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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시설 나눠먹기로 지자체 통합 뒤탈 막으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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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 옛 육군대학 부지. 해발 528m의 장복산을 배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28만㎡의 부지에는 수십 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잘 보전돼 있다. 높은 곳에서는 멀리 바다도 볼 수 있다. 창원시가 지난달 30일 프로야구 제9구단인 창원 NC다이노스의 전용 야구장 건설 부지로 확정, 발표한 곳이다.

부지 정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360여개 점포가 몰린 진해중앙시장이다. 거리 곳곳에 ‘야구장 부지 확정’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시장 상인 박성훈(45)씨는 “상인들은 뭐라도 들어오면 다 환영하는 분위기”라며 “야구장이 들어오면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야구계, 진해 부지 선정에 우려감

하지만 신규 구장 부지에 대해 야구계의 눈길은 차갑다. 시즌 중 주 2∼3회씩 경기가 펼쳐지는 야구장의 입지를 고려할 때 인근 지역의 인구와 접근성이 가장 중요한데 진해 부지는 이런 점을 충족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NC다이노스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KBO 양해영 사무총장은 “NC구단은 물론 KBO도 선정된 구장 부지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며 “야구계의 희망을 저버린 부지 선정 과정에 대해 용역 보고서 공개 등을 요구했지만 응답이 없어 창원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지난해 창원시의 구단 부지 평가작업에 참여했던 동명대 전용배(체육학과) 교수는 “배경 인구를 보자면 창원시는 9개 구단 중 가장 작은 시장인데, 그중에서도 외진 곳인 진해(인구 18만 명)에 구장을 짓겠다는 건 야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KBO와 NC는 불만이 크지만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못한 채 속앓이를 하고 있다. 당장 NC는 올해부터 1군에 참여해 현 마산구장을 연고지로 시즌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창원시와 갈등을 빚는 게 부담스럽다. NC다이노스 이태일 대표는 “우리는 야구장이 가장 활성화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를 희망하는 것일 뿐 어떤 지역은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며 “창원시는 진해 구장의 적기 완공과 접근성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 구단, KBO 등과 사전 협의를 통해 구체적이고 책임 소재가 분명한 실천 로드맵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부지를 진해로 정한 창원시의 입장은 확고하다. 야구장 부지를 결정하는 것은 창원시의 고유 권한이며, 통합 창원시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최적의 부지를 선정했다는 입장이다.

창원시 황양원 문화체육국장은 “야구장 입지로는 물론, 장래 진해와 통합 창원시의 발전을 위해서도 최적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황 국장은 “KBO와 약속한 2016년 3월까지 구장을 완공하기 위해 행정 전문가들로 구성된 사업단을 4일 발족했다”며 “각종 행정절차와 건설을 동시에 진행해 차질 없이 구장을 완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지역주의 갈등이 근본 이유

야구장 부지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다. 정작 창원 시내를 돌아보면 현재 시민들의 관심사는 야구장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공무원·시의원은 물론 시민 대다수가 야구장은 진해로 이미 확정된 것으로 본다. 진해중앙시장 번영회 하영옥 회장은 “해군의 단계적 축소와 지역 사업체의 부진으로 어려운 진해에 야구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선정된 부지를 다시 바꾸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창원 시민들의 관심은 야구장 부지 위치보다 통합 시청사 이전에 쏠려 있다. 2010년 7월 창원·마산·진해시가 합쳐져 출범한 통합 창원시는 아직 통합 시청사를 지을지, 짓는다면 어디에 지을지 못 정한 상태다.

통합 시청사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시의회 내부의 반목은 뿌리 깊다. 창원·마산·진해 출신 의원 3명씩으로 구성된 의원협의회가 5일 3차 회의를 했지만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황일두 시의원(마산 교방·노산)은 “마산 시민들의 주장은 2010년 2월 통합준비위원회 합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라며 “창원 쪽 의원들이 합의 정신을 무시하려는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당시 통합준비위원회는 ▶통합시 명칭은 창원시 ▶통합 청사는 마산·진해 1순위, 창원 2순위 ▶용역을 통해 시의회가 결정한다 등의 내용을 합의했다.

김동수 시의원(창원 북면·의창동)은 “합의 내용은 순위와 상관없이 마산·진해·창원 후보지 중 최적지를 정하라는 뜻”이라며 “마산 의원들이 합의 내용을 근거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게 문제”라고 엇갈린 해석을 했다.

마산 시민들은 강경하다. 마산살리기 범시민연합 조용식 회장은 “시의회 임시회가 끝나는 3월 초까지 통합 청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합의 정신대로 되지 않으면 상상을 넘어서는 강경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시의원은 통합 청사 마산 이전이 안 되면, 통합시의 이름을 창원시에서 마산시로 되돌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3개 지자체의 통합이 무리하게 이뤄지면서 각종 개발사업이나 시설 유치를 두고 소지역 간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야구장 부지 선정에도 이런 소지역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시민들 자발적 합의 없었던 게 문제

창원대 강정운(행정학과) 교수는 “통합을 빨리 추진하기 위해 대형시설을 각 지역에 선물로 주려다 보니, 야구장이나 시청 등 시설을 가져와야 지역 균형발전이 될 것처럼 주민들이 인식한다”고 말했다. 시민과 공무원, 의원 등 모든 이해관계자가 ‘시설 유치=지역발전’이란 프레임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지난해 도지사 보궐선거 새누리당 경선 과정에서 ‘도청 청사 마산 이전’을 들고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현재 창원에 있는 경남도청을 마산으로 옮기겠다는 얘기다. 홍 지사는 이 밖에 ▶진주에 제2도청사를 짓고 ▶진해에는 경상대 의대 캠퍼스 이전 또는 신규 의대 유치 등을 내걸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홍 지사는 4일 “우선 현안인 창원시청사 문제가 매듭지어진 뒤에 시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도청사 이전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아예 통합을 되돌리자는 말도 나온다. 실제 지난해 도지사 선거 때 권영길(무소속) 후보는 “시민들의 합의 없이 통합이 졸속으로 이뤄져 문제가 컸다”며 “통합을 취소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지자체 통합 과정에서 불거지는 갈등은 창원만의 일이 아니다. 여수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1998년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통합한 지 올해로 15년째지만 여전히 여수에는 시청사가 세 곳이다. 통합 청사 위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해 통합 전 각 지자체의 청사가 모두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통합을 추진 중인 곳만도 ▶전북 전주시와 완주군 ▶충북 청주시와 청원군 ▶충남 홍성군과 예산군 등 여러 곳이다. 창원이나 여수와 비슷한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창원대 강정운 교수는 “어쨌건 통합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통합시의 명칭이나 시청사 등 상징적인 사안은 법적으로 확실하게 매듭짓고 시작해야 한다는 게 창원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시민의 자발적 합의 없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진행되는 지자체 통합의 모든 문제가 담겨 있는 사안”이라며 “정부도 통합 이후 과정을 지자체에만 맡기지 말고 갈등 사안의 합의 절차를 담은 매뉴얼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창원=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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