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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거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자기의 양심이나 의사당 밖의 여론을 무시하고 극에서 하라는 대로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선량들을 거수기라고 욕하고 비웃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거수기가 고장을 일으켜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정당이란 바로 조합의 중당이고, 그런 것을 가지고 나라 일을 처리하거나 정당제도를 확립한다는 것은 무가망이다. 소위 양당 제도가 이륙되려면 선량들은 마땅히 거수기가 되어야 한다.
어제 있은 국회의장 선거 때, 공화당 기계에 큰 고장이 났다. 여당 기계의 고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얼마 전에 있은 각료 해임 건의 때도 고장을 일으켰다. 야당 기계가 거듭해 온 고장과 소란 이합집산의 활극은 눈물 없이 되새기기 어려울 정도. 그래서 이번 의장 선거 때는 영국의회의 용어를 빌면 「임의 투표」가 허용된 결과가 되었고 여·야 거수기들은 하루의 휴일을 즐긴 셈이다.
규율이 엄한 영국 정당의 거수기들도 때론 고장을 일으킨다. 「수에즈」출병 때 5, 6명의 여당 의원이 야당과 함께 투표해서 큰 소동이 났던 일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때 고장을 일으킨 사람들의 정치생활은 사실상 박살이 났다.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영국의 각 정당의 거수기들은 거의 100%의 충성을 보여왔다. 「휘프스」라고 부르는 독전간사들이 있어서 여간히 각오를 하지 않고는 반란을 일으킬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휘프스」들이 회초리를 거두고 마음대로 투표하라고 휴일을 선언할 때가 있다. 1912년 여성 참정권법안이 나왔을 때 그랬고, 48년부터 여러 차례 표결해오다 최근에 통과를 본 사형폐지법안에 대해서도 그랬다. 교회기록서와 같은 비정치적 문제나, 이해가 어떤 한 개의 정당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정당이나 나라 전체에 걸칠 때 임의투표가 허용되는 것이다. 불편 불당이어야 할 회장의 지위로 보아 어저께만은 처음부터 거수기들에게 휴일을 주었어야했을지도 모른다. 말썽이 없는 무명의원을 의장으로 뽑는 영국식으로 하자면 회장선거가 우리의 그것 같이 시끄러울 필요가 없다. 지난 일은 덮어두고 앞으로 4, 50개씩 무더기로 고장을 일으키는 거수기들을 이끌고 정당정치며 양당제도며를 어떻게 한다고 한들 곧이 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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