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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현장 확대경] 교통사고 후 성격이 달라졌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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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의료는 곧 사회다'. 각자의 건강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인간의 사회활동은 제도.조직과 같은 사회환경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국민의 건강권은 의료 제도와 보건의료망 등 개인의 건강과 안녕을 지지해 주는 하드웨어가 완비됐을 때 보장될 수 있다.

중앙일보 건강의료팀은 새해를 맞아 국민 건강과 관련된 보건의료 환경을 점검하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의료현장 확대경'을 매달 1회씩 연재한다. (편집자)

첫눈 내리는 날 미국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재회하기로 한 워런 비티에게 아네트 베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수년 뒤 다시 만난 베닝은 휠체어를 탄 상태였지만 아름다운 자태와 심성은 그대로 였고 마침내 사랑을 이룰 수 있었다.

영화 '러브 어페어'의 줄거리다. 그러나 만일 교통사고 후 만난 연인이 과거와 달리 성격이 난폭하고 거칠어졌다면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교통사고로 뇌를 다치고 이 때문에 실제로 성격 변화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38만여건. 이중 머리를 다친 경우가 7만여건이나 된다.

인천 중앙길병원 정신과 함봉진 교수는 "이들 중 10~20%는 크고 작은 정신과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그냥 넘긴다"고 지적했다.

*** 의식 잃으면 뇌손상 우려

1998년 4월 36세였던 K씨는 운전 도중 교차로에서 다른 차량과 측면 충돌했다. 30분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그는 기억장애와 두통.어지럼증을 앓아야 했다. 뇌를 다쳤기 때문이다.

모호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배달운송업을 하던 L씨는 수년 전 추돌사고로 잠시 의식을 잃었다. 뇌 CT 등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퇴원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L씨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자상했던 그는 아이들이 조금만 떠들어도 소리를 지르는 신경질적인 아빠로 변했다.

조금만 일이 안 풀려도 손찌검을 하고 아내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편집증 증세였다. L씨는 교통사고로 안와 전두엽(眼瓦 前頭葉)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를 치료했던 부천 순천향병원 정신과 정한용 교수는 "뇌는 머리뼈 안에서 뇌척수액에 의해 둥둥 떠있기 때문에 외부적 손상이 없어도 추돌시 뇌가 앞으로 쏠리면서 머리속 뼈에 부딪쳐 손상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와 전두엽은 충동적 공격성을 주관하는 중추. 이곳을 다치게 되면 난폭하고 짜증을 잘 내게 된다는 것.

문제는 성격의 변화가 교통사고 후유증이란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과 의욕상실.불면증 등 다양한 후유증이 뇌 손상 부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정신적 후유증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 일찍 손 써야 악화 막아

하지만 정신과적 후유증은 신체 손상과 달리 보상이 잘 안된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경인손해사정 대표 박한석 손해사정인은 "교통사고 후 정신과적 후유증은 노동력 상실로 인정받지 못해 치료비 정도만 보상받을 뿐 장애로 인한 실직 등에 대해선 보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상을 받으려면 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보상을 목적으로 한 꾀병도 가능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 교통사고를 당한 30대 직장인이 두통에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개월 동안 휴직했다.

그러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데다가 처방약의 부작용인 입마름증이 나타나지 않는 점, 진술이 일관되지 못한 점을 의심한 의료진이 혈액검사를 실시한 결과 약물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애초 보상이 목적이었으므로 약을 먹지 않은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정한용 교수는 "교통사고로 잠시라도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면 뇌 손상이 우려되며 이 경우 일찍 발견해 치료하면 후유증을 줄일 수 있으므로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진찰을 받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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