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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정운찬 전 총리의 처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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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불혹(不惑)-지천명(知天命)-이순(耳順)-종심(從心), 때가 되면 대충 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오로지 공자이기에 가능했던 경지란 걸 깨닫곤 한다. 동시에 보통 사람들은 외려 정반대 처지에 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40대에도 수시로 유혹에 무너지고, 50대에도 하늘의 뜻은커녕 땅의 뜻도 모르며, 60대에도 웬만한 말은 다 귀에 거슬리고, 70대에도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법도에 어긋날 수도 있겠다 싶은 거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특히 정운찬 전 총리의 행보를 두고서다.

 현 정부에서 10개월간 총리로 지낸 그가 최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했다. 재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고위직 가운데 반대 진영의 후보를 지지한 경우는 윤진식 새누리당 의원 정도만 기억이 난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윤 의원은 2007년 이명박 후보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나마 그건 장관인 경우다. 대통령도 형식적으론 무당적 상태였다. 이번엔 국정 2인자인 총리이고 이 대통령은 지금도 새누리당 소속이다. 정 전 총리의 변신이 이례적이란 얘기다.

 사실 정 전 총리는 민주당과 가까운 편이긴 했다. DJ 때부터 주요 보직에 거명됐고, 그때마다 사양했다. 또 그때마다 ‘몸값’이 올라가곤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대선 주자로까지 격상됐다. 노 전 대통령은 막상 “경제 공부 좀 했다고 경제 잘하는 게 아니다”라고 마뜩잖아 했지만 그랬다. “정치를 안 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지금은 내가 대통령감이 되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말, 그땐 정 전 총리가 했다.

 정 전 총리는 2009년 이 대통령으로부터 총리 지명을 받았고 민주당에선 “연애는 민주당과 하고 결혼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했다”고 화를 냈다. 곧 이은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은 그를 향해 “까도 까도 의혹이 계속 나온다”며 ‘양파 총리’라고 했다. 총리로서 그는 실언은 해도 소신 발언을 자주 하는 형은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 문 후보를 지지한 이유로 동반성장을 들었다. 문 후보는 현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빵점을 줬다. 4대 강 보도 철거해야 한다고 했다. 현 정부 국정의 한 축이었던 정 전 총리는 이런 주장에 과연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왜 나만 문제 삼느냐. 다른 ‘올드보이’도 있지 않느냐”라고 항변하고 싶을는지 모르겠다. 자신만 진영을 바꾼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번 대선이 ‘올드보이의 천국’이 된 건 맞다. 이명박 대통령 특보를 지낸 김덕룡 전 의원이 문 후보를 지지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당의 대표였던 한광옥 전 의원은 이제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 부위원장이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박 후보를 지지한다.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노인’과 ‘기득권’이란 유리천장에 막혀 꼼짝을 못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 60대가 넘는 사람들이 모두 멀찌감치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다”고 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도 누군가의 옆에 있다가 험한 일을 겪었다.

 정 전 총리는 그러나 이들과는 다르다. 다른 올드보이들은 대부분 2선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좋은 말론 원로, 속된 말론 ‘지나간 물’이었다. 일종의 ‘재취업’인 거다. 그는 사실상 현역 여권 인사였다. 지난해 성남분당을 국회의원 후보로, 하반기엔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됐다. 올 3월까지 동반성장위원장이었다. 여권의 예비 주자였다. 현 정부의 공과 (功過)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때 자신을 비난하던 민주당이 이젠 자신을 ‘개혁적 인사’라고 치켜세운다고 취해 있을 때가 아니란 의미다. 그보단 훨씬 싸늘한 국민적 시선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자서전(『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사람들은 통상 ‘처음처럼’을 강조하지만 자신은 ‘마지막처럼’이란 말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했다. 또 “어제의 나의 말과 오늘의 나의 말이 다르지 않고 그때의 나의 행동이 내일과 모레의 나의 행동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그런 그는 어디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