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섬진강의 봄] 1. 봄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봄, 입니다. 유독 모질었던 올 춘설도 지금은 싹 씻겨갔습니다.오늘 하늘이 꼭 봄, 입니다. 맑은 하늘, 귓가 간지르는 실바람, 살랑대는 봄처녀 치맛자락에 멀미가 날 판입니다. 섬진강 200리 물길이 막 비롯하는 산골 마을에 김용택(57) 시인이 있습니다. 시인은 전북 임실군 덕치초등학교의 2학년 담임입니다. 2학년 학생은 모두 넷. 시인의 학급 정원입니다. 시인은 "아이들 뛰노는 모양이 그대로 봄"이라고 합니다. 섬진강 시인이 봄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귀하신 봄볕 후딱 가실까, 얼른 1신(信)을 띄웁니다.

창 밖에 눈이 오고 있다. 봄눈이다. 바람 없이 잔잔하게 온다. 저렇게 잔잔하게 오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땅으로 내린 작은 눈송이들은 흔적도 없이 녹고 자꾸 내리는 눈송이를 가만가만 받아 든 운동장 가 벚나무 가지들이 금세 그림처럼 하얗게 팔을 뻗어간다.

하도 눈 내리는 모습이 가만가만 예뻐서 나 혼자 그렇게 눈을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창가로 불렀다. 아이들이 내 곁에 나란히 선다. 우리 반 아이들 네 명과 창가에 나란히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보아라! 아이들아! 눈이, 어디로 간 눈송이들은 쌓이고 또 어디로 간 눈송이들이 녹는가. 눈송이들은 산을 그리며 하얗게 날린다. 늘 먼저 나서는 유빈이가 "어? 선생님! 까치들이 날아다니네요" 하며 엉뚱한 대답을 한다.

하얗게 쌓인 나뭇가지 속에서 까치들이 작년의 집들을 수리하느라 바쁘다. 까치들이 집을 수리하느라 부산하게 학교 교정을 돌아다니면 나는 늘 봄을 느낀다. 조금 있으니, 아이들 몇이 운동장으로 뛰어나온다. 쉬는 시간이다. 아이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손으로 받고 입으로 받으며 뛰어 다닌다. 아이들 목소리가 학교 가! 득 울려 퍼진다.

강 건너 마을 뒷산 밭에도, 밭으로 가는 실날 같은 길에도 눈은 쌓이지 않는다. 감쪽같이 녹아버리는 눈송이들로 촉촉하게 젖은 땅 위에 벌써 파란 풀잎들이 돋아나 있고, 어떤 풀들은 꽃을 피웠다. 흰눈 날리는 날 핀 풀꽃들은 눈이 시리다.

한시간 공부를 하고 다시 창 밖을 보니, 나무 가지에 하얗게 쌓여있던 눈이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나뭇가지들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가지들도 물이 올랐는지 붉고 푸른색을 띠고 있다. 오! 물오른 푸른 나뭇가지들! 꽃망울들이 부쩍 커졌다. 놀랍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봄이 온 것이다. 꿈 같이 왔다가 꿈 같이 사라져버린 봄 눈 속으로 봄이 또 온 것이다.

김용택 시인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