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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돌아와서- ⑤|김소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봄철 되면 신문광고에 희한한 글자들이 눈에 띈다.- 화견절힐 변당특별조제- 애국자들이라 곧 죽어도 한글로 쓰는데 하느님 맙소사! 이게[화견절힐 변당특별조제]란 광고이다-』
수필집「희망은 아직 버릴 수 없다」(P226)에서 인용한 한 구절이다.
이글 속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대구달성공원에 시비 하나를 세운다는 빙자로 나는 자주 서울길을 드나들었다. 전등도 유리도 없는 3등차간에「스팀」이 있을 까닭이 없다. 속옷을 겹으로 입고도 삼동에 밤차를 타고 경부선으로 내왕하는 것은 약간치 않은 고행이다.
그런 차간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잠결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차는 어느 역에 닿았는데 창밖은 아직도 캄캄하다.
「에- 벤또- 에- 벤또」「오짜- 오짜-」
캄캄한데도「플랫폼」을 부산하게 오가는「다찌우리 (입매)」들소리- 어느새 내가 일본을 왔단 말인가-. 일순 나는 그런 착각을 느끼면서 중단된 기억을 더듬었다.
일본이 아니라 거기는 대구역이었다. 그러나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할길 없는「일본」이다. 그렇게 착각하도록 그「다찌우리」들의 목소리는 해방전과 똑같았다.「에-」하고 목을 빼는 어조며 어투까지가-. 이런 예를 들려면 한정이 없다. 이제 그만해 두기로 하자.
이토록 민중의 생활속에 침윤해 있는「왜색」이「포스타」의「슬로건」하나로「일소」해 진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미친 녀석이다. 하계휴가나 동계방학으로 귀성하는 청년학도들의 협력을 빌어서 단발적으로 문제있는 가게들을 가가호호 방문을 해보면 어떨까- 물론 거기도 돈이 있어야 할 일이지마는, 국회의원 낙선후보자 한사람의 선거비용쯤 되는 액수로도 서울·대구·부산을 위시한 지방도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으리라-, 누구에게 부탁 받은 노릇은 아니건마는 나딴에는 이런 저런 궁리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의견을 말로나 글로 제의해온 것은 물론이다. 6·25사변이 일어난 바로 그해 봄, 서울에 돌아왔다가 그 당시 서울신문 문화부장이던 김송씨에게 글하나의 청탁을 받았다.
「일요수상」에다 3, 4 단의 수필을 쓰라는 것이다. 나는 약속한 날짜를 어기지 않고 그 원고를 서울신문 문화부에 전했다.
일제시대에 민족의식의 표징이라고 해서 학교교정들에서 무궁화를 잘라간 그 보복으로 그 당시 경향각지에서「사꾸라」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동래서 내가 살던 집 앞에「야에자구라」(팔중앵)의 고목 한 그루가 있어 봄철에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가지를 꺾어서 선물하는 것이 우리 식구들의 즐거운 행사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사한 뒤 그 집을 차지한 어느 고아원의 경영자는 이사온 제일착으로 그「사꾸라」를 뿌리만 남겨두고 톱으로 켜서 넘어 뜨렸다. 그 톱으로 켠 자국을 우연한 기회에 내 눈으로 본 이후로 다시 두번 나는 그 집에를 가지 못했다.
애국자는 비단 그 고아원장 하나만이 아니었다. 국내의「사꾸라」란「사꾸라」가 씨가 마를 정도로 여기저기서「사꾸라」벌채의 소문들이 들려왔다. 서울신문에서 원고청탁을 받은 바로 3, 4일전, 창경원 야앵구경꾼 20만명이 입장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커다랗게 났었다. 「사꾸라」한 그루 넘어 뜨리면 속성애국자가 되는 판인데 같은「사꾸라」가 구왕궁의 뜰에 피면 20만명이 하룻밤에 모여든다니 이게 무슨 희화인가. 내가 쓴 일요수상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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