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이 뭐길래] 해외시장 개척만이 살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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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대기업들이 영화사업에 활발하게 뛰어들었던 시절, 한국영화 수출을 담당했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 그가 속해 있던 팀에는 '화전민' 혹은 '영화보부상'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다녔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성과는 크지 않았던 자신들의 처지를 빗댄 풍자였다.

그때 필자도 해외 필름마켓에서 쓰일 포스터.예고편 등을 제작한 적이 있다. 영화 한편을 수출하려면 여러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지만, 필자와 '화전민'의 일원인 친구가 마케팅 현장에서 겪은 몇가지 경험을 소개해본다.

해외 세일즈를 위한 각 영화의 기본적인 마케팅 자료는 영문버전의 예고편과 포스터, 리플릿(전단) 등으로 구성된다. 예고편을 만들려면 믹싱단계에서 음악.효과음과 대사를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사운드트랙에서 한국말을 걷어내고 영어로 재녹음을 할 수 있기 때문.

그런데 어떤 영화를 막론하고 한 트랙에 섞여 있어 도저히 분리할 수가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운드의 원판에 해당하는 M&E 테이프(음악과 효과음이 담겨있는 릴 테이프) 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M&E 테이프도 없었다.영화의 녹음이 끝나자마자 그 릴(Reel) 테이프 위에 다음 스케줄이 잡혀있는 영화의 M&E를 덧씌워버려 아예 없어져버린 것이다. 1백분짜리 릴 테이프 하나 값이 1만원을 넘지 않은 시절이었다.

우리야 외화를 자막으로 보지만 외국은 자기네 언어로 더빙하여 관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예고편의 모든 효과음을 걷어낸 채 음악만 가지고 제작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예고편과 함께 해외에 보낼 기본 홍보물인 슬라이드 필름은 어땠을까? 영화 개봉과 함께 여기저기 쓰이다가 비디오 출시사를 거치는 몇 개월 사이에 증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결국 네가필름으로 사진을 인화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네가필름으로 사진을 인화해서 홍보물을 보내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한국영화는 현장 스냅사진을 슬라이드 필름보다 네가필름으로 많이 찍고 있다. 해외수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편의적 발상이다. 한국영화가 진정 해외시장을 겨냥한다면, 이런 부분에까지 제작비를 아껴선 안될 것이다.

어찌됐건, 우여곡절로 준비한 자료들을 가지고 유랑 행상길을 떠난 1997년도 밀라노 필름마켓에서 친구가 겪었던 일은 더욱 비애스럽다.

그가 속해 있던 모기업은 한국 영화계에서는 처음으로 현지에 단독 부스를 설치했다. 10만달러짜리 좌판을 펼쳐놓고 바이어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하루는 부스 앞을 지나던 바이어가 기웃거리며 들어올 생각은 않고 비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예고편만 구경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무슨 영화를 원하냐고 물어봤더니, 부스 앞에 있는 비디오와 TV를 살 수 없겠느냐고 대답했다.

영화보다 모기업의 최신 전자제품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그런 에피소드처럼 세계 속에서 한국영화는 아직도 제3세계 영화인 것이다.

최근엔 '한국영화 해외수출 1천만 달러' 소식도 들려오지만, 과연 축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양적인 포만감에 늘어져 있다가 홍콩이나 일본 영화처럼 쇠퇴기를 맞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현재 우리의 수출 시스템으로 1백년의 시간을 두고 해외 시장을 관리해온 할리우드를 따라간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지금의 한국영화 발전에는 해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팔던 국제 보부상들의 노력들이 숨겨져 있다. 불과 몇년 전 배낭 하나 메고 뛰어다니던 그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필호 <주피터 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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