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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미래] 세계 최초의 측우기 중국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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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1770년 조선서 만든 最古 측우기 받침돌 중국연호 빌미로 왜곡
1세기 고구려의 별자리 천문도 중국황제 하사품으로 알려져
기원전 1세기 오로라 관측기록 '이웃나라 기록 베낀 것' 무시

조선 태조 4년(1395) 때 만들어진 국보 2백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높이 2m10㎝, 폭1m20㎝의 검은 돌에 1천4백64개 별의 위치를 정확히 새겨 넣은 천문도다.

여기에는 천문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글도 새겨져 있다.'고구려의 석각 천문도를 바탕으로 중심 부분은 조선 초 별의 위치에 맞게 고쳐 새겼다'는 것이다. 지구는 자전축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 시대에 따라 별의 위치도 달라진다.

그래서 '조선을 개국한 때에 고구려의 천문도를 보니 실제 별의 위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를 고쳤다'는 게 비문에 새겨진 내용의 속 뜻이다.

서울대 박창범(천문학과) 교수는 "시대와 위도에 따른 별의 위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중심 부분은 조선 초 위도 38도 부근(서울 지역)에서 관측한 모습과 같았고, 바깥 부분은 서기 1세기께 위도 40도 지역에서 보이는 별들의 위치와 일치했다"고 말했다.

서기 1세기 께 위도 40도라면 고구려가 활동했던 곳과 일치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가 사실임이 확인된 것이다.

이처럼 옛 고구려의 영토에서 봤던 별자리를 새긴, 고구려의 천문도가 확실한 데도 국제학계에는 '고구려의 천문도'가 아니라 '중국 당나라의 하사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시대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미국의 선교사이자 천문학자 칼 루퍼스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소개하는 국제 논문을 발표하면서 원본 천문도가 당의 것일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박창범 교수는 "이 때문에 중국의 과학사 서적 등에는 단정적으로 '중국 황제의 하사품'이라고 나와있다"고 말했다.

우리 과학사가 국제 학계에서 왜곡되고 있다. 뛰어난 발명품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관측 기록들이, 단지 중국에서 받은 것이거나 다른 나라의 기록을 베낀 데 불과하다고 무시 당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학자들은 2003년을 '과학사 바로 세우기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과학사를 체계적으로 검증한 뒤 이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당장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세종대왕 때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측우기 역시 국제적으로는 중국 것으로 둔갑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측우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70년에 만들어졌다.

이것의 돌 받침에 '건륭(乾隆) 경인(庚寅)5월에 만들었다'고 중국 연호가 있는 것이 오해의 발단이다. 조선에서 중국의 연호를 따라 썼다는 것을 국제 학계는 모르고 있어 중국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어대 박성래(사학과) 교수는 "측우기는 1910년 당시 우리나라 기상대장이었던 와다 이유지(和田雄治)가 국제 학술지에 처음 소개했다"며 "이 때 실린 사진에서 '건륭'이란 연호를 보고 중국이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우리는 여지껏 측우기가 우리의 독창적인 과학문화 유산임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목판인쇄술도 '중국 것'이라는 주장이 국제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1960년대 말 불국사 석가탑에서 8세기 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37호)이 발견됐다. 목판 인쇄물로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다. 금속활자 뿐 아니라 목판 인쇄에 있어서도 우리가 가장 앞섰음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학자들이 다라니경에 7세기 말 당나라 측천무후 때만 사용하던 특이한 한자가 있음을 들어 이 인쇄물 역시 중국의 것이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박성래 교수는 "삼국사기에 '서기 6백95년 역법을 측천무후의 것으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신라의 인쇄물이면서도 측천무후의 한자를 썼을 공산이 크다"며 "인쇄된 종이를 분석하면 당의 것인지,신라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으나 아직 연구된 바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오로라 관측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많고 자세하다. 기원전 1세기인 고구려 동명왕 때부터 18세기 중반까지 7백여개의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도 세계적으로는 일본의 오로라 기록은 7세기에 시작된 반면, 우리는 10세기 말에야 기록됐다고 알려져 있다. 10세기 전의 우리 기록은 이웃 나라의 문헌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오로라 기록은 약 3백개이고 일본은 50개에 불과하다. 두 나라를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7백개의 기록을 가진 우리가 그들의 것을 옮겼을 리는 만무하다.

이처럼 우리 과학사가 국제 학계에서 왜곡.홀대받고 있는데도 옛 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나 이웃 나라와의 사료 비교 등을 통해 과학사를 바로세우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제적으로 우리의 과학사를 바르게 알리려는 시도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내 학계조차 우리의 과학적 업적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단군시대의 역사를 발해 때 기록한 '단기고사'에는 '기원전 1733년에 5행성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박창범 교수가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실제 BC 1734년에 그런 현상이 있었다. 5행성의 밀집은 2백50년마다 있는 일.

1년의 차이는 있으나 '단기고사'가 실제 단군시대 기록을 바탕으로 쓴 것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국내 사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권혁주 기자

<사진설명>
上.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탁본을 어린이들이 구경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1세기 고구려 때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 데도 외국에서는 이것이 중국의 하사품 천문도를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임현동 기자]

下.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측우기. 돌받침 왼쪽에 '건륭(乾隆)'이란 중국 연호가 쓰여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때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외국 학자들은 측우기도 중국에서 만들어 전해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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