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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박근혜 외교’에 바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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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청일전쟁은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하구의 서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중국(淸)의 북양함대를 섬멸함으로써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굴복하여 이미 빈사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 최후의 왕조 붕괴와 함께 아시아의 질서는 중국 중심(Pax Sinica)에서 일본의 주도로 넘어갔다.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19세기 말 구(歐)·미(美)·일(日) 제국주의에 빼앗긴 동양의 맹주 자리를 되찾으려고 오늘의 패권국가인 미국에 거칠게 도전한다. 그 하나가 동·남중국해에서 일본, 베트남, 필리핀과의 영토분쟁이다. 미국 상대로는 인공위성을 파괴하고 항공모함을 공격하는 대함탄도미사일 실험을 하고 스텔스전투기 개발에 착수했다. 미군의 중추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도 주저하지 않는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넘어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전략탄도미사일을 실을 잠수함도 개발했다.

 중국의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2011년 11월 발표한 것이 공·해 전투(Air-Sea Battle)이라는 신전략이다. 그것은 사실상 미·중 안보 관계의 신시대 개막을 알리는 것이다. 2011년 초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이미 “미·중 G2는 없다”는 말로 대중국 정책의 강경 선회를 예고했다. 그 연장선에서 2011년 10월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선회(Pivot to Asia) 선언이 나왔다. 미국의 신전략에는 중국의 대함미사일 파괴를 위한 해·공군 공동작전, 군용 인공위성의 성능강화, 중국 해군함정에 대한 사이버 공격능력 개발, 해·공·해병대에 의한 중국 영내 거점 공격, 신예 유·무인 장거리 폭격기 개발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미국은 센카쿠 열도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견제할 의지를 확인하면서 동남아국가들과 다층적인 안보협력망을 구축한다. 미국의 이런 안보수요로 지난 5년간 한·미 동맹관계는 ‘최상’을 누린 반면 한·중 관계는 자주 불협화음을 냈다.

 중국은 평화굴기의 가면을 벗고 미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중화질서로 되돌리려고 군사·외교 양면에서 도전을 한다. 상대를 거칠게 압박하는 돌돌핍인( 逼人)이 중국의 새로운 전략 프레임이다. 스트롱 차이나의 추구다. 긴장의 파고가 높은 태평양 쪽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면 북한문제 해결의 전망은 어두워 보인다. 미·일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가 충돌하면 한국과 일본을 배후에서 압박하는 북한의 전략적인 가치는 올라간다. 중국은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해도 국제사회의 제재 동참을 주저하고 다자 틀의 협상에서 북한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가 어려진다.

 한·일, 중·일 간 갈등으로 일본 보수우익 세력이 민족주의로 결집한 데 힘입어 재집권에 성공한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리는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과 아시아·태평양 전략 강화에 발 빠르게 호응하고 있다. 아베는 취임 후 첫 해외방문으로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로 가서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포위망 구축을 적극 지원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새 정부에 안보협력체제의 구축을 서두르라고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 포위망 참여를 사양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가 압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도 북한 요소를 고려하면 한·중 간의 전략적인 협력 없이 한국의 총체적인 안보체제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한·미, 한·중 관계에서 우리가 숨 쉴 공간은 남북관계의 개선에서 찾을 수 있다. 남북관계가 풀려야 미국과 중국에 대해 국가이익에 바탕을 둔 자주외교를 펼 여지가 생긴다. 경제재건이 급한 김정은의 북한, 새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에 협상파를 지명한 오바마의 미국,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후퇴시킨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이명박 정부와 다른 대북정책을 펴야 하는 박근혜의 한국의 이해가 만나면 북한을 의미 있는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낙관론이 희망사항만은 아닐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고사상태에 빠진 대북 정보라인의 복원과 백지상태인 대북 파이프라인의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취임 후 적어도 6개월 안에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개성공단 정상화에 과단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조선의 운명을 결판내는 청일, 러일 전쟁에서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관전만 하다 전쟁의 결과로 등장한 새 질서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미·중 패권경쟁은 아시아시대 새 질서 태동을 위한 진통이다. 오늘의 한국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중견국가다. 지정학적으로도 미·중·일·러 4강의 심장부에 위치해 국가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박근혜 정부는 오늘의 아시아·동북아가 요구하는 치열하고 균형 잡힌 전략외교를 펼 외교라인의 사람과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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