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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은 뿌리 없는 모든 이들의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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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언저리에 미세하게 그어진 붉은 상처,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눌 때 발등에 튄 오줌으로 점차 따뜻해져오던 느낌, 대문과 담벼락 틈새에 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과 그 풀이 품고 있는 아주 작은 꽃송이, 왼손의 그것보다 조금 더 긴 오른손의 생명선…. 이런 것들에 대해 묘한 집착과 관찰을 보이는 소설가 윤성희(29)를 비 오는 목요일 사당역 부근에서 만났다.

사당역은 그녀가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다는 수원과 서울 시내의 꼭 중간지점이다. 서울 시내에서 주로 생활하는 이들에게 사당역은 그저 변두리에 지나지 않지만, 윤성희에게는 서울의 한가운데에 굳이 끼여들기 싫을 때 운동화를 신고 잠깐 나와 볼일만 보고 가는 접선지이자 창구였다.

잿빛 세상, 그늘과 어둠, 고독과 소외, 콤플렉스
윤성희라는 이름이 소설가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1999년 겨울, 그녀가 쓴 단편 「레고로 만든 집」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남들은 십 년 넘게 도전하기도 하는 신춘문예에 ‘단 한 번’의 투고로 덜컥 당선된 그녀는 뭇사람들로부터 반신반의의 시선을 받았다.

모르긴 해도 그 시선들 중에는 ‘운이 억세게 좋은 여자군!’하는 부러움과 시샘이 절반 이상이었을 터. 그러나 잇달아 발표한 그녀의 작품 「서른 세 개의 단추가 달린 코트」와 「계단」이 2000년과 2001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내리 선정되고, 또 다른 작품인 「모자」와 「그림자들」이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에 선정될 뻔 하자, 이제 아무도 그녀를 운이 있다, 운운하지 않는다. 대신 글 잘 쓰는 젊은 작가, 아주 드문 역량을 지닌 신예작가로 손꼽을 뿐이다.

때문에 올 가을 출간된 그녀의 첫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민음사)은 그녀를 주목해온 모든 이들에게 한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소설집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소설집을 들춰본 평론가들은 이런 단어들로 윤성희의 소설을 말했다. 잿빛 세상, 그늘과 어둠, 모노톤 소설의 원형, 고독과 소외, 콤플렉스.

“외롭고 쓸쓸한 존재를 그리고 싶었어요. 사실 뿌리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들은 모두 태생적으로 슬프고 외롭잖아요? 뿌리 없음의 거부는 오히려 공간에 대한 집착을 낳고, 그건 제 작품 속에서 남의 연립주택에 얹혀 사는 여자, 사방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반 지하방에 사는 여자,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방 한 칸에서나마 떠밀려 나와야만 하는 여자로 형상화됐어요.”

은오,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
실제로 소설집에 실린 10편의 서사는 모두 ‘방’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그 방은 의지할 데 없어 거리로 떠밀리기 직전의 인물들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누이는 최저낙원이다. 떠밀리기 직전의 인물들이란, 대학교 앞 복사가게에서 종일 복사기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로 자폐증 오빠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부양하는 ‘나’(「레고로 만든 집)), 젓가락 하나가 끼인 적이 있을 만큼 앞니가 벌어져 모든 인간관계를 거부하는 ‘나’(「당신의 수첩에 적혀 있는 기념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받은 경품을 되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는 ‘나’(「악수)), 유난히 짧은 운명선을 손톱으로 꾹꾹 늘여 기어코 길게 늘여놓은 ‘은오’(「서른 세 개의 단추가 달린 코트)), 생리 늦추는 약을 먹고 위험한 동작에 온몸을 내던지는 스턴트우먼 ‘은오’(「모자)) 등의 주인공들이다.

서른이 채 안된 젊은 작가 윤성희는 가난하고 남루하기만 한 이들 인물들의 고단하고 안쓰러운 삶을 한없이 스산하지만 결코 불쌍하지는 않게 묘사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은오’다.

헌데 이상하게도 ‘은오’는 작품 속에서 이미 사라진 존재로 이름과 지난 행적만 희미하게 거론될 뿐이며, 대신 ‘은오’를 꼭 닮은 채 그녀의 흔적을 추적하는 또 다른 인물 ‘나’를 통해 독자들은 ‘은오’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짐작한다.

“‘은오’는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예요. 인식하지 못하거나 굳이 외면하려할 뿐이지 그림자나 그늘 하나쯤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죠. 그림자는 많은 순간 불행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더욱 악착같이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주기도 해요.”

이렇게 볼 때 그녀의 소설은 외롭고 그늘진 삶과 삶이 만나 부대끼고, 닮아가고, 서로의 공통점에 대해 나즈막하게 읊조리는 비루한 노래라고 말해도 되겠다. ‘그늘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들’(방민호)처럼 그녀의 소설들에는 결코 화려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 없는 애틋함이 매력처럼 혹은 그것을 넘어 ‘마력’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에요, 절대로
물론 윤성희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왜 그녀는 이토록 ‘세련되지 못한’ 주제에 집착하는가, 21세기에 걸맞지 않은 고루한 서사가 아닌가, 혹 1980년대 리얼리즘 소설로의 회귀는 아닌가. 젊은 작가다운 신선한 발상과 실험정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제가 보기에도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에요. 세련된 소설은 더욱 아니고요. 하지만, 여태껏 제가 습작해오며 익혀온 문체, 어조와 잘 어울리는 건 발랄함보다 쓸쓸한 정조라고 생각해요. 몸에 맞는 것을 두고 억지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다만, 다른 욕구, 다르게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뿐이죠.”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까지는 한없이 기다리겠다는 소설가 윤성희.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무릇 좋은 작품이란 가까운 것을 향한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것 없이는 어떤 미사여구나 화려한 서사를 지닌 작품이라도 한밤중 들려오는 냉장고 소음처럼 공허하기만 할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소설가 윤성희를 주목하고 그녀의 작품들을 귀하게 읽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도.(이현희/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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