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가을에서 다음해 봄에 걸쳐 서방세계 사람들은 동·서간의 냉전에 자그나마 눈에띄게 해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캠프·데이비드」회담에서 서방측 군대의「베를린」주둔에 대해「흐르시초프」가 위협을 제거하기로 한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래서 1960년 5월중순에「파리」에서 4개국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그 정상회담은 끝내 열리지도 못하고 만 것이었지만-.
1960년 5월1일 하오「굿패스터」장군이 전화를 해왔다.『우리 정찰기 한대가 토이기의「애다나」기지에서 출발한지 오래되어 실종된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것이 U-2기의 하나고 소련상공을 날아오던 것이라고 알아챘었다.
다음날 아침 군무실에 그가 들어서자『대통령각하 CIA에서 어제 말씀드렸던 U-2기가 아직도 실종중이라고 보고를 해왔습니다. 조종사가 소련영내 1천3백「마일」지점 상공에서 「엔진」화재를 보고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U-2기에 의한 정찰계획은 필요에 의해 마련된 계획이다. 소련에 대한 정확한 제보의 필요성이 제기됐을 때「안렌·덜레스」(당시 CIA장관) 는 고공정찰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비행기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54년 11윌에「포스터·덜레스」(국무장관)와「찰리·윌슨」(국방장관)그리고 「알렌·덜레스」가 내게와서 3천5백만「달러」를 들여 30대의 상공정찰기를 제작하겠다고 승인을 요청해와 내가 결재를 해준 것이 U-2기 계획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정보가 누설되는 날이면 계획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은 극비속에 진행했다. 백악관 내에서도 보좌관 3명만이 알고 있었고 국무장관·국방장관·합동참모본부의장·중앙정보국장관과 그의 보좌관 한명으로 구성된 특별자문기구가 이를 전달했었다.
이렇게 해서 U-2기의 정찰비행은 1956년부터 시작을 본 것이다. 그러나 급속도로 발달되는「레이더」와 대공「로이트」로 비행의 위험성이 높아졌고 만일에 격추되는 경우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좌관들은 그렇케 되더라도 그것에서 비롯된 결과를 낙관하는 듯했다.
『만일에 소련이 그 비행기를 격추한다해도 절대로 공개적인 인정을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몇햇동안 우리가 그런 비행을 계속해 왔는데도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되니까요』「덜레스」국무장관이 한 말이다. 그때 만해도 몇 차례인가 소련의 전투기들이 U-2기를 쫓아 올라왔지만 끝내 손도 못 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 동안의 비행으로 얻어진 정보도 엄청나게 귀중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바로 5윌2일 아침「굿패스터」장군이 비극적인 보고를 해왔을 때 역력히 기억에 떠올랐었다.
조종사의 연명도 걱정이 되었지만 소련의 반응이 더욱 염려됐다.
이틀 후 우주당국의 기상관측기 한대가 실종했다는 내용의 간단한 성명을 냈다.
그러자 5일에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있는 동안에 소련의 반응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회의벽두에「알렌·덜레스」가 소련방 최고회의에서 한「흐루시초프」의 보고연설의 첫 부분을 보고했고, 계속되는 나머지 중요 연설내용도 곧 인수된다고 했다.
비밀「텔리타이프} 로 들어온 그 나머지 부분 보고 내용이 바로 소련영토 깊숙이 들어온 미국의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밝힌「흐루시초프」의 발표였다.
이제 당면한 것은 어떻게 사건의 뒤처리를 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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