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 이렇게 요동치다니… 참 놀라운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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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03면

지난 2일 세종시에서 학생들이 18대 대선 후보 프로필이 적힌 선거 벽보를 보고 있다. 김성태 기자

트위터엔 ‘그분’이 3시20분이면 도착할 거라는 공지가 떴다. 지금은 3시40분인데 아직 나타날 기미조차 없다. 영하 9도의 강추위지만 사람들은 계속 기다린다. 곧 도착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돌 때마다 사람들은 더 몰려든다. 결국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도착하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내린다. 중앙엔 그들의 메시아가 서 있다. 사람들은 그분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마치 홍해를 가르고 걸어가는 모세와 같다. 하지만 이곳은 안양시 범계역이고, ‘그분’의 이름은 안철수다.

외신기자들의 한국 대선 관전기

한국인뿐 아니라 외신기자들도 안 전 후보를 기다리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대선 당일 투표 용지에 그의 이름은 없겠지만 안 전 후보는 여전히 대선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가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우리 모두는 같은 의문을 가졌다.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정치 신인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가?”

영국 런던의 이코노미스트 본사부터 미국 뉴욕과 홍콩 등의 각 신문 에디터들 역시 이 신비한 인물에 대해 오랫동안 호기심을 가졌다. “인터뷰 좀 추진해보라”는 주문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대부분의 다른 후보들도 인터뷰 요청은 사양했다. 보통은 외신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더 잘 받아들여지는 편인데 대선 후보들 취재는 그렇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의 독자층과 투표층은 차이가 날 터이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산업화 용사들’의 경제민주화 요구 충격
돌이켜보면 영국에서도 아웃사이더가 나타나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자유민주당 대표 닉 클레그다. 안 전 후보처럼 완전한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는 없지만 2010년 5월 총선을 앞두고 클레그는 급부상했다. 그런데 클레그는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수당과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하고 부총리가 됐다. 이 결정으로 인해 그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정치인이 돼버렸다.

아웃사이더가 1인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안 전 후보를 보면서도 개인적으론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코노미스트의 다른 기자들이 “안철수가 박근혜를 이길 수 있을까?”라고 물어올 때마다 내 답은 같았다. “왜 안철수만 생각해? 문재인도 있는데.” 당시 문 후보의 지지율은 8% 선을 맴돌았다. 하지만 문 후보의 도전이 더 거세질 거란 느낌에 인터뷰를 추진해 8월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 후 안철수가 문재인을 위해 결국 2선으로 물러날 거라는 기사를 썼다. 하지만 당시엔 모두들 안철수 전 후보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기사는 결국 인터넷판에만 게재됐다. 지금 와서 내 예측이 맞았다는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를 설명하고 싶어 꺼낸 얘기다. 영국에선 선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득표율 차이 정도만 변수로 작용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선거와 관련해 친구들끼리 나누는 대화도 꽤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한국과는 분명 다른 점이다.

혼전 양상이 길어지다 보니 여론조사 결과에 집착하게 되는 현상은 한국 대선의 특징으로 보인다. 선거판을 뒤흔드는 순간마다 여론조사 결과는 달라졌다. 안 전 후보가 책을 내거나 출마를 선언하거나 할 때마다 며칠 만에 5~10%포인트가 요동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외국인 기자인 내겐 좀 이상하면서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영국에선 전통적 지지층이 워낙 확고해 여론조사 결과 역시 잘 흔들리지 않는다. 미국 역시 약간의 부동층이 누구를 지지하는가로 승자가 결정된다.

경제민주화란 이슈가 부상한 것에도 의미를 두고 싶다. 이코노미스트 편집국의 에디터들은 한국인들이 복지 문제를 거론하고 재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수출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산업화의 용사들’이란 이미지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후보들이 경제민주화를 들고나온 게 옳은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경제민주화는 결국 애매한 말의 홍수에 묻혀버렸다. 공약을 상세하게 가다듬지도 않은 채 선거전에 뛰어들 수 있는 일이 가능하다는 건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관련 연설은 약속으로만 가득했을 뿐 구체적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토론 능한 이정희가 주류 정치인이라면?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했다. 북한이 12일 로켓을 발사하면서 불한당 같은 면모를 다시 상기시킨 것이다. 물론 북한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밖에 없다는 점은 기자로서 잘 아는 바다. 북한은 가장 불편할 만한 타이밍을 골라서 일을 벌이는 버릇이 있다. 하다못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것도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기 직전인 12월 17일이었다. 이번 로켓 발사는 한국이 선거를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교과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북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핵무기에 집착하는 무서운 이웃 나라 때문에 고용·교육·건강과 같은 이슈들이 묻히는 특이한 곳’이란 오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판가름하는 건 북한이 아니라 각 후보의 경제정책 공약이나 개인적 특징이라고 에디터들을 설득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한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될지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하지만 지난 TV토론을 볼 때 적어도 한 명만큼은 박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을 게 확실하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 말이다. TV토론에 임하는 이정희 후보에 대한 외신 기자들의 반응은 대다수 한국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TV토론 이전엔 지지율이 1%도 되지 않던 후보가 다른 두 주요 후보와 대등하게 TV토론에 임할 수 있다는 것도 외신기자들에겐 놀라운 점이다. 게다가 이 후보가 한국 정부를 ‘남쪽 정부’라고 칭한 것에 대해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후보가 박 후보와 문 후보보다 훨씬 더 토론을 잘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 후보가 주류의 시각을 가진 정치인이었다면 이 후보의 질주를 막을 방법은 없었을 것 같다. 이 후보는 TV토론 후 선거의 반(反)영웅이 됐다. 단언컨대 외신기자들 중 몇몇은 이 후보에게 인터뷰를 신청해 놓은 상태일 거다. TV토론의 수혜자로서 이 후보는 대선 결과에 모종의 영향을 제공할 변수로 떠올랐다.

한국 대선을 취재하면서 눈에 띈 건 거리 유세 방식이다. 대중가요 가사에 ‘박근혜’와 ‘문재인’을 넣어 개사한 캠페인송을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틀어놓는 거리 유세 모습은 낯설다. 한국에 아무리 오래 정착한다고 해도 쉽게 적응될 것 같진 않다. 이정희 후보 측은 아마도 예산 문제로 거리 유세를 덜 하는 것 같은데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영국의 선거 유세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한국 대선이 다른 여느 나라의 선거들보다 흥미로울 거라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영국의 최근 선거들보다는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흥미를 더하는 핵심 요소는 각 후보가 가진 스토리다. 안 전 후보까지 포함해 모든 후보들이 각자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문 후보와 박 후보가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 건 운명의 힘이다. 둘 중 누구의 운명이 이뤄질지 지금으로선 예측이 어렵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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