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김수영 시인께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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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께.

당신의 후배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 을 밑줄 쳐가며 곱읽었음을 고백합니다. 과연 좋습디다. 20년 전 책의 재출간이라지만 '영원한 청년의 초상'은 지금 봐도 빛바라기는 커녕 싱싱하다는 확인을 새삼 했지요.

적지않은 문인을 몸살나게 했던 미모의 여동생 김수명은 "생전 오빠의 삶은 기승의 연속"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다른 이들도 "자유스럽고 저돌적인 것이 김수영의 특징"이라고 했다는데, 그건 조로(早老) 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문학에 거의 예외적인 영웅적 이미지가 아닐까 합니다.

"모든 문학은 불온(不穩) 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볼온한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1백년 문학사가 얻어낸 깨침 중 가장 기운 펄펄한 명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권력의 금압(禁壓) 에 밀려, 혹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검열로 통조림 인간으로 주형(鑄型) 되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정신 말이죠. 그건 마르쿠제가 말한 '위대한 거부(Negation) '의 정신일 겁니다.

불온성, 위대한 거부의 정신을 이 땅에서 유지한다는 게 어려운지를 저는 최근 재확인했지요. 그건 뜻밖에도 다산(茶山) 정약용의 글이었습니다. 조선조 말 가장 뛰어난 엘리트가 토해낸 몸사리기 발언, 자기검열의 흔적은 충격이었죠. 들어보실랍니까?

"내 병은 내가 안다. 용감하되 무모하고, 선(善) 을 좋아하되 앞뒤를 잴 줄 모른다. 이런 까닭에 어려서는 이단으로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이러하니 주위로부터 비방을 유독 많이 받았다".

즉 다산은 당신처럼 '타고난 불온아'였지요. 하나 그런 다산이 스스로 함몰됩니다. 그의 또 다른 아호 여유당(與猶堂) 에 대한 스스로의 설명에서 그 흔적이 있습니다.

최근 국역된 산문집 『뜬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 그 아호는 노자(老子) 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즉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 건너듯, 겁내기를(猶) 를 사방 이웃 두려워하듯 한다"는 노자의 발언이야말로 자신의 '이단병(病) '을 고치는 쓴 약(藥) 이라고 판단해 스스로 겁쟁이 아호를 짓고 세상을 숨은 겁니다. 아, 슬프기 한량 없습니다.

우리의 이단아 김수영 시인. 저도 압니다. 개혁군주 정조와 다산의 뒷덜미를 잡으려는 보수 사림(士林) 의 견제가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그러나 천하의 다산이라면, 이땅의 유구한 '금압의 분위기'에 더 저항을 해야 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더구나 구한말의 봉변, 식민지 체험으로 이어지는 고약한 근현대사를 염두에 두자면, 저의 한탄은 이땅 개혁 엘리트들의 왜소함 내지 불철저함에 대한 유감으로 연결됩니다.

김수영 시인. 지금은 지하에 있는 당신의 삶을 음미하려다 다산에게 화풀이를 한 꼴이 됐습니다. 당신이라면 흔쾌히 받아줄 것 같아 한번 해본 말입니다. 당신이 간지 33년, 이땅에는 자기만족과 체념 속에 잘디 잘아진 지식인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큰 결례의 말이지만, 당신마저 오래 살아 욕된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모습으로 남은 당신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아방가르드가 없는 사회, 위대한 거부가 없는 사회에 당신은 희망입니다.

당신의 흔적이 밴 『김수영 평전』을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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