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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 안전 우리가 지켜요” “맞춤형 휴대폰 기대하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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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20면

10월 통신서비스 공동 구매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한 전국통신소비자 협동조합(추진위). 통신업계의 과점 아래서 소비자주권을 지킨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해당 협동조합 제공]

#폭설이 내린 5일 서울 대치동의 한 빌딩 6층. 사회적 기업을 표방하는 ‘행복세상’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쪽 방에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추진위원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1년 가까이 준비작업을 했다는 이상국(39) 본부장은 잇따라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랴, 취재기자와 면담하랴 경황이 없었다. 그는 “대리운전을 하는 분들은 물론 퀵(택배)서비스 같은 연관 직종에서 문의가 많다”고 전했다. 3일 1호로 신청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조합 정관 제정과 조직, 신청 절차에 이르기까지 자문 요청이 많다는 것이다. 이 본부장은 창문 밖 굵은 눈발을 보면서 “대리운전이나 퀵서비스는 이런 날 너무 위험하다. 이들의 안전과 권익을 보호하는 데 조합이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문호 개방… 첫 주 돌아보니

#6일 인천 계양구의 한 상가건물 2층. ‘전국통신소비자 협동조합’이라는 간판을 뒤로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공동구매 공동소비!’ ‘통신소비자 주권회복!’ 같은 구호성 플래카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이용구 상임이사는 “조합원들이 요금제를 비롯한 통신서비스부터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통신회사를 상대로 공동구매를 할 예정이다. 맞춤 서비스를 통해 통신비 거품을 걷어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서명 후 가입비 1만원을 내면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이 돈은 조합 운영, 소비자 주권 회복에 필요한 교육·활동 등에 쓰인다. 초고속인터넷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할 계획도 있다.

대리운전 조합, 전화 문의 폭주
위의 두 사례 외에도 시행 첫 주에 조합 신청을 낸 곳은 ‘행복도시락사회적협동조합’ ‘다문화희망연대협동조합’ 등 분야가 다양하다. 서울이 12건으로 가장 많고 부산 7건, 경기 4건, 광주·전북·전남 2건씩이었다. ‘행복세상’의 송나리 연구원은 “대리운전 기사, 다문화가정의 협동조합 인큐베이팅(육성) 자문에 바쁘다”고 말했다. 행복세상은 법률·경제·복지 분야의 사회운동을 펼치는 재단법인으로, 경기 부천시의 다문화가정 130여 가구 친목모임을 야채 등을 파는 유통조합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행복도시락사회적협동조합처럼 사회적 기업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려는 경우도 있다. 5일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이 조합 추진위 사무실에서 최강종 이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층 실내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SK행복나눔재단이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인 행복도시락은 전국 29개 지부가 있는데, 각 지부가 모두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이들 중 20곳이 이번에 조합으로 묶여 ‘느슨한’ 공동 경영체제로 바뀌는 것이다. 그는 “좋은 식자재를 좋은 가격에 구입해 좋은 먹거리를 공급하려고 한다”며 “1차 목표는 공동 구매로 양질의 식자재를 싸게 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기업이나 예비군 등에 공동 급식하는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의 창립 총회(왼쪽). 3일 설립 신고서를 냈다. [해당 협동조합 제공]

기획재정부는 한시 기구인 협동조합 전담 기구를 협동조합정책관(가칭)으로 상설화할 방침이다. 서울시도 ‘협동조합 서울’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찰스 굴드 국제협동조합연맹(ICA) 사무총장이 3일 방한해 서울시의 협동조합 정책에 훈수를 두기도 했다.

고용·창업 활성화에 사회통합도 기대
1961년 ‘농업협동조합법’ 제정으로 국내 첫 협동조합인 농협이 탄생했다. 그 이후 수산업협동조합·신용협동조합·소비자생활협동조합·엽연초생산협동조합·중소기업협동조합·산림조합·새마을금고 등 8곳이 운영돼 왔다. 유럽처럼 민간의 자발적 필요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산업화처럼 다분히 국가 주도의 정책 드라이브였다. 김두년 중원대 법학과 교수는 “이제 8개 분야 특별법 대신 기본법에 근거해 신고만으로 협동조합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협동조합이 자생적으로 싹트지 못한 건 짧은 산업화 역사, 이념적 편견 탓이다. 장종익 한신대 글로벌협력대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시장경제 역사가 짧은 데다 압축성장을 하는 바람에 효율적인 주식회사 체제에 집중했다”고 평했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해방 이후 협동조합은 빨갱이(좌익) 체제’라는 그릇된 인식을 가졌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사회적 기업에 이어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김기태 한국협동조합연구소장은 “유엔이 협동조합 활성화를 권고해 왔고, 대내적으로는 생산적 복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윤 극대화에 다 거는 ‘비정한’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싹텄다. 때마침 유엔은 올해를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 저성장 장기화로 일자리 늘리기가 한계에 달하자 협동조합을 돌파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전형수(대구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협동조합학회장은 “조합 운영 중심 원리가 돈(지분)이 아니라 사람(조합원)인 만큼 사회통합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요즘 화두인 경제민주화의 해법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식회사는 지분에 비례해 투표권을 행사한다. 협동조합은 출자금과 관계없이 조합원이 동등한 투표권을 갖는다. 주요 의사결정이 대주주 위주인 주식회사와 달리 조합원들의 합의로 이뤄진다. 주식회사는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지만, 협동조합은 조합원에게 이익이 골고루 돌아가는 것을 지향한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의 이상국 본부장은 “주식회사와 자본 대결을 벌일 순 없을 것이다. 의사결정 속도도 뒤질 것이다. 하지만 조합원 모두 직원이자 사장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브랜드 충성도를 높일 수도 있다. 대리기사에게 조합원 신분증을 발급하고 보험이나 법률 지원을 한다. 대리운전 사고에 불안을 느끼는 수요자도 안심할 수 있다. 김기태 소장은 “투자가 많이 필요하거나 리스크가 큰 사업, 신속한 의사결정이 절실한 사업은 주식회사가 적합하겠지만, 범용 기술이나 노하우를 네트워크의 힘으로 보완할 수 있는 동네 빵집이나 돌봄 서비스는 협동조합이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실조합은 창업 생태계에 부담
협동조합도 돈을 벌어야 존립할 수 있다. 조합 설립 과열은 부실 창업으로 이어져 가뜩이나 포화상태인 생계형 자영업 생태계에 주름살만 키운다. 전형수 회장은 “스페인 몬드라곤처럼 이름난 협동조합 발상지에는 한국 사람들이 시찰을 너무 많이 가서 현지에서는 입장료를 받아야 하겠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다. 핵심 역량 없이 유행처럼 너도나도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부나 지자체의 과도한 지원도 지양해야 한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협동조합 주체들이 정부나 지자체에 의존적이 되면 자생력을 기를 체질이 약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기업처럼 임금 등을 직접 지원하기보다 조합을 위한 법률·마케팅 등 경영 인프라를 구축해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형수 회장은 “더디더라도 멀리 가려면 협동조합 관련 교육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 널리 퍼진 대리운전은 관련 법이 없어 사실상 위법이라고 한다. 정부가 그냥 묵인한다는 것이다. 이상국 본부장은 “협동조합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런 것부터 해결해 주는 것이 순서다. 당장이라도 대리운전 관련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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