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안철수, 기업가정신의 불쏘시개가 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6면

정선구
산업부장

사람마다 그릇 크기가 다르다. 무릇 자기 그릇 크기에 따라 살아야 뒤탈이 없고, 사람을 부림에도 그릇 크기에 맞게 쓰느냐에 성패가 갈린다고 한다. 항우는 한신의 큰 그릇을 보지 못하고 그저 근위병으로 썼다가 패망했다. 반면 유방은 대장군으로 삼아 천하를 거머쥐었다. 한신 역시 스스로의 크기를 과신했다. 대장군이면 족할 것을 괴통의 부추김에 제왕을 넘보다가 유방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선시대 문장가 이승소는 이렇게 말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작게 받아들일 수 없고(器之大者 不可以小受), 그릇이 작은 사람은 크게 받아들일 수 없다(器之小者 不可以大受).’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를 포기했다.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 가운데 누가 대선에서 승리하느냐에 따라 그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박이 당선될 경우 야권을 추슬러 차기 대권을 노릴 것인가. 문이 대통령이 되면 2인자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과연 안철수의 그릇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역할이 가장 잘 어울릴까.

 얼추 8년 전 오늘쯤으로 기억된다. 서울 인사동 밥집에 내로라 하는 벤처인들이 모였다. IT담당 기자로서 이 모임에 초청됐는데 벤처인들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예닐곱 순배 잔이 돌면서 왁자지껄해지는 자리 한구석 내 옆에 있던 얌전한 사람, 안철수였다. 그는 회식 내내 거의 말이 없었다. 막 출간된 자신의 책을 즉석에서 사인해주며 내게 선물할 때도 얼마나 부끄러움을 탔던지…. 그때 받은 인상은 “몇 번 봐왔지만 여전히 다소곳한 색시이자 영락없는 샌님일세”였다. 그리고 얼마 뒤 당시 자리에 모인 벤처인들은 벤처거품이 빠지면서 함께 침몰했다. ‘유일한 생존자’ 안철수를 지켜보면서 ‘겉으론 부드럽지만 내공이 깊은 사람’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안철수와의 접촉은 계속됐다. 그가 미국 유학 중일 때다. 알고 지내던 한 정치인이 내게 안철수의 서울시장 후보 승낙 여부를 타진해왔다. 절대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사를 물어봤다. 그는 대답했다. “나의 행복은 이곳 미국 집 안에서 아내·딸과 함께 있는 겁니다. 방에서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꼭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빈둥빈둥 함께하는 것, 이게 나의 큰 즐거움이죠.”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잠깐 여자 문제가 거론됐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너무 잘 아는 그이기에 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는 단호함도 있었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사람 잘 안 자르게 생겼지요? 아닙니다. 조직을 해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습니다. 어떤 분은 내 앞에서 펑펑 눈물까지 흘렸어요.”

 특히 그는 대기업엔 일침을 가하고 젊은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난해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과의 포럼에서 ‘삼성 동물원’ ‘LG 동물원’ 현실을 개탄했다. 벤처가 잘되려면 대기업이 과감히 인수해주고, 그 벤처는 기업을 판 돈으로 또 다른 벤처를 만드는 게 일상화돼야 한다. 바로 미국에서 벌어지는 벤처 생태계 선순환인데, 국내 대기업은 벤처를 동물원 울타리 안에 가둬놓는다는 게 그의 비판이다. “젊은이들은 과감히 벤처에 도전하고 세상은 그들의 실패를 허(許)하라”는 그의 외침은 더욱 울림이 컸다. KAIST 석좌교수 시절에는 “창업가 정신이란 위험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갖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일갈했다.

 샌님이되 당차며 내공 있고. 한평생 청년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일깨우고. 그의 책 제목처럼 『영혼이 있는 승부』를 던진 안철수에게 『지금 우리에게(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줄곧 정치엔 관심 없다고 하다가 느닷없이 뛰어들고, 수많은 사람을 설레게 하더니 갑자기 출마 포기 선언으로 추종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역할은 기업·기업가정신·젊은이들을 위한 불쏘시개다. 굳이 정치를 원한다면 박이 되든 문이 되든 차기 정권 정보통신부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정도가 현재 그의 그릇 크기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그가 젊은이들의 구루(위대한 스승)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2017 대권을 꿈꾼다면, 그건 지금 자신의 그릇과 적역을 얼마나 잘해 내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