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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형 선고받고, DJ·노무현도 '뒤통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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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청와대에 인사 명단을 주면 그분들이 임기 말에 보안이 되겠느냐? 왜곡된 정보도 많이 들어간다. 그러니 청와대에는 명단을 주기 어렵다.”(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관계자)
“경찰청, 국세청에는 인사 명단을 주고 검증시키면서 왜 청와대는 못 준다는 건가?” (기자)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청와대에 명단이 들어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히 휘둘리게 된다. 못 준다.”(인수위 관계자)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측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 2일 중앙SUNDAY와 박 당선인 인수위 측의 통화에서 드러났듯 인수위 측은 앞으로도 총리·각료를 인선하면서 경찰청·국세청은 몰라도 청와대에는 명단을 줄 생각이 일절 없다고 말했다. 재산 현황과 아들들의 병역면제 같은 인사 검증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 체크에 소홀해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낙마를 불렀음에도 검증의 핵심 정보를 쥔 청와대의 도움은 받을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거취 문제도 신구 권력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초 목영준·민형기 전 헌법재판관을 헌재소장 후보 1, 2순위로 밀었지만 박 당선인 측이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을 밀자 동의해 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지난달 3일 이 전 재판관을 헌재소장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박근혜 당선인 측과 조율했다”(박정하 대변인)고 이례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검증 핵심 정보 쥔 청와대 도움 거절
양측은 5년 전 임기 말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퇴임하는 이택순 전 경찰청장의 후임을 놓고 어청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타협을 본 전례도 참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12월 말 안에 시행할 인사만 자체적으로 하고, 1월 중에 시행할 헌법재판소장과 검찰총장 인사 등은 모두 박 당선인 측의 뜻에 따르겠다고 시그널을 보내놓았던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동흡 후보자가 지명 직후부터 업무추진비 남용 의혹 등 논란에 휘말리자 양측은 이 후보자의 거취를 놓고 갈등을 드러냈다. 청와대 측은 “박 당선인 측의 의견이 반영된 인사”라면서 이 후보자의 거취에 관여할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반면에 박 당선인 측은 “이 후보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중에 지명한 사람”이라며 “그의 거취를 우리 측에 왜 물어보느냐”고 반문했다.

정치권에선 “김용준 총리 후보자 낙마로 상처를 입은 박 당선인 측이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의 거취까지 책임질 경우 내상이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한 때문”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이 대통령 측근 인사들은 “박 당선인 측의 뜻을 존중해 결정한 인사인데, 막상 문제가 불거지니까 책임을 청와대로 떠넘긴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2일 “이동흡 후보자가 사퇴할 뜻을 밝히지 않고 있는 건 박 당선인 측이 이 후보자에게 사퇴하라는 시그널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며 “결국 이 후보자 본인의 뜻에 달렸는데, 그분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단행한 설 특별사면에 대해 박 당선인 측이 이례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건 양측의 갈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사면 직후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조윤선 당선인 대변인은 “국민의 지탄을 받을 일”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박 당선인 본인도 직접 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잘못된 관행을 확실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가까운 여권 인사들은 “비판이 지나쳤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청와대 수석급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중순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을 만나 사면 내용을 미리 설명해 줬다. 그러면서 “이상득 전 의원 등 대통령 친인척은 사면에서 제외됐고, 서갑원 전 의원 등 야당 인사들은 포함됐다”고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의원은 “대통령 임기 말에 측근들을 사면하는 건 미국 등 선진국 대통령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다 했던 당연한 일”이라며 “친인척도 사면 대상에 넣어야 한다. 우리가 야당이니 비난 성명을 한 차례 내겠지만 그걸로 끝날 것”이라고 오히려 훈계를 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측근 인사들은 “야당조차도 이렇게 임기 말 사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데, 친인척을 제외하고 최시중·천신일씨 등 측근 일부만 사면한 걸 전례 없이 문제 삼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박 당선인 측을 비판했다.

그러나 박 당선인과 가까운 여권 관계자는 “사면 반대 입장은 평소 원칙과 법치를 강조해 온 박 당선인의 소신이 반영된 것”이라며 “박 당선인도 본인의 대통령 임기 말 겪게 될 수 있는 사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측면이 있음에도 반대 의사를 밝힌 걸 유념해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정부가 최대 치적으로 꼽는 4대 강 사업을 놓고도 신구 권력은 충돌했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은 지난달 22일 브리핑에서 4대 강 사업이 총체적 부실이라는 감사원 감사 결과와 관련해 “조사를 통해 의혹이 있으면 밝히고 고칠 것은 고치고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 “그런 문제에 대해 따로 입장을 내지 않겠다”고만 밝힌 데서 선회해 이명박 정부와 선 긋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는 1일 배포한 ‘청와대 정책 소식지’ 전문가 칼럼을 통해 김태진(화학공학과) 수원대 교수의 기고를 실어 박 당선인 측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반박했다. 기고에서 김 교수는 “지난해 여름 수차례에 걸친 태풍과 유례 없는 가뭄을 피해 없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4대 강 사업의 효과”라며 “우리는 칭찬에는 인색하고 비판에는 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 당선인과 가까운 새누리당 관계자는 2일 “4대 강은 어차피 박 당선인이 집권 뒤에 떠맡고 갈 수밖에 없는 이슈”라며 “이명박 정부에서 4대 강에 대해 책임져야 할 부분들은 미리 분명히 해놓고 가야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박 당선인 측과 갈등이 부각되는 것을 최대한 꺼리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박 당선인의 사면 반대에 대해 익명의 관계자가 발언하는 형식으로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한마디 한 것 외엔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박 당선인의 사면 반대에 대한 입장을 묻자 “아무 할 말이 없다”고만 말했다.

“당내 권력 승계하고도 갈등 심한 게 문제”
새누리당 관계자는 “과거 대통령들은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위기상황이 조성되면 전직 대통령이나 측근을 사법처리해 상황을 돌파하곤 했다”며 “이런 전례를 잘 아는 이명박 정부로선 속이 상하더라도 박 당선인 측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권 인사는 “박 당선인 측이 2007년 대선 후보 경선과 2008년 총선 ‘공천학살’ 논란, 2009년 세종시 수정안 논쟁 등을 겪으면서 이 대통령 측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이 현재 신구 권력 갈등의 본질적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이 대통령의 탈당을 추진하지 않았고, 임기 말까지 이 대통령의 권한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한 만큼 양측의 갈등이 걱정할 수준까지 격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미국은 백악관을 떠나는 전직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를 직접 편지로 써서 집무실 책상에 놓고 가면 후임 대통령이 들어와 그 편지를 읽는 것으로 첫 업무를 시작한다”며 “신구 권력이 충돌하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정책 승계도 순조롭지 못한 만큼 양측이 대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도 “같은 당에서 권력이 승계됐는데도 갈등이 심하다는 게 문제”라며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직후 대북 송금 특검 문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 측과 싸웠지만 지금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양측이 유연성을 갖고 협조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정화 기자 jh.insight@joongang.co.kr


신구 권력 갈등사
30년 지기를 후계자로 삼아 대통령으로 만들어도 소용 없었다. 같은 정당 출신이 정권 재창출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신(新) 권력과 구(舊) 권력이 갈등을 빚어 결별하는 악연은 1987년 민주화 이후 26년간 한국 정치에서 반복돼 온 패턴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8년 11월 강원도의 백담사에 쫓기듯 들어갔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여론을 피해서였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지 9개월 만이었다. 직접 후계자로 세운 육사 동기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을 방조했다.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가까운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기까지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다음 정부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그는 자신이 이끌던 민주정의당 등의 힘을 보태 92년 김영삼(YS)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하지만 3년 뒤 YS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면서 사법처리 대상이 됐다. 반란죄·내란죄·수뢰죄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YS가 퇴임 직전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특별사면해 주긴 했지만 약 2년간 수감생활을 견뎌야 했다.

YS도 김대중(DJ) 정부에서 차남 현철씨 문제로 마음고생을 했다. YS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민주화 운동 동지로 97년 대통령 당선인이 된 DJ에게 한보 비리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아들 현철씨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 DJ는 정부 출범 뒤 사면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참모들의 반대 등을 이유로 1년여가 지난 뒤에야 잔형 면제를 시켰고, 양김(金) 사이는 틀어졌다.

DJ는 200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당선인을 나흘 만에 청와대 오찬에 초청하고 “모든 게 잘됐다”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인은 김대중 정부 시절 6·15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수천억원을 건넸다는 대북 불법송금 사건에 대한 소신 수사를 주문했다. 집권 후엔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대북 송금 특검법을 발의하자 여당인 민주당과 진보단체의 반대에도 특검을 수용했다. DJ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DJ의 측근인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명박 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국가 기밀인 대통령 당시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불법 유출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인사들을 대거 교체했다. 갈등은 2009년 부인 권양숙 여사가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흘러나오고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결국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헌정 사상 초유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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