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따라비오름 입구. 세찬 바람이 벌판을 휘젓고 다니더니 귓전을 매섭게 때렸다. 22일 트레일 러닝(산이나 계곡, 들판 등 비포장길을 달리는 운동) 체험에 나선 기자는 강풍의 기세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한 남성만이 여유를 보였다. 그는 “변화무쌍한 자연도 트레일 러닝에서 느끼는 묘미”라며 웃었다. 극지 마라톤 전문가 안병식(40·사진)씨였다. 그가 이끄는 10여 명의 트레일 러닝 체험단은 3.5㎞를 달리고, 또 올랐다.
안씨는 트레일 러닝의 일종인 극지 마라톤의 1인자다. 한국 최초로 극지 마라톤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2005년 사하라 사막 마라톤을 시작으로 2006년 중국 고비 사막과 칠레 아타카마 사막, 그 이듬해 남극 마라톤까지 섭렵했다. 2008년엔 북위 89~90도, 평균 기온 영하 29도에서 달리는 북극점 마라톤에 도전해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남·북극 마라톤을 완주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히말라야·알프스 산맥, 뉴질랜드 정글 등 세상의 극지는 모두 찾아다닌 기인이다. 그가 지금까지 뛴 극지 마라톤 코스를 더하면 1만여㎞에 이른다.
극지 마라톤은 일주일 동안 250㎞를 달려야 한다. 10㎏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뛰다 텐트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또 뛴다. 지옥 체험 같지만 안씨는 “극지 마라톤은 힐링(치유)을 돕는다. 자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만나 싸우면서 진정한 힐링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 레이스에서 우승하고 싶어 악착같이 뛰었다. 그런데 대회 나흘째 발목을 다쳐 뛸 수가 없었다. 포기하려던 순간 다른 선수들이 도왔다. 내가 뒤처진다 싶으면 같이 쉬고, 나를 붙잡고 함께 출발했다”면서 “그중 한 명은 두 달 전 고비 사막 대회에서 내게 아깝게 1위 자리를 내준 선수였다. 결국 나를 포함한 5명이 모두 손을 잡고 결승선을 통과했다”고 회상했다. 안씨는 “그때 눈물이 쏟아졌다.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극지 마라톤으로부터 그는 남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경쟁, 남과의 협력을 배웠다.
미술학도였던 안씨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빠져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5㎞부터 시작해 10㎞, 20㎞를 달렸고 철인3종경기에도 도전했다. 계속 뛰다 보니 사막 마라톤에 이르게 됐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안정된 생활도 갖지 못했다. 남들과 다르게 살고 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안씨는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한반도를 종단하고 싶다. 거기까지 성공하면 실크로드, 고비 사막을 지나 유럽대륙까지 횡단하고 싶다. 한 1년이면 되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서귀포=손애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