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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촛불 ‘참혹 동화’ 속 복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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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규연
논설위원

아홉 평 집터에는 타다 남은 나무기둥들이 을씨년스럽게 꽂혀 있었다. 찬바람이 과자봉지와 천 조각 등을 날려보내며 죽음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전남 고흥의 한 조손(祖孫)가정에서 화재참사가 일어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촛불을 켜고 잠자다 여섯 살 소년과 예순의 할머니가 숨지고 할아버지도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소년·할머니의 유골은 인근 야산에 매장된 상태였다.

 지역 경찰관에게 화재 당시의 기막힌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촛불은 새벽녘 일어나 요강을 찾는 소년을 위해 할머니가 켜 놓은 것이었다. 그 작은 불꽃이 낡은 벽지를 타고 방안 전체로 번져나갔다. 불똥이 얼굴에 떨어지면서 화상을 입고 뛰쳐나온 할아버지는 곧바로 구조신고를 할 수 없었다. 궁핍한 여건 때문에 휴대전화는 없고 집 전화 역시 수신 전용선이었다. 할아버지는 뺑소니 사고로 두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이런 다리를 끌고 몸통으로 기어가며 인근 5촌집에 가 구조를 요청했지만 운명은 이미 정해진 시점이었다. 구호 사각지대에 놓인 극빈층의 ‘참혹 동화’였다.

 가난-가정 해체-심신박약-자활의지 상실…. 소년의 가정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재혼하자 할아버지는 소년을 외손자가 아닌, 아들로 호적에 올려 양육해왔다. 교통사고로 근로능력을 잃은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안방에 자리를 깔았다. 공장에서 일하던 할머니 역시 정신이 혼미해져 일자리를 잃었다. 집안에서 술에 의존해 사는 두 노인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흥 참사는 숱한 ‘복지 퍼즐’을 던져준다. 긴급 에너지공급 서비스만도 그렇다. 한전은 2005년 이후 요금이 밀렸더라도 극빈층 가정의 전기를 함부로 끊지는 않는다. 전력공급제한기를 달아 최소한의 전기는 공급한다. 소년의 집도 그랬다. 그런데도 할아버지·할머니는 왜 공짜인 제한전력을 마다하고 개당 500원 하는 촛불을 사서 쓰다가 변을 당했을까. 할아버지는 “한전이 전기 사용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전은 “매뉴얼대로 설명해줬다”고 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일까. 취재 결과는 ‘둘 다 참일 수 있다’였다. 소년의 집을 방문한 한전 검침원은 전력제한기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그 방식대로 직접 TV까지 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후 전기밥솥을 연결했을 때 전기가 나가고 말았다. 이에 할아버지·할머니는 전기를 못 쓰게 됐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에러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전기밥솥에 전기는 왜 나간 걸까. 전력제한기의 순간 한도는 220W다. 형광등 2개, 25인치 TV 1대, 미니냉장고 1대를 동시에 쓰는 수준이다. 전력소모량이 큰 전기밥솥이나 전기장판은 감당하기 어렵다. 전자제품의 전력소모량이 커지는 추세지만 2005년에 정한 한도는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다. 220W라면 신형 냉장고 한 대를 감당할 수준에 불과하다. 한전 광주·전남지역본부 김상언 차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도가 낮다는 생각이 들어 관련 문제점을 본사에 보고했다”고 했다.

 지방정부가 전기제한 조치를 당한 극빈층에게 50만원 한도에서 체납전기료를 지원해 주는 제도도 있지만 소년의 가정은 혜택을 받지 못했다. 반년 동안 고작 15만원을 체납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는 지방정부와 한전 간의 정보 불통 때문이었다. 한전에서 전기료가 밀린 사람들에게 전력제한조치를 해도 이 명단이 자동 통보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방정부에서는 곧바로 긴급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실제로 고흥군 이은영 복지지원팀장은 “지난달 도에서 내려온 전력제한 가정명단에 소년의 가정은 빠져 있었다”고 했다.

 고흥 사건은 복지의 우선순위와 기본원칙을 돌아보게 한다. “죽고 나면 복지는 필요가 없는 만큼 복지의 근본은 생명존중”(박준영 전남도지사의 지시내용)이라는 언급처럼 인명구호·구휼이 역시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계층적으로 극빈층, 연령대로는 아동 등을 우선 지원순위에 두어야 한다. 복지 신설에 앞서 기존 제도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복지는 알코올의존증 노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더 친절해져야 한다. 시대에 맞게 기준을 조정하는 유연함도 지녀야 한다. 여러 기관이 정보를 나누며 촘촘한 복지망을 짜야 한다.

불과 사흘이지만 촛불 참사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숱한 복지 구멍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이 심층 연구한다면 복지현장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고흥발 베버리지 보고서’가 만들어질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