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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마누라 대박 서세원

중앙일보

입력

“몰래 빚 얻어 썼다고 구박하더니 마무리 비용 3억원은 집 잡혀 대주더군요”

오전부터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급기야 가을비를 뿌려대는 날 압구정동에 있는 ‘서세원 프로덕션’에서 그를 만났다. 나이와는 달리 늘 세련된 옷차림으로 ‘옷 잘 입는 사람’으로 소문난 서세원은 그날 따라 다소 허름해 보이는 점퍼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은 행복에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좋으시겠습니다. 돈벼락 맞은 기분이 어떠세요?”

“하늘을 나는 기분이죠. 애들 말로 기분 째지죠. 근데 이건 꼭 써주세요. 돈벼락을 맞은 건 ‘개인’ 서세원이 아니라 회사예요. 벌어들인 돈은 다음 영화를 위해 재투자되는 거죠. 제가 가져갈 돈은 빌린 돈 갚는 것뿐이죠. 나머지 돈은 다 회사로 들어가요. 개인회사도 아니고 주식회산데 제가 돈 벌었다고 마음대로 쓸 수 있겠어요.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하하.”


돈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다소 부담스러운 듯 엄살이다. 영화 ‘조폭 마누라’가 대박이 터지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장인 자신의 위상이 선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다며 너스레를 떤다.

영화를 만들면서 15년 전 말아먹은(?) ‘납자루떼’와 ‘개그맨’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말발’이 잘 먹히지 않았는데, 만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고집대로 밀어붙인 이번 영화가 대박이 터지면서 그렇게도 갈망했던 칼자루를 쥐게 됐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무척 힘들었어요. 만약 제가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면 무슨 말을 해도 다 먹혔을 텐데 제가 얘기하니까 일단 ‘개그맨이 뭘 알아’ 하는 것처럼 의심부터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일일이 설득을 해야 하고, 부하직원들에게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따라오라’고 윽박지르면서 일을 하려니 힘들었지요.”

그렇게 전쟁하듯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었던 사람들의 외면이었다. 제작비가 모자라 돈을 융통하려면 “개인 서세원에게는 얼마든지 빌려주겠다. 하지만 영화를 하는 데 쓰겠다면 절대로 빌려줄 수 없다”며 거절을 했다. 이번에도 ‘납자루떼’처럼 날릴 게 뻔하다는 거였다.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거기에 비례해서 배신감도 그만큼 컸다.

워낙 신경을 많이 써 머리가 하얗게 센 데다 흥행대박으로 행복에 겨워 보이긴 하지만 얼굴 한쪽 구석에는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영화를 개봉하기 전부터 최근까지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잤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가 좀 바쁜 사람인가. 방송 스케줄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영화까지 만들고 개봉시켰으니 철인인들 배겨내겠는가.

그는 ‘납자루떼’의 실패 이후에도 영화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그가 자랄 때만 해도 유일한 오락거리는 동네에 들어오는 영화였다. 영화를 좇아 극장에 들어서면 컴컴한 그 공간은 그만의 꿈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그 공간에 차곡차곡 자신의 꿈을 채워 넣었다. 어쩌다 ‘개그맨’이 됐지만 애초 어릴 적 꿈은 영화감독이었던 서세원.

‘개그맨’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말발’ 안 섰지만 특유의 고집과 돌파력으로 밀어붙여 일군 대박 신화

기회만 있으면 ‘납자루떼’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그는 책을 읽고 나면 버릇처럼 “이 책 판권 사서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데”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서세원이 여전히 영화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는 아내 서정희.

“지난번에는 ‘상도’를 읽더니 책 판권을 사서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난리를 치더라구요. 늘 그런 식이었어요. 저는 미치죠. 머리맡에도 시나리오를 두고 자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게 그렇게 싫더라구요. 또 사고 칠까봐 불안불안했다니까요.”

이렇게 아내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서세원이 본격적으로 영화를 다시 시작한 건 지난 5월, ‘서세원 프로덕션’을 차리고 투자할 영화를 찾아 나섰을 때부터.

서세원은 주연배우 캐스팅까지 마치고 준비가 다된 상태에서 7개월 동안이나 투자자를 찾지 못하던 ‘조폭 마누라’를 만났다. 함께 제작한 현진영화사의 이순열 대표가 갖고 있던 그 영화는 이미 주연배우까지 캐스팅이 끝났는데도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촬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보니 조금만 다듬으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말렸지만 자신의 안목을 믿고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전까지 투자자를 구하지 못했던 영화이니만큼 서세원이 다른 투자자 없이 전액(34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작을 하다보니 처음 예산과는 달리 제작비가 초과하기 시작했다.

“제작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15년 전이라 제작환경이 많이 바뀌었더라구요. 몇 천만원은 금세 나가는 거예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처럼 한정 없이 돈이 들어가는 것 같았죠. 나중에는 집사람 돈까지 빌려서 제작비를 댔다니까요. 돈 빌리러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잃고 얻었습니다.”

서정희가 남편의 외도(?)를 눈치챈 것은 영화 제작이 시작될 때쯤. 남편의 정신이 어디 가 있는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집안일에 신경 쓰는 건 고사하고 본업인 방송보다 더 열중해서 영화 일을 했다. 한 손에는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는데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도 들쭉날쭉이었다.

무언가 이상했고 평소와 분명히 달랐다. 여자의 직감으로 그렇게 말리던 영화를 다시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 다시 시작했느냐”고 물어보면 손사래를 치며 “다른 사람 도와주느라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다른 사람이 만드는 영화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곤 했다.

“눈치는 챘죠. 근데 끝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어요. 남편의 말대로 다른 사람의 영화이기만을 바랐죠. 그러다 거의 촬영이 끝나갈 무렵에 얘길 하더라구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까 별로 놀라진 않았어요. 어쩌겠어요. 망하지 않도록 기도나 할 수밖에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서정희는 기도를 하러 다니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남편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먹고살 만한데 망하려고 왜 영화를 또 하는 거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남편을 믿어주지 않으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그때부터 본의 아니게(?) 남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머리맡에 시나리오 두고 잠들던 남편의 집념 영화 한다는 남편, 반대만 한 게 마음에 걸려


영화 개봉 전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 손을 잡고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녀야 원래부터 독실한 신자니까 새벽기도 다니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아내만큼 독실한 신자도 아닌 서세원이 새벽기도를 매일같이 다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를 만들다보면 밤샘작업하는 일도 다반사이니 말이다. 그런 날도 서세원은 새벽에 일을 마치고 들어와 아내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만큼 서세원은 이번 영화에 모든 것을 다 바쳤고 또 그만큼 절실했다.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조차 믿어주지 못했을 때 남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정말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요. 가장 가까운 저조차 남편이 하는 일에 반대만 했으니 그 마음이 어땠겠어요. 남편을 믿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죠. 제가 앞장서서 은행 가서 집을 담보로 융자도 해주면서 밀어줬더니 그때부터 힘을 받는 것 같았어요. 새벽기도 다녀오면서 저를 업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남편을 보니 진작 이럴 걸 하는 마음까지 들더라니까요.”

남편을 밀어주기로 마음먹고 영화가 완성될 즈음에는 주변의 아는 이들에게 돈도 융통해서 3억원가량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서정희는 본의 아니게 ‘조폭 마누라’의 최대 투자자가 됐다.

하지만 영화가 막바지로 치닫다보니 집에서 쓸 생활비조차 없었고 추석을 쇨 돈도 없었다. 그녀가 주변에서 돈을 융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추석 쇨 돈이 없으니 어디 가서 돈 좀 빌려오라”고 했더니 서세원이 후배 개그맨에게 빌렸다며 90만원을 갖다줬다.

그 돈으로 간신히 추석을 쇠는 시늉만 했다. 추석 이틀 전에 서세원의 고향으로 벌초를 갔을 때도 인부를 살 돈이 없어 서세원이 직접 제초기를 등에 메고 비를 맞으며 벌초를 하기도 했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으로 벌초를 하는 서세원의 뒷모습이 너무나 서글퍼 보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더욱이 이때는 집까지 팔려고 내놓은 상태였다. 급하게 팔려고 내놓으니 마땅한 작자가 나서지도 않았다. 집만은 반드시 지키려고 했는데 영화가 막판으로 몰리다보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서정희는 남편의 영화가 또 ‘납자루떼’ 짝이 나서 길에 나앉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도원으로 들어가 기도나 드리면서 살 비장한 각오까지 했다.

“남편이 너무나 열심이었어요. 예고편을 만들 때도 집에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와서 저하고 방학 동안 한국에 와 있던 동주, 동천이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번번이 남편이 선택한 안에 손을 들어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남편의 안이 맞아서 대박이 난 거구요.”

아이들은 개봉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인터넷으로 서세원의 인터뷰가 난 기사를 보고 아주 좋아했다. 이런 가족들의 후원이 큰 힘이 됐다는 서세원은 개봉하는 날 아침,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농담 삼아 돈벼락을 맞게 해달라고 하더니 그게 현실이 됐어요. 남편이 돈벼락을 맞은 게 기쁘다기보다는 영화가 잘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잘된 것 같아요. 빌린 돈도 갚을 수 있게 됐고 또 남편이 하고 싶은 걸 하게 됐으니까요.”

개봉 날 아침, 돈벼락 맞게 해달라던 아내의 기도 두번째 영화로 ‘납자루떼’ 흥행참패 극적으로 만회

제작자인 남편의 영화 수발(?)을 하면서 서정희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돈과의 전쟁’이라는 단순한 진리였다. 스태프들과 밥만 먹어도 몇 십만원이 훌쩍 나가는데다 촬영팀이 움직일 때마다 각종 장비료로 목돈이 퍽퍽 깨져 나갔다. 그런데도 서세원은 늘 돈 얼마 안 들었다고 알뜰한 아내를 안심시켰다.

사실 서정희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조폭 마누라’ 같은 폭력적이고 욕설이 난무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편이 만드는 영화가 폭력을 다룬 영화라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이 먼저 제안해 ‘친구’와 ‘신라의 달밤‘을 보러 가기도 했다(‘친구’와 ‘신라의 달밤‘은 올해 가장 히트한 폭력영화이다).

하지만 서정희는 정작 서세원이 만든 ‘조폭 마누라’의 시사회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정희는 스태프들이 다 모여서 보는 현장에 제작자의 아내가 나타나면 남편의 행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영화가 개봉하고 닷새 후 흥행에 힘을 받았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서세원과 함께 봤다. 서세원은 자리가 없어 계단에 앉아서 불쌍한 자세로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왜? 관객이 다 찼으니까.

“여러 번 봤을 텐데도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불편하게 보면서도 재미있어 하더라구요. 자기 자식 같은 영화라서 그런지 몇 번을 봐도 재미있나봐요. 저는 애들 아빠가 계단에 앉아서 보니까 안쓰러웠는데도 본인은 괜찮대요. 관객이 꽉 차서 계단으로 쫓겨난 건데(?) 얼마나 행복하냐는 거예요.”

그런 남편의 얼굴을 보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는 서정희. 남편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돈을 제대로 갖다주지 못하니 생활비를 여기저기서 빌려쓰기도 했다.

남에게 손벌릴 정도로 어렵게 살진 않았는데 막상 그런 일이 닥치니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 때문에 남편의 옷차림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제대로 챙겨줄 여유도 없었다. 서세원 역시 털털한 성격대로 늘 똑같은 점퍼 차림으로 다녔다.

“그랬더니 단박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보더라구요. TV에 보이는 아빠의 모습이 안돼 보인다고 하더군요. 옷차림도 예전과 달리 후줄근하고 머리도 왜 그렇게 하얗게 셌냐고 하데요. 그 소리 듣고는 TV를 아예 보지 않았어요. 생활비가 없다보니 옷도 변변히 사주지도 못하고…, 미안하죠.”

이번 영화의 성공으로 크게 고무된 서세원은 예정했던 감독데뷔가 빨라질 것 같다고 한다. 앞으로도 ‘조폭 마누라’처럼 섭외가 어려운 배우보다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해 기발한 아이디어와 마케팅으로 승부할 생각이라는 서세원.

“앞으로 제가 만들 영화도 이번 영화처럼 ‘기발한 아이디어가 들어 있는 B급 영화로 돈 많이 들인 A급 영화를 따라잡는’ 그런 작품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직 코미디 영화만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심각한 영화를 하면 누가 보기나 하겠어요? 그러니 ‘서세원표’ 영화를 만들 수밖에요.”

자신이 만들 영화에 대해 이미 서너 편의 시나리오가 있다며 자신감을 피력하는 그의 얼굴에는 행복감과 피곤함, 그리고 앞으로의 기대감 등이 뒤섞여 묘한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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