‘4인방’의 한 명인 장칭(江靑)은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덕분에 문혁 말기인 74~76년 국가체육위 주임을 맡기도 했다. 76년 마오쩌둥 사후 4인방이 실각하자 좡쩌둥도 조사를 받아야 했다. 장칭의 정부(情夫)라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좌천돼 산시(山西)성 탁구대표팀을 지도했다.

 85년 베이징에 돌아온 이후엔 선수 지도와 강연으로 한동안 풍족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암 투병을 시작하며 치료비로 재산을 탕진했고 말년엔 자신의 탁구 라켓을 경매에 내놓을 정도로 궁핍해졌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류궈량(劉國梁)·마샤오춘(馬曉春) 등 한 시대를 풍미한 탁구스타들이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 애도문을 잇따라 올렸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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