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병인」천주교 박해의 진상|그 백주년에 즈음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올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네 번째로 일어난 천주교의 큰 박해사건인 병인(1866)박해의 1백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 3월 8일은 박해의 첫 칼날아래 서울에서「베르네」주교 이하 4명의 불란서 성직자와 유력한 교인 남종삼, 홍봉주가 피를 흘림으로써 이후 6년 동안에 걸쳐 1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을 무참히 죽이는 무시무시한 박해가 벌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날이다.(유홍렬)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천주교회는 이균, 권철신, 일신형제, 정약종·약종·약용 형제와 같은 남인시파 소속의 쟁쟁한 양반학자들이 북경으로부터 전래된 천주실의, 칠극 등의 교리 책을 연구하다가 이승훈을 그곳에 보내어「베드로」(반석)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정조8년(1784)에 서울 명동에 있던 중인 역관 김범우의 집을 교회로 쓰게 함으로써 세워진 것이다.
천주교도들은 서로 교우라고 부르면서 당시의 엄격한 계급제도와 어리석은 온갖 미신행위를 타파하려는 일에 앞장을 서며,「언문」이라고 불러 선비들 사이에는 쓰기를 싫어하던 우리 훈민정음(한글)으로서 교리 책을 만들어 국문전용운동을 일으키고, 북경주교「구베아」에게 거듭 밀사를 보내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고(1795) 편지를 멀리「로마」교황 또는「포르투갈」여왕에게까지 보내어 조선에 독립된 교구를 설정하게 함으로써(1831) 불국인 성직자를 불러들이는 한편 서양의 나라들과 근대적인 국제조약을 맺으려하고, 우리 신학생들을「마카오」또는「페낭」섬에 보내 서양학술을 배워오게 했다.
한편 서양의 선진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신학교 고아원 시약소 등을 설치하면서 당시의 고루한 쇄국정책을 타파하려함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이 나라를 근대화하고자한 운동이었으나 조상의 제사만을 강요한 주자학을 지도 이념으로 받들고 신주를 신처럼 숭배하며 양반, 중인, 상민, 천인의 엄격한 계급제도를 지켜 국민의 대부분인 중인 이하를 천대하고 축첩 등을 자행하고 있던 봉건지배계급인 양반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던 일들이었다.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철종이 1863년12월에 갑자기 죽고 앞서 기해 박해를 일으킨 일이 있던 벽파 조만영의 딸인 조 대비(헌종 모)가 왕궁의 여주인이 되어 12세의 먼 왕족인 고종을 임금으로 삼고 실권을 왕의 부이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고종은 어릴 때에 교인이던 박말다의 젖을 먹고 자랐던 관계로 그 어머니이던 민 부대부인도 일찍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있었고, 그 하인 중에도 교인이 있었다.
따라서, 민 부인은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하인을「베르네」주교에게 보내어 새 임금의 행복과 나라의 태평을 비는「생미사」(기도의 일종)까지 지내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베르네」주교도 곧 이 나라에서 신교의 자유를 얻게될 것을 믿고 서울에 큰 성당과 학교와 고아원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돈을 불란서로부터 모아 놓고 있었다.
이러할 무렵에「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여 1860년에는「블라디보스톡」항구를 개설하고 1864년부터 바로 그 남쪽에 있는 두만강국경지대에 거듭 군대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엿보면서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 급보를 받고 대원군이 크게 당황하고 있을 때에 그를 잘 알고있던 교인생원 공봉주 승지 남종삼은 1865년 겨울에 각각 글을 올려『「러시아」의 침입을 막으려면 우리나라에 와있는 불란서 주교의 힘을 빌어 불란서 및 영국과 동맹을 맺는 길밖에 없다』라고 아뢰었다. 이 편지를 거듭 읽고 며칠 후에 대원군은 곧 주교를 만나게 해달라고 남종삼에게 부탁하였으나 때마침 12월 성탄절을 앞에 둔 때이라 주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하여 멀리 황해도지방을 돌고있어서 곧 대원군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북경으로 가고있던 우리 동지사 이흥민이 급한 거짓편지를 정부에 보내어 말하기를 『청국에서는 그 나라에 퍼져있는 모든 서양인을 죽이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 거짓소식을 가지고 천주교 배척파의 영의정 조두순들이 1866년1월말에 글로써 주교와 가까이 하려던 대원군을 꾸짖고 이 나라에 있는 서양인과 천주교인을 모두 죽이라고 충동하게되니 주교를 제때에 만나지 못하여 화가 복받쳐있던 대원군은 갑자기 마음을 돌려 2월 중순에는 주교의 하인이던 이선이를 먼저 잡아 교회의 사정을 샅샅이 듣고 이를 앞잡이로 내세워 2월23일부터「베르네」주교 홍봉주를 잡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크고 모진 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 또 하나의 까닭은 그가 가의 위세를 보이기 위하여 1865년4월부터 시작한 경복궁재건의 비용에 부족을 느끼어 이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메우려한데 있었고 그의 조급한 마음씨가 이를 부채질 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먼저 잡힌「베르네」주교이하 4명의 불란서 성직자와 남종삼 홍봉주를 10여일 후인 3월8일(음 정월21일)에 각각 한강 가의 새남터(이촌동)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목베어 죽이고 4일 후에는 다른 2명의 신부와 교인들을 또한 새남터에서 죽이고 3월 30일에는 부주교이던「다불뤼」이하 3명의 신부와 교인들을 충청도 보령의 수영에서 죽임으로써 이후 6년 동안 계속되는 큰 박해는 시작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박해는 그후 서양배가 나타날 때마다 거듭되어 독일상인「오펠트」의 배가 나타났던 1868년과 미국함대가 나타났던 1871년에도 각각 큰 박해가 일어났었다. 이렇게 거듭된 박해로 말미암아 전후 6년 동안에 1만명 이상의 교인이 죽게되고 대원군은 그의 마지막 위세를 보이기 위하여 1871년6월에 이른바「척화비」를 전국 요소에 세우게 하여 철저히 서양인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씀으로써 우리나라를 우물안 개구리나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도 그 며느리이던 민비 일파의 위력에 내몰려 1873년에 은퇴하고 어쩔줄 모르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무력 앞에 1876년에 할 수 없이 그와 수교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 뜻깊은 병인박해 백주년을 맞는 올해의 기념행사가 다만 70만 천주교인들의 그것으로만 그칠 일이 아니라 온 겨레의 그것으로 성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모진 박해로 말미암아 피를 흘린 1만여의 천주교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한 희생이었고 그때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은 꾸준히 계속하여 국문활자의 주조(1880), 한·불 자전·한어문전의 편찬 및 발간(1881), 신학교 고아원의 설치(1885), 신교자유권의 획득(1886), 활판인쇄소의 국내도입(1888), 서양식 벽돌의 제조(1891), 양식교회의 건축(1892), 혼례·장례법의 간소화, 일부 일처주의의 여행, 신문의 간행(1906), 민족운동의 전개 등으로 근대화의 빛나는 발자취를 많이 남겼다. (문박·서울대교수·사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