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전 제주의 비극, 선댄스를 사로잡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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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지슬’은 컬러로 찍은 뒤 흑백으로 변환한 흑백영화다. 오멸 감독은 “화려한 색상 속에 가려진 슬픔의 색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오멸(42) 감독의 ‘지슬’이 미국 유타주에서 27일 폐막한 제2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로 꼽히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대상을 수상하기는 처음이다. 그간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 등이 극영화 경쟁부문에 진출했지만 상을 받지 못했고, 다큐멘터리 부문에서는 2004년 김동원 감독이 ‘송환’으로 ‘표현의 자유상’을 받았다. 선댄스영화제는 스티븐 소더버그·코언 형제·퀜틴 타란티노 등 스타 감독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비츠 오브 더 서던 와일드’로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벤 제틀린은 2월 열릴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제주도 출신인 오멸 감독은 ‘뽕똘’(2009) ‘어이그 저 귓것’(2009) 등 제주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지슬’의 이번 수상은 한국 독립영화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칸·베니스·베를린영화제의 잇단 낭보에 이어 미국 독립영화의 심장부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충무로 주류 영화에 이어 지역 비주류영화의 약진인 셈이다.

오멸 감독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 영화는 1948년 11월 미국의 소개령이 내려진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해안선 5㎞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한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피난길에 오른다. 대체 무슨 일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산 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 이들은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따뜻한 감자를 나눠 먹으며 집에 두고 온 돼지 걱정, 장가 갈 걱정 등을 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중앙일보 23일자 21면 참조)

 오 감독은 2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제주 4·3 사건은 한국사이자 세계사다. 외국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번 수상이 그런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다. 나처럼 지역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제주도민 3만여 명이 이유도 모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65년 전의 비극을 흑백화면에 담았다. 한 편의 제사를 보는 것처럼 제의(祭儀) 형식으로 연출했다. 동양화를 떠올리게 하는 빼어난 장면, 비극적 상황에서도 빛나는 해학 등이 현지에서 극찬을 받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시민평론가상·넷팩상·CGV무비꼴라쥬상을 휩쓸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그간 유럽에서 한국영화가 꾸준히 인정받아왔지만 미주 지역에서는 그 힘이 약했다. 지난해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슬’은 역사적 비극을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지슬’은 3월 1일 제주도에서, 그리고 3월 2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개봉한다. 오 감독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한 이곳의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제주도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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