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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세계 건축양식 집결한 까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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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지의 인휴 목사 가옥. 경사가 심한 맞배지붕이 특징인 일본의 갓쇼즈쿠리 양식을 채용했다. [사진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1900년대 초, 기독교 포교를 위해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들이 말라리아나 세균성 이질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부는 풍토병에 취약한 선교사들을 위해 인적이 드문 지리산 자락에 수양관을 짓기 시작한다.

 특히 해발 1200m에 위치한 지리산 왕시루봉 일대에는 린튼(W A Linton·한국이름 인휴) 선교사와 하퍼(J Harper) 선교사 등이 1960년대 초에 지은 목조주택과 토담집 12채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물자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선교사들은 지리산 인근의 재료를 이용해 고국의 건축양식을 구현해냈다.

 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지가 시민들이 뽑은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됐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공모전 ‘이것만은 꼭 지키자’에서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지를 비롯해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와 강화도 남단갯벌 등의 6곳의 자연·문화유산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들의 자발적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시민운동이다.

 왕시루봉 유적은 세계 여러 국가의 건축양식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다. 세모꼴의 오두막인 사롯데 벨 린튼(Charlotte Bell Linton) 가옥은 1950년대 유행한 북미식 오두막 건축인 에이 프레임(A-Frame) 양식이 도입됐다. 겉모습은 전형적인 미국식 오두막이지만, 내부에는 아궁이와 온돌방을 갖췄다. 툇마루를 통해 부엌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한옥의 공간배치를 적극 끌어들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의학을 전공한 배도선(Peter R M Pattison) 선교사의 집은 억새로 지붕을 잇는 영국의 새치하우스(Thatch House) 양식이다. 지리산 억새들 이용해 지붕을 잇고 인근 목재를 껍질만 벗겨 건축 재료로 이용했다. 초록 지붕의 인휴 목사 가옥은 일본의 눈이 많은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갓쇼즈쿠리(合掌造り)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도성래(Dr Stan Topple) 선교사 가옥은 비탈진 경사지를 이용하는 노르웨이 산악형 주택의 특징을 반영했다. 당시 지역 목수들이 지었다는 내부골조는 서까래·보·도리 등 한옥 요소도 갖추고 있다.

 윤인석 성균관대 건축학과(한국내셔널트러스트 위원) 교수는 “당시 상황에 맞는 공법과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지어진 집들이다. 한국 근대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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