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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이크」회고록 제3부|23장「열리지 못한 정상회담」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59년 가을에서 다음해 봄에 걸쳐 서방세계 사람들은 동·서간의 냉전에 자그나마 눈에띄게 해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캠프·데이비드」회담에서 서방측 군대의「베를린」주둔에 대해「흐르시초프」가 위협을 제거하기로 한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래서 1960년 5월중순에「파리」에서 4개국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그 정상회담은 끝내 열리지도 못하고 만 것이었지만-.
1960년 5월1일 하오「굿패스터」장군이 전화를 해왔다.『우리 정찰기 한대가 토이기의「애다나」기지에서 출발한지 오래되어 실종된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것이 U-2기의 하나고 소련상공을 날아오던 것이라고 알아챘었다.
다음날 아침 군무실에 그가 들어서자『대통령각하 CIA에서 어제 말씀드렸던 U-2기가 아직도 실종중이라고 보고를 해왔습니다. 조종사가 소련영내 1천3백「마일」지점 상공에서 「엔진」화재를 보고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U-2기에 의한 정찰계획은 필요에 의해 마련된 계획이다. 소련에 대한 정확한 제보의 필요성이 제기됐을 때「안렌·덜레스」(당시 CIA장관) 는 고공정찰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비행기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54년 11윌에「포스터·덜레스」(국무장관)와「찰리·윌슨」(국방장관)그리고 「알렌·덜레스」가 내게와서 3천5백만「달러」를 들여 30대의 상공정찰기를 제작하겠다고 승인을 요청해와 내가 결재를 해준 것이 U-2기 계획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정보가 누설되는 날이면 계획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은 극비속에 진행했다. 백악관 내에서도 보좌관 3명만이 알고 있었고 국무장관·국방장관·합동참모본부의장·중앙정보국장관과 그의 보좌관 한명으로 구성된 특별자문기구가 이를 전달했었다.
이렇게 해서 U-2기의 정찰비행은 1956년부터 시작을 본 것이다. 그러나 급속도로 발달되는「레이더」와 대공「로이트」로 비행의 위험성이 높아졌고 만일에 격추되는 경우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좌관들은 그렇케 되더라도 그것에서 비롯된 결과를 낙관하는 듯했다.
『만일에 소련이 그 비행기를 격추한다해도 절대로 공개적인 인정을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몇햇동안 우리가 그런 비행을 계속해 왔는데도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되니까요』「덜레스」국무장관이 한 말이다. 그때 만해도 몇 차례인가 소련의 전투기들이 U-2기를 쫓아 올라왔지만 끝내 손도 못 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동안의 비행으로 얻어진 정보도 엄청나게 귀중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바로 5윌2일 아침「굿패스터」장군이 비극적인 보고를 해왔을 때 역력히 기억에 떠올랐었다.
조종사의 연명도 걱정이 되었지만 소련의 반응이 더욱 염려됐다.
이틀 후 우주당국의 기상관측기 한대가 실종했다는 내용의 간단한 성명을 냈다.
그러자 5일에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있는 동안에 소련의 반응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회의벽두에「알렌·덜레스」가 소련방 최고회의에서 한「흐루시초프」의 보고연설의 첫 부분을 보고했고, 계속되는 나머지 중요 연설내용도 곧 인수된다고 했다.
비밀「텔리타이프} 로 들어온 그 나머지 부분 보고 내용이 바로 소련영토 깊숙이 들어온 미국의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밝힌「흐루시초프」의 발표였다.
이제 당면한 것은 어떻게 사건의 뒤처리를 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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