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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회복|독시회가 주는 몇 가지 가능성|박남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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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우리 시단에는 흔히 볼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이 자작시를 낭독하는 독시회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리사이틀]을 가지는 일과 흡사 하다 고나 할까. 이런 일은 흔히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한 시인이 미술가나 서예가의 협력을 얻어(스스로가 하는 일도 있지만) 자작시의 시화전을 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또 조금도 경이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상식화한 일이란 말이다.
한편 독시회도 한 개인이 자작시를 낭독하는 것이 없었다 뿐이지, 여럿이모여 그런 회합을 가지는 일은 또한 흔히 있는 일이다.
요즘 각급 학교에서 하나의 돌림병처럼 [문학의 밤]이 개최되고 있고 또 수많은 청중이 모여 한밤을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박희진의 개인 독시회가 열리고 보면, 무엇인가 경이로운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단순히 습관상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외국에서는 이런 모임이 가끔 열리는 모양이고 또 외유하고 오는 시우들을 통하여 저명한 시인들의 독시 [테이프]를 들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번 박희진의 개인 독시회의 의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시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 시인들은 [노래하는 시]와 [생각하는 시]를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노래하는 시]보다는 [생각하는 시]라는 것을 우위에 놓고자 무척 애를 써 왔다. 그것은 [이미지즘]의 선언에서 비롯된 시에 있어서의 오도된 음악에 대한 경고를 마치 음악의 배제로 좁게 이해했던 데서 생겼던 억지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시가 언어로 쓰는 것인 이상에는 언어가 가지는 요소를 배제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언어는 소리와 [이미지]와 의미의 세 면을 가지고있는 이상에는 그것들을 십분 구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연히 부질없는 편식증에 걸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편식에 싫증을 일으킨 사람이 박희진 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독시회의 성과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지만, 한 시인이 전례 없는 독시회를 가졌다는 것을 단순한 흥행으로 보고싶지는 않고, 그것은 그가 시에 음악을 새로 세우려는 협력으로 보고싶은 것이다. 언젠가 송욱과 사담에서 있었던 이야기지만, 그가 [하여지경]에서 실험한 것의 하나는 음악성이었노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지만, 역시 의욕 있는 시인들의 빈틈없는 노력의 일단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것을 박희진의 독시회에서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독시회가 단순한 [쇼]로서가 아니라 어떤 신념에서 되는 일이라면 현대시의 고질로 된 난삽성의 해결에도 하나의 도움이 될 듯하고 또 지성위주의 작시태도에서 직관력이나 감성을 탈환하는 일에도 보탬이 될듯하다.
또한 이런 일이 발전함에 따라 시의 청각적 상상력의 회복과 시극에의 가능성도 생겨나지 않을까. 이번 독시회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시에 있어서의 [소리]의 면이 개발되고, 오랜 침체에서의 탈출이 모색된다면 이것은 우리 시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자각 없는 개인 독시회가 좋은 시드를 흥행화 하지나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이런 독시회를 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작시상의 문제들을 새로운 조명 밑에 밝혀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시렁 위에 버려 두었던 [소리]를 다시 시렁에서 끌어 내리고, 그것을 성심껏 매만지고 손때를 먹이는 일은 우리의 시에 또 하나의 매력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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