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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힐링이 필요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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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요즘 아껴가며 읽고 있는 만화가 있다. 일본 작가 마스다 미리의 여자 만화 3부작이다. 마스다는 30대 싱글 여성 ‘수짱’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로 큰 인기를 끌면서 일본 독신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고 있는 작가. 그의 대표작인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주말엔 숲으로』 세 편이 지난해 말 한국에서 번역·출간됐다.

 혼자 사는 카페 매니저 수짱, 딸 하나를 둔 전업주부 미나코,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이사한 번역가 하야카와 등 세 작품의 주인공은 각각 다르다. 하지만 다들 30대를 통과 중인 여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만화에는 이들의 심심한 삶이 심심하게 그려진다. 특별한 좌절이나 그럴싸한 연애담은 당연 없고, 사건이란 게 회사 옆자리 선배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에피소드 정도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각종 잡념들과 퇴근 후 (여자)친구를 만나 나누는 조곤조곤한 대화로 채워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렵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의 표지. [사진 이봄]

 만화에는 여성들이 ‘바로 저거야’ 할 만한 대사들이 가득하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으냐는 초등학생 조카의 질문에 노처녀 고모는 “음…, 보장?”이라고 답한다. 전업주부인 엄마는 “그런 거라면, 나는 존재감을 원해” 한다. 30대 싱글 여성 둘이 차를 마시며 나누는 농담. “얼마 전에 기름종이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제는 얼굴에 기름이 끼지 않는다고! 오히려 기름 보급 종이가 필요할 판이야.” 돈도 애인도 없이 흘러가는 자신의 삶을 밤늦게까지 고민하던 수짱은 그냥 잠이나 자기로 한다. “우선 목욕을 하자.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내일은 바로 코앞에 있어!”

 힐링 열풍이라지만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같은 대사에는 더 이상 마음의 요동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지혜를 귓가에 열심히 속삭여준다 해도, 그건 그의 지혜일 뿐 나에게 흡수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메마른 생각이 자꾸 앞선다. 이런 겨울, 나와 비슷한 걱정에 가끔씩 잠을 설치는 친구들을 만화에서 만나게 돼 얼마나 반가운지. “이대로 나이만 먹고,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불안해하다가도, 주말이 오면 또 숲길을 걸으며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아는 여자들. 이런 동지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큼 든든한 위로가 또 있을까.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