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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 모닥불에선 빙어가 익어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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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륜 구동 오토바이에 매단 썰매가 꽁꽁 언 파로호 위를 굉음을 내며 달린다.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 북쪽, 평화의 댐 바로 아래 지역에 비수구미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뒤로는 해발 1140m의 해산령이, 앞으로는 파로호가 가로막고 있는 오지 중의 오지다. 마을로 들려면 6㎞ 계곡길을 걸어서 내려가거나, 배를 타고 파로호를 건너야 한다. 이 오지마을에도 겨울이 왔다. 마을로 이어지는 계곡길은 눈이 수북이 쌓였고, 마을을 가로막은 파로호는 꽝꽝 얼어붙었다. 비수구미 마을은 문자 그대로 얼음과 눈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외부와 격리된 이 두메산골에는 아스라이 잊혀져 가던 우리네의 겨울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비료 포대를 타고 눈밭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얼음 천지가 된 호수 위에서 해가 지도록 썰매를 지치는 순수의 겨울 풍경이 비수구미 마을에는 그대로 있었다. 이 외진 산골의 겨울은, 사람들이 일부러 조성한 스키장이나 눈썰매장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날것의 겨울이었다. 눈길 헤쳐가며 비수구미 마을을 찾아 들어간 까닭이다.

글=손민호·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1 신나는 눈싸움. 2 비수구미 민박집의 개. 3 김영순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장을 뜨고 있다.

비료 포대 타고 내려가는 눈길

비수구미 마을은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화천 읍내에서 460번 지방도로를 타고 평화의 댐 방향으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30분쯤 오르니 해산터널이 나왔다. 1987년 평화의 댐을 건설하면서 뚫은 2㎞ 길이의 터널로,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로 통했던 명소다. 해산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오른쪽에 비수구미 마을 이정표가 보였다. 여기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6㎞를 걸어서 내려가야 파로호를 접하고 있는 비수구미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

  비수구미 마을의 행정구역은 화천군 화천읍 동촌 2리다. 동촌2리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이 30리(약 11km)에 달하는 큰 동네다. 동촌2리에 있는 마을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계곡에 비수구미 마을이 박혀 있다. 비수구미 마을에서 파로호 물길 따라 5㎞만 올라가면 평화의 댐이 나온다. 파로호가 얼지 않았을 때 비수구미 주민들은 배를 타고 평화의 댐 아래로 이동해 미리 세워둔 자동차로 갈아타고 화천 읍내로 나갔다 들어온다.

  비수구미 마을로 향하는 6km 계곡길은 순백의 눈밭이었다. 눈은 내리고 또 내려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다. 쌓인 눈은 60cm가 훨씬 넘어 보였다. 눈이 길도, 계곡도 삼켜버려 길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개와 고개 사이로 구불구불한 계곡길이, 아니 눈밭이 이어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었다.

  내리막 경사가 나타났다. 미리 준비해 온 비료 포대를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몸을 최대한 뒤로 젖히고 양다리를 들어 썰매를 탔다. 썰매가 자연스레 멈출 때까지 몸을 맡겼다. 속도가 붙자 눈이 날려 얼굴에 튀었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속도가 너무 빨라 중심 잡기도 어려웠다. 좌우로 기우뚱거리다가 결국 눈밭에 뒹굴었다. 눈을 뒤집어 썼지만 연방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순진무구한 눈길, 걸음을 내딛는 곳이 곧 길이 됐다. 행여나 넘어질까봐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걸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만 귀를 울리다가 문득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계곡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물소리를 들었다. 얼음 언 계곡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두꺼운 얼음 벽에 한번 부딪쳐 밖으로 퍼져 나왔다. 고요한 새벽 선사에 울려퍼지는 범종 소리처럼 물소리는 은은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걸었을까. 비수구미 마을에 도착했다. 눈 덮인 파로호가 눈앞에 펼쳐졌다.

빙어낚시를 하는 김영순 할머니.

얼음 놀이터가 된 파로호

비수구미 마을에는 모두 네 가구가 살고 있다. 이 중에서 장윤일(69)·김영순(63)씨 부부가 민박을 친다. 마을 표지판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집이다. 지난 76년부터 내외는 여기에서 텃밭을 일궈 농사짓고 약초를 캐며, 가끔 붕어 낚시꾼이 들어오면 밥 해주며 살고 있다. 지금은 큰아들 복동(45)씨와 함께 민박은 물론이고 빙어 낚시, 얼음 썰매 등 비수구미 마을의 겨울 놀이를 책임지고 있다.

  마을에 내려오자마자 썰매를 타러 나갔다. 사실 한겨울을 기다려 비수구미 마을을 찾아온 건 얼음 썰매를 타기 위해서였다. 기껏 썰매 타려고 이 오지까지 찾아왔느냐고? 그렇다. 정말 썰매를 타려고 여기까지 왔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week&은 파로호가 얼기만을 기다렸다. 파로호가 꽝꽝 얼면 이 광활한 호수가 얼음밭으로 변하고, 이 얼음 천지 위로 4륜 구동 오토바이가 끄는 얼음썰매가 달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 추위는 워낙 야무진 데다 일찍 찾아와 지난겨울보다 한 달 이상 일찍 파로호가 얼어붙었다. 장복동씨가 파로호가 얼었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화천으로 달려갔다. 비수구미 마을에 들어간 지난 6일, 이곳의 기온은 영하 22도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달렸다. 내리막길로 내려가자 운동장처럼 널따란 평지가 이어졌다. 얼어붙은 파로호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꽁꽁 언 파로호를 질러갔다. 발로 눈을 걷어냈더니 시커먼 얼음 표면이 보였다. 파로호 복판에 나가 썰매를 탔다. 장씨가 직접 만든 썰매로,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간다. 알루미늄 파이프로 틀을 잡고 널빤지를 얹은 위에 의자 6개를 고정시키니 생각보다 튼튼했다. 오토바이에 매달린 썰매는 신나게 얼음 위를 질주했다. 아무도 없는 이 넓은 호수에 썰매 하나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테마파크에서 타는 롤러코스터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파로호 한가운데서 빙어 낚시도 해봤다. 끌로 얼음판을 열댓 번 내리치니 구멍이 뚫렸다. 낚싯대에 구더기를 매달고 물에 담갔다. 어른 검지손가락만 한 빙어가 줄줄이 올라왔다. 얼음 낚시는 추위와의 싸움이라지만, 빙어 잡는 재미에 추운 줄도 몰랐다. 얼음 위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빙어를 구워서 먹었다. 꽝꽝 언 호수 위에서 구워먹는 빙어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다.

●여행정보=춘천고속도로 춘천나들목으로 나와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 간척네거리에서 화천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양구 방향으로 가는 460번 지방도로를 약 30km 달리면 해산터널에 도착한다. 지방도로는 제설이 안 돼 있는 구간이 있으니 스노체인을 가져가야 한다. 해산령 휴게소에 차를 대고 비수구미 마을까지 6km를 걸어서 내려간다.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꼬부라진 길이다. 내리막길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아이젠과 스패츠(종아리에 차는 토시)를 꼭 준비해야 한다. 자연 눈썰매를 기대한다면, 비료 포대도 챙기길 권한다.

  장윤일씨네 민박 요금은 1박에 3만원. 인원수 제한은 없으나 보통 방 하나에 4~5명이 잘 수 있다. 시골집에 붙은 민박집이어서 시설은 볼품없다. 식사는 끼니당 1인 1만원. 김영순씨가 차려낸 시골 밥상 맛이 기가 막히다. 4륜 구동 오토바이에 매달리는 얼음 썰매 체험은 한 번 타는 데 2만원이다. 6명까지 탈 수 있다. 파로호가 꽝꽝 얼었을 때만 탈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하자. 빙어 낚시는 공짜다. 낚시 장비도 빌려준다. 033-442-0145. 에코힐링투어(ecohealingtour.com)가 매주 주말 당일 여정으로 비수구미 마을로 겨울 여행을 떠난다. 얼음 썰매, 비료 포대 썰매, 빙어 낚시 체험 등이 포함돼 있다. 1인 4만5000원. 02-2203-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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