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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황 히로히도 일화(끝)「맥아더」원수와 일황-레나드·모슬리(LEONARD·MOSLEY)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맥아더」 사령부는 천황의 신격문제처리에도 곧 손을 썼다. 원수는 일본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일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일본에서 정녕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려면 「신도」가 존재하는 한 대단히 힘들 것이라고 「맥아더」는 믿었다. 원수는 그 회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천황 자신이 신도의 사교로서 미개시대부터의 신화적 교리에 의해서 신이 된 역대 천황으로부터 정신적 권력을 이어받고 있었다.
일본 국민은, 천황 자신은 신이며 모든 신민의 최고 목적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인 군부는 이 신앙을 그들을 위해 이용했으며 항복후에도 신도를 위한 국가보조금은 나가고 있었다』
1945년 12월에 「맥아더」원수는 일본정부에 대해 차후부터는 신도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모두 끊으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신사들은 이제 독지가들의 기부금을 가지고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의 일본인들은 신사에 바칠 기부금이나 신궁에 나눠줄 식량도 없었기 때문에 신사의 몰락은 뻔했다.
「맥아더」원수는 그의 회상기에서 천황이 「인간선언」을 결의 발표한 것은 자기가 권고했거나 또는 나아 상의한 후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황 자신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거니와, 신의 권력을 자기것이라고 사칭한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천황의 입장을 바꾸는데는 「신」을 「왕」이라는 칭호로 옮겨 놓는 것만으로 족했다.
1946년 정월 1일에 천황은 신격을 부정하는 칙서를 발하고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천황은 황후를 보고 『어디 달라진데가 있소? 당신눈에는 지금의 내모습이 전보다 더 「사람」처럼 보이오?』라고 물었다. 일본국민 눈에는 다를게 없을지 모르지만 「맥아더」원수의 눈에는 확실히 다르게 비쳤다.
원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천황의 새해 「메시지」는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천황은 일본국민의 민주화에 지도적 역능을 맡고 앞으로의 천황 지위가 자유주의 노선에 따를 것임을 분명히 약속하였다. 천황의 이와같은 행동은 극히 건전한 것이다.』
이제 일본국민은 천황의 행차때에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없었지만 「히로히도」는 인간선언을 하고서 1950년까지 일본 천황으로서의 기반을 가장 튼튼히 하였다. 「맥아더」사령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1946년 1월에 천황지지율은 90.1「퍼센트」로서 등록된 89개 정당단체중 4개 정당만이 반대하고 있었다.
1951년의 여론조사는 지지율이 90.3「퍼센트」로 상승했고 정당은 공산당만이 반대였다.
일본의 천황은 전전과 전후, 국민의 천황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종전과 다름없는 일본의 천황이었다.
천황 자신으로서는 사실 아무런 변함도 없었다. 여성참정권 획득, 전쟁포기, 가족제도 폐지 같은 전후일본을 뒤흔든 격동속에서도 천황의 일상생활에는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천황은 피안의 궁성에 사는 고귀한 존재이며 실권이 없는 망각의 군주였다. 천황도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1946년 천황은 동경에서 열린 세계「올림픽」경기때, 궁성을 나와 정면관람석에 앉아서 선수들을 바라다보며 각종 경기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천황은 옆자리에 앉은 「라이샤워」 미국대사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평생, 오늘처럼 행복한 날은 없소. 나는 이때까지 국민과 너무 동떨어졌던 것같소. 하지만, 국민과 아주 접촉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나는 「텔리비젼」을 열심히 봅니다. 「텔리비젼」은 내 생활을 일변시켰읍니다.』 <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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