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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36. 북한 영화의 흐름

중앙일보

입력

북한의 영화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1차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는 영화 뿐만 아니라 북한 문화예술 전바에 걸쳐 문화예술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을 겪으면서 유일사상지도 체계의 확립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혁명투쟁 시절 창작하였거나 공연한 작품을 문화예술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불후의 명작 〈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 영화로 제작되었다.

수령으로서 김일성 주석의 행적은 너무나 위대해서 어느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따라 창작집단을 결성하였다. 영화를 통한 수령형상 창조 작업은 백두산창작단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백두산창작단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1967년 2월에 창립된 수령형상 전문 영화제작단이다. 창작단 명칭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김일성의 혁명역사와 혁명가정을 취급한 혁명영화들을 창작하고 항일혁명 투쟁시기에 창작된 소위 '불후의 명작'들을 영화로 옮기는 역할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또한 당의 주체적 문예사상의 진리성과 정당성을 창작을 통하여 확증하며 문학예술부문에 쌓아올린 당의 업적을 옹호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다.

북한에서는 백두산창작단이 창립됨으로써 예술영화에서 김일성의 혁명역사와 혁명가정을 취급하는 시원을 열었다는 점에서 영화예술 발전과 전반적인 문학예술 발전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한다. 백두산창작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문학예술창조에 있어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과 대안의 사업체계의 요구와 속도전의 혁명적 방침을 철저히 구현하여 '백두산창작단의 일솜씨'라는 새로운 공산주의적 창작기풍을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두산창작단의 주요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69년에 〈피바다〉를 영화로 옮긴데 이어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등을 영화화 했으며 김일성의 혁명역사, 혁명가정의 투쟁업적을 찬양한 〈누리에 붙는 불〉(1974),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1978), 〈백두산〉(1982), 〈조선의 별〉(1부~10부), 〈미래를 꽃피운 사랑〉(1982), 〈친위전사〉(1982), 〈압록강을 넘나들며〉(1983), 〈푸른 소나무〉(1984), 〈해발〉(1985), 〈잊을수 없는 나날에〉(1986), 〈려명〉(1987), 〈기다려다오〉(1987), 〈혁명전사〉(1987) 등을 창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도한 3대 혁명소조 운영의 영향과 성과를 반영한 〈처녀지배인〉등의 작품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까지 수령의 혁명전통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나 전쟁의 영웅을 부각하고, 사회주의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의 모습, 우리식 사회주의에 살고 있는 인민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린 작품 등 북한 영화의 전형적인 주제의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들면서 약간 양상이 달라진다. 주제의 폭이 넓어져 남녀의 애정, 도시와 농촌의 갈등, 세대간의 의식차이를 반영한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예전에 보기 힘들었던 액션이나 애정의 표현도 많아졌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북한 예술의 전형적인 틀 안에서 보여진 부분적인 변화였으나 사회변화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사회주의 강행군을 지나면서 북한 영화는 주석에 대한 충성을 내용으로 하는 1970년대의 내용과 생활내부의 생활을 소재로 하는 내용의 두 방향으로 창작되었다. 최근 북한 영화계의 방향은 새로운 지도자 체제에 맞는 사상성과 함께, '제3차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수령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극복해 나가자는 정신 무장을 강화하려는 측면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1998년 6월 13일에 있었던 조선영화문학창작사의 창립 50주년 기념보고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기념보고회에서는 북한 영화문학 최고의 창작 단체로서 '당과 혁명위업에 참답게 이바지하는 영화문학들을 수많이 창작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별히 이렇게 혁명적 문학의 창작을 촉구하는 것은 최근 영화문학(시나리오)이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져 대작의 혁명영화가 제작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 북한의 영화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관심 속에서 북한의 대표적인 장르로 인기를 얻어왔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북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문화예술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이는 북한 주민들의 사상교육에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영화계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이름없는 영웅〉(1979∼1980년까지 20부), 〈조선의 별〉(1982∼1983 제작)과 같은 대작의 창작을 독려하여 주민들의 충성심 유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히 대외적으로 고립 정책을 지속하면서 직, 간접으로 외래 사상이 유입되었고, 전후세대가 늘어나면서 북한으로서도 이념적으로 단속할 필요성이 절실해 졌던 것이다. 여기에 김정일 시대의 출범에 따른 사상적인 해이를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혁명적 전통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북한에서는 1997년 11월에 김일성·김정일의 혁명업적을 찬양하면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제로 한 영화문학 및 텔레비전문학 현상모집 등을 공모하였고, 1998년 3월부터는 참신한 새로운 신인작가 발굴을 선전·독려하는 등 사상성을 강조하여왔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영화문학창작사에서는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켜 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는 훌륭한 영화문학작품들을 더 많이 창작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은 최근 북한 문화예술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다양해진 인민들의 욕구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 줌으로써 새로운 분위기 전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에서 음악정치의 강조나 바둑협회의 설립, 생활소재의 텔레비전 영화 방용 등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영선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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