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그놈의 구관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8호 34면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중에서

집에는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두 권 있다. 물론 어느 집에나 같은 책이 두 권 있을 수 있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에 나오는 내용처럼 남녀가 결혼하면 결혼 전에 읽었던 책들도 따라오는데 같은 책이 몇 권쯤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같은 책이 두 권 있을 이유는 많다. 이미 집에 있는 책을 선물받을 수도 있고, 예전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재미있게 읽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서점에서 또 한 권의 책을 살 수도 있다. 좋아하는 책이라면 개정판이나 새로운 번역본을 구입할 수도 있다. 가령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세로쓰기 판으로 한 권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가로쓰기 판으로 또 한 권을 샀다든지. 『위대한 개츠비』 역시 이미 두 권이나 있었지만 작가 김영하의 번역이 궁금해서 또 한 권을 주문했다든지. 『공산당 선언』은 번역본만 다섯 가지 판본이 있다든지.

같은 판본의 책을 한꺼번에 두 권이나 사는 사람이 있을까? 뭐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실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게다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 그는 우리 집에 산다. 내 아들이니까.

아들에게는 황인찬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두 권 있다. 왜 두 권이냐고 나는 물었다. 아들은 한 권은 갖고 다니며 읽고 또 한 권은 시인의 서명을 받아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인찬은 아들의 학교 선배다.

나는 아들만 둘이라 항상 딸 둔 부모가 부럽다. 내게도 딸이 있었으면 아마 내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내 얼굴만이라도 달라졌을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든다. 아들은 오래 씻는다. 구관조라도 씻기는 걸까? 샤워시간이 얼마나 긴지 그동안 나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주름이 지고 수염이 자라면서 늙는다. 늙은 나는 아들이 샤워하러 들어간 후 물부족 국가인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것은 아니고 계속 불어만 가는 아파트 관리비를 걱정한다.

어느 날 나는 아들의 책꽂이에 『구관조 씻기기』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는 걸 본다. 아들이 시집을 다 읽은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들에게 나는 한 권을 좀 빌려달라고 말한다. 아들은 안 된다고 고개와 손을 가로쓰기로 흔든다. 역시 아들이다. 딸이라면 두 권 다 빌려주었을 텐데. 아들이니까 “아빠도 한 권 사서 읽으세요”라고 구관조처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물었다. “왜 한 권은 갖고 다니며 읽는 용도라며?” 구관조가 말했다. “선배가 두 권 모두에 서명을 해줬으니까요. 두 권 다 간직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 두 권의 시집에는 시인의 서명이 다 들어 있었다. 헌사는 아름다웠다. 나는 그 헌사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 이랬던 것 같다. 한 권에는 “항상 예쁜 휘강아, 앞으로도 줄곧 예쁘자. 새해에는 더욱 아름다운 일들이 가능해지기를”이라 적혀 있었고 다른 한 권에는 “비에도 눈에도 지지 말고 언제나 씩씩하게 걸어나가자”고 쓰여 있었다.
아들에게는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두 권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