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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조국에 돌아와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그해 12월9일 새벽, 나를 실은 [라·말세이에즈]호는 지중해·인도양의 한 달의 항해를 마치고 [요꼬하마](횡빈)에 닿았다.
어느 친구의 대리라는 일본인화가 한 사람이 나를 그 부두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동경으로 들어오자 제일먼저 나는 [후나다 교오지] (박전형이)씨 댁으로 갔다. 전성대 교수이던 이분 댁이 내 연락주소다. 가족들에게서 온 편지며 신문 몇 장이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을 펴들자 초호1호로 찍은 4,5단 대제의 기사가 눈에 띄어 들어왔다. [김소운씨의 비
국민적 망언문제화] [장혁주·김소운 등 반민족 작가 철저 규탄-공보처장담화]-이런 글자들이다.
그것이 누구를 가리킨 의미인지 갑자기는 판단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나는 아연했다.
비국민, 반민족, 이게 나란 말인가-망할 자식들 소견 없는 녀석들 분노가 가슴에 치밀어 오른다. 편지·신문들을 [포키트]에 쑤셔 넣고 나는 황망히 [후나다]씨 댁을 나왔다.
전전 20여 년을 살았던 동경거리 그러나 아무 것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걸으면서도 인도양 위에 선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슬픔으로 변해갔다. 입으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나는 그날의 내 심정을 "여편네를 도적 맞은 놈의 심사, 그렇게나 설명할 것인가"하고, 후일 서울서 온 어느 친구에게 말한 일이 있다.
떠나기 전 내가 지은 동래고교의 교가-. 김동진씨가 작곡을 붙여준 그 노래를 나는 [베니스]에서, [로마]에서, 파리에서 마음이 허술하고 외로울 때면 혼자 불렀다.
우렁차게 노래 부르자 젊은 피에 뛰노는 가슴 양양하다 우리의 앞길 샘솟는 우리의 희망-잊을 소냐 청운의 뜻을 저 하늘에 아로새긴 맹세를 우리들은 조국의 아들 새 역사의 창조자로세 망월대 아래 모인 우리 학우 시련에 이겨서
젊은 학도들의 사기를 고무하려는 가사인데도 웬 까닭인지 이 노래만 부르면 마음이 서러워진다.
그러나 [로마]도 파리도 아닌 동경거리를 거닐면서 그날 나는 백 번도 더 이 노래를 불렀다.
일망무애의 얼음장 위에 혼자 선 것 같은 외로움이 가슴에 서렸다. "어느 원수도 두렵지 않으나 내 가슴속에 엉켜있는 이 비애가 무섭다"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을 기억한다.
부산을 떠나기 2,3개월 전 어느 교포신문에 5,6단 [톱]기사로 [친일작가 장혁주 체포송환?]이란 서슬에 시퍼런 제목을 본 일이 있다.
그후 동경으로 와서 나흘 체류할 사이 그 신문사기자를 우연히 대표부에서 만나 "왜 그런 되지도 않을 기사를 실었소. 누가 체포를 하고 누가 송환을 한단 말이오. 괜히 그런 허장성세만 말고 제2, 제3의 장혁주나 만들지 말라고 하시오."하고 나무란 일이 있다. 그런지 석달이 못 가서 내가 그 [친일작가]와 어깨를 겨누게 될 줄이야-.
그러나 다른 것을 다 용서하고 잊어버린다더라도 [장혁주·김소운]으로 한데 뭉쳐서 걸어낸 이 [공보처장 담화]라는 것만은 용서치 못하리라. 슬픔이 엉킨 가슴에 또 다시 분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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