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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하세요 아플 일이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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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식 교수는 “퇴직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남은 후반 인생 30년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수정 기자]

중견기업에서 부장직을 맡고 있는 박상근(가명·51)씨는 회사에 있는 게 곤욕이다. 30대에는 초고속으로 승진하며 잘나가던 그였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매번 승진에서 탈락했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그의 실적은 점점 떨어졌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씁쓸했다. 다른 직원들이 자신을 ‘무능력한 상사’로 보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사직서를 쓰고 싶어도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회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면 설움과 우울감은 심해졌다.

 중년 남성이 아프다. 일과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이 시대의 가장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1년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는 3만2565명에 이른다. 5년 전 2만6800명이었던 것에 비해 21% 증가한 수치다. 40~50대 남성의 사망 원인 2위가 자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연세대 의대 이홍식(62) 명예교수는 “무한경쟁 속에서 희생과 헌신,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온 베이비붐세대의 가장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느끼는 소외·우울·불안감으로 매우 위태롭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눈물은 남자를 살린다』(다산북스)라는 책을 펴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중년 남성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그 역시도 치열하고 힘든 중년 시기를 보냈다. 가장이 건강해야 가정이 행복한 법이다. 이 교수에게 아픈 중년 극복기에 대해 들어봤다.

잘나가던 명의, 탈진증후군 겪고 퇴직

연세대 의대 정신과 주임교수, 세브란스 정신건강병원장, 한국자살예방협회 초대회장…. 이 교수는 일명 ‘잘나가는 정신과 명의’였다. 그러던 그가 2011년 여름, 돌연 사직서를 던졌다. 정년퇴임을 4년 남겨 둔 시점에서다. 잘나가던 교수가 병원을 그만두려 하자 의아해하는 시선이 많았다. “퇴직하면 뭐 하려고?”라는 질문도 들렸다.

 중년 남성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퇴직’이다. 일터가 사라졌다는 상실감과 공허함은 감당하기 힘들다. 이른바 ‘은퇴증후군’을 겪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마치 퇴직을 자신의 삶이 끝난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남은 후반 인생 30년의 시작일 뿐이다. 미리 준비만 한다면 내가 원하고 만족하는 일을 찾아 제2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기 이전, 이 교수의 삶도 다른 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올랐지만, 그의 삶은 팍팍하게 돌아갔다.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7시 반까지 병원에 출근했다.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하는 날이 대다수였다. 50대 초반에 접어드니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지? 나란 존재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는 환자를, 집에서는 가족을 돌봐야 했다. 정작 자신에 대한 ‘돌봄’은 없었다. 청춘도 지나가고 없었다.

 그러다 그에게 ‘탈진증후군’이 나타났다. 탈진증후군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를 말한다. 극도의 신체 피로감과 무기력증·자기혐오·직무에 대한 의욕 상실을 경험한다. 그에게는 이명(귀울림) 증세로 나타났다. 회진을 돌던 중 귀가 갑자기 멍멍해졌다.

 그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환자에게 했던 조언을 정작 나 자신은 실천하지 못해 병을 앓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 조언은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탈진증후군을 겪고 나서야 이 교수는 아픈 자신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내가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남이 나를 먼저 사랑해 주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순간, 남의 시선과 온갖 집착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중년 남성의 우울·불안·공허함과 같은 증상은 결국 자신보다 가족과 회사에 대한 책임·의무만을 스스로 강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끔은 자신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갖고 싶었던 것을 선물한다. 마트에서 산 2만원짜리 와인과 집에서 끓인 어묵탕으로 부인과 오붓하게 분위기를 잡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 교수는 “비싼 돈을 들여 좋은 것을 먹고 사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앞만 보고 달릴 것을 강요했던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게 곧 행복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걷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뒷산을 걷고 뛰었다. 그는 “몸을 움직여야 신진대사가 활성화하고 삶의 활력소가 생긴다. 중년에게 운동은 필수”라고 말했다. 운동 삼아 걷던 뒷산이 어느 순간 너무 좁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그는 여행을 떠났다. 킬리만자로·히말라야·산티아고 순례자의 길로 향했다. 이 교수는 “중년의 여행은 젊을 때와 다르다. 낯선 곳에 서면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으로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퇴직 후에도 세계 3대 도보여행길로 꼽히는 미국의 ‘존 뮤어 트레일’을 가장 먼저 찾았다. 올해 초엔 인도와 필리핀 여행이 계획돼 있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메디컬 명상’을 배우기 위해서다. 이 교수는 “수많은 환자를 상담한 경험을 토대로 메디컬 명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게 나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시대 중년 남성에게 덧붙였다. “자신을 사랑하면 중년 남성이 아플 일이 없다. 당신만이 당신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글=오경아 기자
사진=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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