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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오 중국] 중국의 베니스상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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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4백㎞에 달하는 타이싱(太行)산맥은 서북쪽에서 힘차게 달려드는 황토고원과 중국에서 가장 넓다는 화베이(華北)평원이 갈라지는 곳이다. 험준한 이 타이싱 산맥을 중심으로 산 서쪽은 산시(山西)성, 동쪽은 산둥(山東)성으로 나뉜다.

중국 문화 발전사에서 산시성이 차지하는 바는 매우 크다. 우선 선사(先史)시기의 전설쯤으로 여겨져 왔지만 고고학적 성과들로 인해 차츰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요(堯).순(舜).우(禹) 세 황제의 근거지가 모두 산시성에 있다.

한편으로는 흉노(匈奴)와 돌궐(突厥) 등 북쪽의 유목민족이 중원(中原)으로 침입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산시대학 부총장을 역임한 리단추(李旦初)교수는 "산시는 요.순.우 시대 이후에도 북방지역의 선진문화가 지속적으로 들어섰던 곳"이라며 "중국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산시성은 최초의 '개발구'로,고대 중국의 역사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지역"이라고 소개했다.

산시성을 약칭할 때는 '진(晋)'이라는 글자를 쓴다. 춘추시대 중국을 주름잡았던 진(晋)왕조의 발흥지가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이후인 전국시기에도 진에서 갈라져 나간 한(韓).조(趙).위(魏)의 활동이 제법 활발했는데, 이들 3국을 상징해 산시성은 '삼진(三晋)'이라고도 불린다.

산시성의 문화는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유목민족과 때론 이에 항거하고, 때론 이들을 받아들였던 중원의 농경문화가 겹쳐 발달했다. 특히 북방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생겨난 한(漢)족의 이민문화는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훙둥의 큰 홰나무(洪洞大槐樹)'는 오늘날 중국의 남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산시성 출신 이민자 후예들에게 고향을 상징하는 말이다.

훙둥은 산시 서남쪽의 지역 명칭. 이곳의 큰 홰나무 밑에서 살던 산시성 사람들은 양쯔(揚子)강 이남으로까지 전란을 피해 남하했고, 그 후예들은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홰나무 밑'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李교수는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산시성 이민자의 후예들은 전 중국 11개 성,2백27개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명(明)대 초기 약 50년 동안 진행된 이민행렬에서는 약 1백만명의 인구가 빠져나간 것으로 조사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산시성에는 이렇듯 북방 이족의 침입과 그에 따른 이민이 잦았다.

흉노와 돌궐 외에도 선비(鮮卑), 거란.위구르.여진.몽골족 등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점차 한족들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한족들은 이들에게 밀려 거주지를 내주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중국 내 최대 이민 수출지역이란 말이 나오듯이 산시성은 외족의 침입으로 생활 자체가 편치 않았던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는 일찍이 도덕과 윤리, 충(忠)과 효(孝) 등의 유가적 관념보다 법(法)과 권세(權勢), 그리고 술수(術數)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산둥이 공자와 맹자를 배출한 유교의 발흥지였다면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서 발전한 산시성은 상앙(商 □)과 신불해(申不害).신도(愼到) 등 법과 술수.권세를 중시한 학자.정치가들을 배출한 지역이다.이들 세 사람이 제창한 법(法).술(術).세(勢)의 나라를 다스리는 세 가지 방법은 나중에 한(韓)나라 출신 한비자(韓非子)에 의해 종합돼 중국 사상사에 큰 발자욱을 남긴 '법가(法家)'로 나타난다.

중국 사상사의 대가인 허우와이루(侯外廬)는 그의 저작에서 "유가와 묵가는 노(魯:지금의 산둥)나라가 중심이고… 도가(道家)는 발달이 늦은 초(楚) 등지에서 기원했다.… 법가는 대부분 삼진(三晋)에서 발원했다"고 적고 있다.

산시성 작가협회 장스산(張石山)부주석은 "유가가 국가경략의 방법을 도덕적인 데서 찾은 반면 법가는 권력과 법치, 술수라는 보다 현실적인 여건을 갖추는 데 무게를 뒀다"며 "이는 당시 산시성의 각박했던 자연.인문적인 환경을 어느 정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쪽으로 인접한 산시(陝西)성 사람들은 산시인들을 '주마오주(九毛九:구전에서 구푼까지 따진다)'라고 부른다. 같은 황토고원을 끼고 있는 이웃이지만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그만큼 더 현실적이며 상업적이라는 얘기다.

산시성의 상업적인 전통은 명.청대에 이르러 안후이(安徽)의 상인들(徽商.10월 17일자 13면)과 함께 중국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진상(晋商:산시 상인)'의 발흥으로 나타난다.

작가협회 張부주석은 "요.순.우 임금 등 중국 고대의 문명이 산시에서 발흥했던 것은 지역 남부 윈청(運城)에 있는 거대한 소금연못(鹽池) 때문"이라며 "인류의 생활에 필요한 소금을 확보한 데다 외부의 침략이 잦은 환경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이 상업에 눈을 떴고 급기야 명.청대의 산시 상인그룹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산시성 성도(省都)인 타이위안(太原)으로부터 서남쪽으로 1백50여㎞쯤 떨어진 핑야오(平遙).이곳에는 높이 12m에 둘레가 6.4㎞인 명대의 성곽이 있다.

성곽 안쪽에는 청대에 문을 열었던 표호(票號:일명 錢莊이라고도 하며 요즘 은행업무를 수행하는 중국의 옛 금융기관)와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국제상회, 현금과 여객 운송업체인 표국(□局)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당시 산시상인들은 소금 전매업 등에 간여했지만 이들의 저력은 중국의 금융을 장악하는 데서 더욱 크게 발휘됐다.

이렇게 번성했던 산시의 상인들은 중국 상업의 으뜸이었고 서양인들에 의해 '중국의 베니스 상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산시상인들이 남긴 흔적의 총화는 핑야오 인근의 치셴(祁縣)에 간직돼 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중국영화 '홍등(紅燈)'의 무대로 잘 알려진 교가대원(喬家大院)이 있다.

청대 2백50여년 동안 절대적인 부를 누렸던 교(喬)씨 가족이 대대로 거주한 집이다. 전체 3백13칸의 대저택으로 성채가 둘러싼 듯한 이 건축물 안에서는 진상(晋商)의 성쇠가 함께 느껴진다.

정부투자기관에서 일을 한다는 장(張)모씨는 진상의 몰락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산시상인들의 금융업은 청대 말엽과 민국(民國)초기에 들어온 현대적인 은행시스템에 완전히 무너졌다. 교가대원의 가옥처럼 완고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금융체계의 폐쇄성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kjyoo@joongang.co.kr>

*** 산시성 특산술'펀주'

중국의 술은 대부분 백주(白酒:배갈)가 주종이다. 저장(浙江)성 사오싱주(紹興酒) 등 빛깔이 있는 황주(黃酒)종류도 있지만 요즘은 백주가 전 중국과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산시(山西)성의 특산인 펀주(汾酒)는 백주 계통에서는 가장 오래된 명주에 해당한다.

향이 맑고 깨끗한 게 특징이다. 백주 계통의 명주는 이밖에 구이저우(貴州)성의 마오타이(茅台), 쓰촨(四川)성의 우량예(五糧液).젠난춘(劍南春), 안후이(安徽)성의 구징궁(古井貢), 산시(陝西)성의 시펑(西鳳)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마오타이의 향기는 장냄새를 풍긴다 해서 '장향(醬香)'이라고 하는데, 술잔을 비우고서도 향기가 지속될 정도록 향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산시성 펀주는 정식 기록에 나타난 기간만 1천5백년이 넘는 명주다. 당(唐)대 유명 시인 두목(杜牧)의 "주막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목동이 멀리 행화촌을 가리키더라(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는 시구에 나오는 행화촌이 바로 펀주의 명산지였다.

중국의 백주는 술이 깰 때 머리가 아프지 않은 게 큰 장점이다. 술을 만들면서 깰 때를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래도 도수가 워낙 높아 술자리에서는 조심하는 게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할 때는 '문경(文敬)'이라고 하고 손님이 이에 답할 때를 '회경(回敬)'이라고 한다.

둘을 통틀어 '경주(敬酒)'라고 한다. 어쨌든 술을 권하는 형식이 매우 발달해 있다. 한국인의 경우 이를 그대로 따르다가 크게 취해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 술을 대신 마셔주는 '대음(代飮:우리식으로는 술상무다)'이 통용되므로 이를 이용하는 게 좋다.

도움말 임승권 금호고속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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