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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 女論

단체를 해산시킨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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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허정숙, 정종명, 방신영, 김수준…. 그동안 이 칼럼에서 거론된 이 여성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몸담은 단체가 있는데 근우회(槿友會)가 바로 그것이다. 근우회는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효율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결성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여성운동단체였기 때문이다. 1927년 5월 창립되어 1931년 해체될 때까지 근우회는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에 힘쓰고 일제에 대한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근우회와 같은 목적과 이념을 추구했던 신간회가 일제 탄압으로 해소되면서 근우회 역시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또한 근우회는 지도부와 여성대중이 분리되어 있어 대중단체로서의 성격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 현실의 조직 기반을 광범위한 노농(勞農) 여성층에 두지 못한 점, 그리고 단결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에서 비판을 받으며 ‘해소론’이 대두되었다(김추산, ‘조선여성운동의 중대위기’, 삼천리, 1931. 9~10).

 제3대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정칠성(丁七星)은 처음에는 이러한 근우회 해소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1931년 말에는 입장을 바꿔 여성 고유의 해방운동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근우회 해체를 주장했다. 정칠성은 한국 근대 초기 여성운동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지만 이러한 ‘해소론’으로의 전향 과정에서는 비판받을 여지를 가지고 있다. 처음 근우회가 결성될 당시 조선 여성들이 품었던 ‘독자적 성별조직’에 대한 열망을 외면해 버렸기 때문이다.

 열흘 전 한국의 유력한 대통령선거 후보 중 한 명이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며 돌연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오늘 그동안 그와 함께 활동해 왔던 선거캠프의 해단식을 가진다고 하여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관심의 초점은 그가 이 행사에서 그의 후보 사퇴로 ‘멘붕’ 상태가 된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방향타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가 이에 대한 어떤 ‘답’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때 그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선거캠프가 단순히 자신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출마 선언을 했을 때부터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 왔듯 그는 자기 ‘자신’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상’이었다. 그가 대통령감으로 가장 적합해서라기보다 국민들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그를 호출하고 그의 캠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 행보와 발언에서도 이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응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는 명심해야 한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