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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선택(1)-말썽난 섬 금문·마조|고독한 선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958년 8월초「레바논」문제가「유엔」에서 토의되고 있을 때 공산측은 새로운 도발적인 행동을 일으켜 중국대륙연안의 섬들인 금문도와 마조도에 대한 무력행동을 증가시켰다.
중공이 이 섬들을 점거할는지 모른다는 확실한 보고는 정보계통을 통해 8월6일에 나에게제출되었고, 그로부터 현지에선 긴장이 심해갔다. 또 그 정보는「흐루시초프」가「유엔」안전보장 이사회가 마련한 정상회담에 참가를 거부한 바로, 다음날 들어온 것이었고 그가 중공방문을 마친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 한층 억측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흐루시초프」가 자유세계를 괴롭히고 분열시키기 위해서는 구실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이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소련의 핵공격력의 증가를 고려해서 그곳에서의 대규모의 충돌이 재래식무기의 사용에만 그칠 가능성이 적은 듯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장개석 총통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금문·마조도에 병력을 증가시켰고, 1958년에는 전병력의 3분의1인 10만의 대군이 그 섬에 집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공격을 가해오든 맹방인 자유중국울 지원해야만 한다는 것은 발전되는 상황에 따라 점점 뚜렷해 졌다. 만일 미국이 개입을 꺼린다고 중공이 인식만하면 금문도와 또 아마도 마조도에까지 중공은 상륙전을 감행할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또 그들이 우리의 결의를 알았을 때 전면적인 공격을 삼가고 적어도 소극적인 작전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로서는 금문도의 방위를 위해 주요군사력을 동원하여 개입하는 이상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자유세계의 신임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널리 퍼져있는 위치로부터 적의 폭격기들이 대만과 팽호열도 그리고 연안의 섬들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적의 비행들에 대해 소형원자무기를 사용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도 잘 인식했었다.
이 광대한 지형적 이점은 재래식 무기로 타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굉장히 곤란한이상 우리의 절대적인 힘에 의해 분쇄할 수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형이라 할지라도 원자폭탄의 사용은 세계적인 반응을 초래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용가능성만은 인정할 뿐 시급한 결정이 필요없었고 또 당장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해도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 초래될 정치적인 비극에 비하면 미국의 결정적이고도 성공적인 행동에 대한 세계여론의 결과도 훨씬 덜 할 것이라고 느꼈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해 결정적인 필요외의 분쟁확대는 피할 것을 결심했다.
결의를 표시하는 태도의 표시를 둘러싼 이견과 장총통의 불만끝에 8월23일 하원외교위원장 앞으로의 회한을 공개하던 날, 중공은 2만발의 포탄을 연안의 섬들에 퍼부었다. 그리고 하루에 평균 8천발씩 계속 포격, 군시설은 상관없었지만 병력과 일반민에 적지않은 사상자를 내게했다.
중공기 출격수가 늘고 봉쇄작전 때문에 자유중국은 2주일 동안이나 보급을 할 수가 없게됐다. 나는 제한된 지원작전 명령을 내려 미7함대는 즉각 개입할 위치에 이동케 했다. 함대의 항공모함이 4척으로 증가되고 임전준비명령이 인접지역의 모든 미국군에 하달되었다.
「버크」제독의 건의에 따라 7함대가 자유중국보급선대의 호송을 맡게 되었지만 미국함정들은 해변 3「마일」밖 국제해역에 남아 있도록 했다.
중공의 맹렬한 포격이 시작된지 며칠후 장총통으로부터 더 확고한 보장과 적극적인 미군의 개입을 요청하는 서한을 받았지만 7함대의 전투능력의 평가에 대해 그와 의견을 같이할수 없었고 미국의 작전태세에 나는 불만을 느끼질 않았다.
그러자 9월6일에 중공의 주수상이 7월28일의 우리제안을 받아들여 파란의「바르샤바」대사급회담에 응할 용의를 표시해 온 것이다.
대만방위의 결의와 또 동시에 협상에 응할 용의를 갖춘 우리의 입장을 둘러싼 자유중국의반발과 또 몇차례의 성명이 나가는 동안, 자유중국 해군의 성공적인 작전이 위기를 해소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9월 한달은 거의 매일 이 작은 군사작전의 진행상황을 지켜보아야만 할 것이다.
10월5일 중공이 포격에 의한 금문도 공략의 실패를 자인한 끝에 1주일 동안의 포격중지를공언, 12일에는 2주일을 또 연기한다고 했다. 비록 일시적인 휴전이긴 했지만 우리의 입장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 급격히 높아졌고, 그후「덜레스」국방장관을 장총통과의 사후협의를 위해 대만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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