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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감독 "안봐줘도 괜찮다 내식 대로 만든다"

중앙일보

입력

대만은 한 해에 자국 영화가 열 편도 만들어지지 않을 정도로 영화 산업이 취약하다. 그런데도 세계 영화계에서 명망을 획득한 명감독을 몇 배출해 현재 영화적으로는 가장 주목받는 국가 중 하나다.

'애정만세'의 차이밍량(蔡明亮.44) , '와호장룡'의 리안(李安.47) , '하나 그리고 둘'의 양더창(楊德昌.54) 등의 이름앞에 허우샤오셴(候孝賢.54) 이 놓인다. 1989년 '비정성시(悲情城市) '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허우샤오셴 감독은 영화적 형식과 내용에 있어 독창적인 길을 걷고 있다.

청각장애인 역을 한 량초오웨이(梁朝偉) 의 연기가 인상 깊었던 '비정성시'는 한 가족의 해체 과정을 통해 40여년간 감춰졌던 대만 역사의 치욕적인 부분을 드러내 현대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을 받았다.

치욕적 역사란 마오쩌뚱(毛澤東) 의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蔣介石) 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 온 뒤, 1947년2월28일 대만 원주민들의 독립운동을 유혈진압한 사건(2.28사건) 을 가리킨다.

이후 인형극 연희자 리텐루(李天祿) 의 삶을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결합을 통해 그린 '희몽인생(戱夢人生.93년) ',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을 취한 '호남호녀(好男好女.95년) ', 감독 자신의 청년시절 체험이 담긴 '재견남국(南國在見, 南國.96년) ', 19세기 상하이를 무대로 한 '해상화(海上花.98년년) ' 등 하나같이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운명과 삶에 관심을 쏟았다.

그가 신작 '밀레니엄 맘보'를 들고 올해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밀레니엄 맘보'는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크게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과거엔 카메라를 멀리 두고서 대상을 관조하는 식이었으나 이번엔 렌즈를 대상에 근접시키고 비트 강한 음악으로 현란한 모양새를 보인다.

이에 대해 그는 "이때까지의 내 작품은 시대배경이 과거였다. 과거를 그리려면 멀리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방식이 적당했다. 그러나 이번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타이페이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고민과 방황을 담으려다 보니 그들이 듣는 음악, 그들이 추는 춤, 그들이 먹는 환각제를 영화적으로 표현해야했다"고 말했다. 그는 '밀레니엄 맘보'가 앞으로 10년간 찍게 될 3부작의 서작(序作) 에 해당한다면서 일본 감독 오즈야스지로(大津安二郞) 의 '동경이야기'처럼 당대 사회의 풍속화가 되기를 희망했다.

다음은 그가 털어놓은 '나의 인생, 나의 영화'.

"내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어려서부터 무리를 지어다니며 주먹질을 하곤 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아 고등학교도 못 마쳤고 물론 대학 문턱에도 못 갔다. 스물 한 살 때 군대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다. 주먹 세계에 계속 있어봤자 아무리 해도 두목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가 될 수 있는 다른 분야를 찾기로 했고 그게 영화였다.

영화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건 70년대말 양덕창 감독같은 해외유학파를 만나면서였다. 그전엔 영화란 스토리(시나리오) 만 있으면 그냥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관점과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거다.

해외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대만에서 내 영화를 보는 관객은 3만, 4만 정도다. 그래서 대만에서 투자받기가 점점 힘들다. 주로 프랑스와 일본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관객이 줄어드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사색이 깊어지면서 내 영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기때문에 관객들이 따라잡기가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관객의 수준이나 재미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 창작하는 사람은 관객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 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창작의 본래 의도를 배신할 수 밖에 없다.

창작의 역량은 관객을 버릴 때 시작된다. 관객과의 소통 운운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작품이 정직하다면 언젠가 관객은 따라온다. 투자처를 못 찾으면 디지털비디오 카메라로 찍으면 되니까 걱정 안한다. 두려운 게 있다면 창의력이 고갈되지 않을까, 체력이 버텨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거다. 그러나 스페인의 루이스 브뉘엘 감독은 46세부터 77세까지 약 30편을 만들지 않았나. 이를 모범삼아 열정적으로 작업을 계속 해 나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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