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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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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①법원공무원 노조가 공직 후보자에 대한 제보를 접수하고 설문 조사를 벌인다. ②공직 후보자의 평판 자체가 검증 대상이 된다. ③식비 지출부터 법복 입는 습관까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까발려진다. ④법률가 509명이 반대 선언을 발표한다.

 일찍이 이런 인사청문회는 없었다. 이동흡(이하 경칭 생략)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얘기다. 이동흡을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가 헌재 소장으로 적격인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30가지가 넘는 의혹들은 그가 고위공직자로서 자기 관리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나이(27세)에 판사가 된 뒤 주변과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결국 이동흡을 곤경에 놓이게 한 건 그 자신의 특권의식이었다. 하지만 검증의 양상을 보면 도를 넘어선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용이 아니라 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의 노조가 특정인을 겨냥해 제보 수집·설문 조사까지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청문회에서 “헌법연구관 70여 명이 다 후보자가 소장 되는 걸 반대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정상인가. 인기도를 잣대로 삼는다면 조직을 개혁하겠다는 사람은 리더가 되기 어렵다. 구속된 조직폭력배를 변호사 로비로 석방했다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의혹까지 튀어나온다. 검증에 감정이 실리면 인신공격, ‘이지메(집단 괴롭힘)’가 되기 쉽다. 이번 청문회로 한 야당 의원은 트위터에서 ‘영혼탈곡기’로 불리고 있지만 영혼은 탈곡의 대상이 아니다.

 이동흡 청문회의 파장은 오래갈 것이다. 당장 검찰총장 후보자로 거론되던 이들부터 고개를 젓는다. “죽을 자리에 나갈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총장으로 검찰 개혁의 진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청문회 공포’도 작지 않은 듯하다. 한 변호사는 “앞으로 공직을 맡으려면 대통령후보급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인사검증 양상이 과거와 달라진 배경은 뭘까. 이동흡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명박 대통령·박근혜 당선인의 패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지난해 12월 19일 대선의 대결 구도가 어른거린다. 한 정치권 인사의 지적이다.

 “대선이 끝난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들 운명이 갈렸지만 선거의 흥분과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지역, 세대, 계층으로 두 동강이 난 민심이 제대로 봉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만 봐도 문재인 후보에게 표를 던졌던 48%의 허탈감이 배회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부정개표 의혹이다. 일부 시민들은 재검표(수개표)를 주장하며 촛불을 들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잇단 자살과 함께 노동운동 진영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용암이 약한 지반을 찾아 차가운 땅 아래를 흘러 다니는 형국이다.

 선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48%의 박탈감을 껴안고 선거를 마무리 지을 책임은 승자인 박 당선인에게 있다. 그런데 첫 단추인 인수위 인선 발표에서 박 당선인이 내민 것은 ‘밀봉한 봉투’였다. 뒤이어 “당선인은 나불거리는 촉새를 싫어한다” “당선인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는 말이 나오면서 인수위원도, 여당 정치인도, 공무원도 기자들을 피하고 있다. 오직 당선인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다.

 여당이 이럴진대 야권이 갖는 압박감과 위기의식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선 실력 과시에 나서야 한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상생의 새 정치가 아닌, 대결의 구태 정치로 유턴하게 된다. 박 당선인이 다짐한 ‘100% 대한민국’과 ‘국민 행복 시대’도 대통령의 소통 노력과 국회의 협력 없이 이뤄낼 수 없다. 촉새들이 나불거려야 정치가 돌아가고, 대통령이 불편해야 국정이 편안하다.

 이동흡은 예고일 뿐이다. 철저한 사전 검증이 필요하다. 다만 박 당선인도 ‘밀봉 리더십’에서 벗어나 선거 전날(12월 18일)의 인간 박근혜로 돌아와야 한다. “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 여러분께 남은 정치 인생을 바치겠다”고 호소하던 그날 밤 그 절박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