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중로든, 응봉산이든 꽃은 사람과 만나야… 행복 피워 전염시키니까

    윤중로든, 응봉산이든 꽃은 사람과 만나야… 행복 피워 전염시키니까

     ━  [SUNDAY 인터뷰] 『대한민국 꽃 여행 가이드』 낸 황정희 작가   경기도 강화 고려산에 흐드러진 진달래. 이달, 4월에 절정을 이룬다.[사진 황정희] 화신풍(花信風). 꽃이 핀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바람이 불었다. 투화풍(妬花風). 꽃을 시샘하는 바람도 불었다. 꽃은 흙 속에서, 가지 끝에서 미처 꽃이지 못한 배아(胚芽) 상태에서 얕은 숨을 쉬며 남몰래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용케 봄인 줄 알고 피어났다. 이렇게 다른 세상과의 만남은 진득함 속에 이뤄진다.    황정희(55) 여행작가도 진득하게 이 봄을 열어주는 책을 준비해왔다. 여행작가로 나선 지 18년 만이고, 본격적으로 책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지 7년 만이다.『대한민국 꽃 여행 가이드』(중앙북스)는 30종의 꽃과 그 꽃을 자랑하는 나들이 명소 60곳을 564페이지에 풍성하게 피웠다. 지난 4일, 황 작가를 서울 응봉산에서 만났다. 그는 책 속의 꽃들을 찍은 카메라를 든 채, 화신풍 속 흔들리는 개나리와 마주했다.    윤중로에 몰리는 이유? 벚꽃 아찔해서죠 서울 성동구 응봉산에서 만발한 개나리를 배경으로 산 꼭대기를 응시하고 있는 황정희 작가. 정준희 기자 송나라의 주휘(周煇, 1126~1198)가 화신풍을 일컬어 지난 겨울의 소한(1월 5일)에서부터 곡우(4월 20일)까지 120일간 닷새 간격으로 솔솔 불어대는 바람이라고 했으나, 따뜻한 중국 강남을 두고 한 말이니 우리 상황과 동떨어져 있을 테다. 그래서 화신풍은 꽃 필 때 부는 바람이라고 말하는 이도 더러 있다.    여하튼 화신풍 속 매화가 이미 피었고, 9일부터 3년 만에 개방하는 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길은 이번 주에 절정을 이룬다. 벚꽃은 우리가 좋아하는 꽃 2위(2019년 갤럽 조사)다. 왜 우리는 교통지옥일 줄 알면서도 경남 진해, 윤중로로 향하는가. 황 작가는 “매화는 우리나라 일부, 남쪽에 나는 반면 벚꽃은 남쪽 제주도에서부터 북쪽 강원도까지 두루 나는 전국구 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경쾌함과 볼에 스민 색조 같은 연분홍 화사함, 치렁치렁한 풍성함이 자아내는 매력은 아찔할 정도”라고 밝혔다. 전남 광양 매화매을의 홍매화. 황정희 작가는 매화를 책 가장 앞에 매화를 넣었다. [사진 황정희] 3월의 꽃 벚꽃. 황정희 작가는 경남 창원 진해, 강원도 강릉 경포호, 경남 하동 십리벚꽃길, 서울 윤중로(사진)·남산둘레길·양재천·서울숲·워커힐산책로를 벚꽃 여행지로 꼽았다. 단일 꽃으로는 가장 많은 여행지다. [사진 황정희] 충남 서산 개심사의 겹벚꽃. 겹복꽃은 4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5월 초에 절정에 달한다. [사진 황정희] 이곳 응봉산에 피는 개나리에 대해 황 작가는 “소박하고도 순박한 웃음을 피우는 꽃”이라고 설명했다. 친구끼리 온 50대 아줌마들도, 혼자 셀카를 찍는 40대 아저씨도, 수업 끝난 뒤 찾아온 대학생들도 개나리 웃음을 피우고 있었다. 황 작가도 웃으며 “꽃은 땅이 아니라 마음 속에 피는데,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말했다.   꽃은 마음속에 핀다니. “서울에 이런 개나리 숲이 있다. 올라와서, 아니면 몇 발자국 떨어져서 봐도 좋다. 꽃은 시간이 돼서, 자연 순리에 따라, 제 몸을 보여준다. 꽃이 술렁이면 사람도 술렁인다. 착한 전염이고, 유쾌한 중독이다. 제 몸 피우는 것을 넘어 행복을 피운다. 사진기자도 말하지 않았나. 데이트 오고 싶다고(웃음). 그게 바로 행복이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전북 고창 문수사 단풍을 보러 온 할머니 두 분이 “너무 잘 봤습니다”라며 절을 했다. 지팡이에 의지하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행복을 좀 더 쥐고 싶은 가냘픈 한숨도 작가는 감지한다. 꽃이 내뿜는 강한 전염력은, 삶에의 의지로도 발현되는 것이다. 설악산 천불동계곡의 단풍. 단풍은 10월의 꽃이다. [사진 황정희] 한라산 상고대. 수증기가 나무에 들러붙어 꽃을 만들었다. 황정희 작가는 1월의 꽃으로 '눈꽃'을 꼽으며 한라산을 그 여행지로 내세웠다.[사진 황정희] 그런데 단풍이 꽃인가. 황 작가는 다시 강조했다. “꽃은 마음속에 핀다”고. 물리적으로 꽃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꽃이라는 말이다. 책에는 보통 알고 있는 꽃과는 거리가 있을법한 억새·갈대도 언급한다. 더더욱 식물학적으로는 꽃이 아닌 눈꽃도 다룬다. 작가는 눈꽃을 ‘겨울의 선물’로 제목 지었다. 산수국의 경우에는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제목을 붙였다.  제주 사려니숲에 핀 7월의 꽃 산수국. 산수국에 대해 황정희 작가는 '알쏭달쏭,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책에 적고 있다. 자라는 땅에 따라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 황정희] 30종의 꽃마다 제목을 달았다.   “산수국은 자라는 토양에 따라 꽃 색이 달라지니, 사람도 자라는 토대가 어떤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나. 꽃은 관심을 갖고 보면 특징을 드러내고, 글과 제목도 안겨준다.”   황 작가는 돌변도 아니고 ‘격변’해서 꽃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좀 산다고 싶었는데, 외환위기 때 남편 사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요즘처럼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없어서’ 제주로 내려갔다. 연고도 없었다. 기울어진 형편을 조금이라도 세우려고 나섰다. 디자인회사에서 잡지 만드는 일을 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여행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기획, 취재, 기사 작성, 교열까지 도맡았다. 황정희 작가는 20여 년 전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가 그곳에서 여행작가로 나섰다. 제주 가시리 녹산로는 유채꽃과 벚꽃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여행지다. [사진 황정희] 전남 담양 명옥헌월림 배롱나무. 배롱나무꽃은 8월의 꽃이다. 남쪽에서는 잘 자라지만 중부지방에서는 꽃이 약판 편이다. [사진 황정희]   동백·매화·해국, 험난함 이겨내 애착   제주에서 꽃을 만났나. “오름 수십 곳에 올랐다. 어디선가 오는 허기를 달래줄 무엇인가를 찾았던 것 같다. 꽃이 눈에 들어왔다. 대중에게 꽃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남 완도 청산도의 유채꽃은 4월의 꽃이다. 꽃이 진 뒤 길게 맺힌 열매 안의 씨앗을 짜서 기름을 얻는다. [사진 황정희] 꽃무릇 여행지로는 전남 영광 불갑사(사진)와 전북 고창 선운사가 손꼽힌다. 황정희 작가는 '남부에서 9월 10일경부터 피기 시작, 9월 20일경이 절정'이라며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황정희]   충남 서산 유기방가옥의 수선화는 4월에 절정을 이룬다. 추사 김정희는 이곳에 대해 '노란 구름이 질펀하게 깔렸다'고 표현했다. [사진 황정희] 책 제목에 ‘가이드’를 붙였다. ‘이 책을 보는 법’이라는 안내까지 곁들일 정도로 방대하다. 30종의 꽃을 계절별로, 다시 월별로 나눴다. 어른과 함께, 아이와 함께 등 테마별로 엮기도 했다. 책은 이름 유래, 도감, 주변 관광지, 먹을거리, 포토 포인트까지 촘촘히 드러낸다. 이 꽃들을 관통하는 줄기는 여행이다.     꽃 여행 책이라면 보통 그 무대가 산이나 사찰 쪽일 텐데 꽃 박람회도 언급했다. “꽃은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야생화가 매력이 있지만, 전문적 분야에 상당히 기울어 있다. 고려산·선운사이든, 윤중로·튤립박람회든 꽃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은 꽃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서로 행복해진다. 대중적인 여행지와 꽃을 보는 시선을 연결해서 책을 내고 싶었다. 나는 대중적 작가다.”   여행 중에 사람들에게 꽃에 대해 알려줄 때도 있을 텐데. “물론 있지만 길어도 딱 1분만. 설명은 길면 안 된다. 기껏 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인데, 지나친 설명은 그 의욕을 되레 꺾을 수 있다.” 『대한민국 꽃 여행 가이드』 표지. 경남 창원 진해의 벚꽃축제 장면이다. 화정희 작가는 출판사와 표지 선정을 두고 '가장 화사한 것으로 하자'고 협의했다고 한다. [사진 중앙북스]   책의 출간일은 공교롭게도 4월 5일, 식목일이다. 책 표지에는 경남 창원 진해 벚꽃의 화려함이 묻어난다. 벚꽃 밑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그 기차는 벚꽃을 두드러지게 하려는지, 무엇인가 가리려는지 궁금하게도 윗부분만 보인다.   식목일에 책을 내고, 책 표지에 기차를 살짝만 보이게 한 건 의도가 있나. “의도야 있지만, 영업비밀(웃음).”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계절은 봄부터 시작하는 걸까. 책도 3월, 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다. 황 작가는 “사람들은 보통 봄에야 꽃 소식을 접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라면서도 “꽃은 사실 겨울에도 복수초·동백 등이 피고, 심지어 눈꽃까지 있다. 꽃은 1년 내내 핀다”고 밝혔다.  2월의 꽃 동백. 황정희 작가는 경남 거제 지심도를 동백 여행지로 꼽았다. [사진 황정희]   애착이 가는 꽃은 따로 있을까. 황 작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굳이 뽑으라면 겨울을 뚫고 나온 동백과 매화, 그리고 바닷가 바위틈에 피는 해국”이라고 밝혔다. 험난함을 이기고 세상과 만나는 꽃들이다. 자신을 꽃으로 이끌게 한 20여 년 전의 험난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암해변 해국. 10월에 바위틈을 뚫고 나오는 해국은 황정희 작가가 애착이 가는 꽃이라고 꼽았다. [사진 황희정 중앙북스] 3월의 꽃 개나리가 4월의 바람에 4개의 꽃잎을 흔든다. 꽃들은 예년보다 1주일 늦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투화풍 불자 대청 밑에 한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늦게 왔지만, 봄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상촌 신흠(1566~1628)은 “천지만물 가운데 봄이 으뜸이다”라고 했다. 화신풍이 슬금슬금 가벼워진 소매 안으로 불어온다. 처마 끝 목련이 흔들린다. 나태주 시인이 그랬던가. ‘봄이다, 살아보자’고. 꽃이다, 살아보자. 김홍준기자rimrim@joongang.co.kr

    2022.04.09 00:02

  • 무조건 버리는 게 최선 아니다, 채우기 위해 비워야 행복

    무조건 버리는 게 최선 아니다, 채우기 위해 비워야 행복

     ━  [SUNDAY 인터뷰] ‘미니멀리스트’ 이혜림 작가   방 안 깊숙한 곳까지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요즘, 실내 구석구석 쌓아둔 물건들이 버겁게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무겁고, 삶의 속도 또한 축축 늘어지는 게 다 이 짐 덩어리들의 무게 때문인 것만 같다. 대청소를 시작하지만 ‘언젠가 쓸 것 같아’ ‘추억이 담겨 있어’ 결국 버리지 못하고 주워 담는 스스로의 미련함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또 어떤가. 다 버리고 심플하게 다시 시작할 좋은 방법은 없을까. 10년차 미니멀리스트이자 최근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를 낸 저자 이혜림 작가를 만난 이유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갑자기 무너졌다. 행거에 걸려 있던 옷가지들이 모두 앞으로 쏟아졌고, 그때 처음으로 내가 가진 옷의 무게를 느꼈다.” 하루 평균 1만 명의 독자들이 찾는 블로그 운영자이자, ‘브런치’ 시작 3개월 만에 30만 조회를 기록한 이혜림(34) 작가가 대학교 4학년 때인 10년 전 실제로 경험한 일이다.   이 작가는 당시 자타공인 맥시멀리스트였다. “하루라도 같은 옷을 입고 강의실에 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늘 새로운 옷과 액세서리를 샀어요.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해서 읽지 못한 책들이 집에 잔뜩 쌓여있었지만 계속 새 책을 샀죠. 그러다 진짜 행거가 무너지고 정신이 번쩍 났어요.”   단순하게 살기의 목적은 ‘행복하기’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해온 10년차 미니멀리스트이자 파워블로거, 책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의 저자이기도 한 이혜림 작가. 맥시멀리스트에서 초극단의 미니멀리스트까지 모두 경험한 그는 ‘채우기 위해 비우는’ 건강한 미니멀리즘을 제안했다. 전민규 기자 무언가 변해야 할 타이밍에 일본 작가 사사키 후미오의 책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표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 가득한 원룸 한쪽 방에 다른 가구는 일체 없이 새하얀 이부자리만 펼쳐져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졌다. 텅 비어 있는 방, 빈 벽과 여백이 가득한 저런 공간에서 살게 된다면 물건에 얽매이지 않고 늘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 작가는 극한까지 물건을 버리고 비워냈다. “방안에 전신거울 하나, 작은 스탠드 하나, 4단 서랍장 하나, 이부자리 한 채만 남기고 모든 걸 다 정리했어요. 옷과 신발도 다 처분하고 ‘단벌신사’가 됐죠.”   그런데 극단의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도 잠시, 허무함과 우울함이 밀려왔다. “2~3개월 만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니고 있던 물건 개수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그동안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너무 지쳤고, 물건을 살 때마다 극심한 자기검열을 겪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단벌신사’를 실천하겠다고 매일 같은 옷을 입다보니 누구를 만나는 일도 싫어지고 무기력해졌어요. 사사키 후미오처럼 쿠션 하나 없이 벽에 기대 책을 읽는 게 실제로는 정말 힘들더라고요. 이건 정답이 아니었구나 깨달았죠.”   이 작가는 자신만의 미니멀 라이프를 찾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왜 물건을 줄이고 단순하게 살고 싶었나, 나 자신에게 물었더니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라는 답이 나오더군요. 텅 빈 방을 만들기 전, 무엇을 비울까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까를 물어야 했고, 어떻게 비울까가 아니라 어떻게 남길까를 고민했어야 했어요.”   이 작가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고민하며 텅 빈 방과 텅 빈 인생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정말 좋아하는 한 가지를 잘 쓰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안사고, 그렇게 돈과 공간을 절약하면서 ‘채우기 위해 비우는’ 자신만의 건강한 미니멀 라이프를 만들어갔다.   5년 전 결혼할 때 이 작가의 어머니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다들 그렇게 살아”였다. 그때마다 이 작가는 “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 거야”라고 답했다. 둘 다 간호사인 한 살 터울의 부부는 결혼식도 스몰웨딩으로 치르고, 9평 원룸에서 단출하게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사실 부부의 미니멀 라이프 노하우는 결혼 후 2년 만에 직장까지 그만두고 떠난 1년간의 세계여행에서 얻은 게 많다. 언제 어디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면서 자유롭게 사는 인생을 꿈꿨던 부부는 자신들이 가진 모든 짐을 캐리어 하나에 몽땅 넣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1년 후 돌아올 집을 위해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았다. 살림살이와 가구를 몽땅 팔고나니 여행에 지고 갈 7㎏ 짜리 배낭 두 개, 친정집에 맡겨둘 리빙 박스 두 개, 캐리어 두 개, 컴퓨터와 침구세트만 남았다. “우린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여행을 선택했고, 행복한 인생에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결국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하는지가 중요한 거죠. 7㎏ 배낭 하나만으로 1년 간 충분히 행복했고, 앞으로도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비워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다들 그렇게 살아도 나는 이렇게 산다   두 사람의 집엔 지금도 전자레인지·텔레비전·식기세척기·제습기·공기청정기·정수기 등의 가전제품이 없다. “남편은 여름에는 검정 반팔 티셔츠 다섯 장, 겨울에는 검정 긴팔 티셔츠 세 장을 번갈아 입으며 지내요. 덕분에 옷장과 신발장에 여유가 생겼고 넉넉해진 용돈으로 재테크를 시작했다고 좋아해요.”   이 작가 역시 1년 간 옷과 신발을 사지 않는 ‘노쇼핑’에 도전한 바 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사고 싶은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지금까지 정말 필요해서 쇼핑을 한 게 아니라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구매를 했던 거죠. 물론 극단적인 ‘노쇼핑’을 죽을 때까지 할 순 없어요. 하지만 일정기간 간헐적으로 ‘과연 내가 ○○없이 살 수 있을까’ 도전해보는 건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알면 버리고 남길 기준이 생기니까요. 일종의 습관의 재정비 시간을 갖는 거죠.”  요즘 이 작가의 옷장 속에는 총 서른 벌의 옷이 있다. 평소 원피스만 입기 때문에 겨울 원피스 두 개, 여름 원피스 두 개, 사계절 입을 수 있는 소재의 원피스가 서너 개. 그리고 카디건·코트·패딩점퍼·주말농장 룩(바지&스웨트 셔츠)·티셔츠 하나 등이 있다.   이 작가는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 뒤, 줄이는 일은 꼭 물건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과다한 지출, 과한 업무, 복잡한 인간관계, 과식, 좋지 못한 습관이나 마음가짐일 수도 있죠. 지금 이 순간 이게 내게 꼭 필요한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가 고민하면서 취사선택하는 것. 이게 미니멀 라이프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가는 10년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면서 제로웨이스트 운동, 선택적 채식주의를 시작했다. 비워낸 자리를 건강한 것으로 채우자 결심하면서 주변 모든 것이 선순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고, 처음부터 버릴 일 없도록 지구에 무해한 삶을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수단이 돼야지 목적이 돼선 안 돼요. 무조건 버리고 비워서 텅 빈 공간을 만드는 게 최선은 아니거든요. 제가 바라는 ‘건강한 미니멀리즘’은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비우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거예요. 돈·체력·시간·에너지·물건·인생 등등 인생의 모든 것은 유한해요. 남들이 하는 대로 모두 욕심내다보면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을 맞죠. 그럴 때, 내게 필요하고 소중하고 좋아하는 것만 남기면 모든 게 명확해지면서 하나하나 정말 알차게 쓸 수 있게 되죠.”    ■ 일정 기간 ‘○○없이 살기’ 챌린지, 물건에 감정을 담지 말자 「 -삶에서 ‘불필요’와 ‘군더더기’를 줄이고 비우며 갖게 된 여분의 시간과 에너지, 공간,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는 데 집중하자. 미니멀 라이프의 결과로 내가 얻게 되는 것이 뭔지 계획을 잘 세운 후 비우기를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   -먼저 버려야 할 것들 : 동일한 목적으로 여러 개 갖고 있는 것, 고장 난 것, 그저 처분하기 귀찮아서 방치한 것들. 더는 쓰지 않지만 비싸게 사서 아깝다는 것들에도 미련을 버리자. 옛날 구매 가격과 지금의 가치는 전혀 다르다.   -가끔은 일정 기간 ‘○○없이 살기’ 챌린지를 해보자.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알 수 있고, 버리고 남길 것들의 기준이 생긴다.   -한번 소유한 물건은 애지중지 소중히 쓰다가도 만약 이 물건의 쓰임이 다한다면 미련 없이 기꺼이 비우겠다는 마음을 갖자. 있을 때 충분히 누리겠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삶의 모습이 모두 같을 수 없듯, 미니멀 라이프도 모든 사람이 같은 모습일 수 없다.   -많을 때보다 적을 때 더 소중함을 느낀다. 머리끈이든, 음식이든 여러 개면 관리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문구 -더는 사지 않는 것들 : 클렌징오일, 린스, 바디워시(욕실에선 비누 한 장으로 충분하다). 스킨, 에센스, 아이크림(여름에는 덜 바르고 겨울에는 더 발라주면 로션 하나로 충분하다). 주방·욕실의 발 매트(남의 집에 있으니까 사봤는데 없어도 상관없더라). 형형색색의 펜과 디자인 문구(버리고 나서 제일 안 찾는 물건들이다).   -책을 구입하는 목적은 읽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미 한번 읽음으로써 책을 구매한 가치를 다했다고 본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은 독서노트에 적음으로써 그 책은 내게 충분한 가치와 기쁨을 주었다. ‘언젠가’ 읽기 위해 보관하는 ‘인생 책’은 책장 한 칸 분량이면 충분하다.   -단순하게 살다보면, 어느새 돈 쓰는 방식도 더없이 단출해진다. 미니멀한 소비, 가벼운 삶을 살다보면 통장에 돈이 남는다. 내가 사고 싶다면 언제든 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지면 굳이 지금 당장 살 필요가 없어진다.   -물건에 감정을 담지 않는다. 영원히 ‘소중한’ 물건은 없다.   -지진·화재 등 생명의 위기 앞에서 꼭 챙겨야 하는 물건을 때때로 생각해보자. 의외로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는 데 놀랄 것이다.  」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2.03.26 00:02

  • “윤석열 당선인, 표 얻기 위해 잘못된 가치와 타협 말아야”

    “윤석열 당선인, 표 얻기 위해 잘못된 가치와 타협 말아야”

     ━  [SUNDAY 인터뷰] 김병준 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    김병준 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이 지난 15일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검찰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로 규정했다. 정치권에서는 윤 당선인이 정의한 보수의 가치와 가장 근접한 철학을 공유하는 인물로 김병준 대통령직인수위 산하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꼽는다.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출신인 김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세종시 행정수도를 설계했다. 박근혜 정부 말기 총리 후보로 지명됐고 2018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을 지낸 뒤 윤석열 후보 선대위에서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김 위원장은 자유를 평등보다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자다. 그러면서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되 복지를 포함한 사회 정책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지난 15일 중앙SUNDAY·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도 윤 당선인에게 “표를 얻기 위해 잘못된 가치와 타협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정치 쇼와 갈라치기 유혹으로부터 의연해져야 문재인 정부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 수 있다면서다. 관련기사문 대통령·윤 당선인 이르면 오늘 회동 날짜 발표윤 당선인 “통합 최우선, 지역 관계없이 공정 기회 얻어야”“봄꽃 지기 전 국민께 청와대 돌려드릴 것” 이르면 주말 결정 탄핵 후 집권이란 유리한 환경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였지만 결국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어느 정권이든 (한국형 대통령제 시스템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잘못한 게 많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대통령 자신이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와 열정을 갖고 있는지, 대통령 주변의 인물들이 얼마나 훌륭한지와 무관하게 성공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집권 초 낙관론을 경계하는 말로 들린다. “행정부에서 법을 하나 만들어 국무회의를 거친 뒤 국회에 보내 심의해서 통과시키는 데까지 평균 35개월이 걸린다. 인수위 때 시작하면 레임덕이 올 때나 통과된다는 얘기다. 이런 구조인데도 국민은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줄 안다. 국민적 기대와 헌법적 의무는 넓고 크지만 정작 대통령이 뭔가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은 매우 불안하다. 그러니까 날이 갈수록 지지도가 떨어지고 그러다 실패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당선인에게도 이런 말을 들려줬나. “당연히 했다. 윤 당선인도 대통령직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대통령 앞에는 태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과제들이 놓여 있다. 하지만 막상 당선되면 손에 삽자루 하나 들고 있는 기분이 된다. 이런 막막함을 극복해야 하는 게 대통령의 자리다. 게다가 지금 더불어민주당은 172석이다.”   이를 돌파할 당선인의 철학이 궁금하다.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나와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반공만 하면 국가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눌러도 좋다는 식의 과거 권위주의 정부 때 국가주의적 자유주의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진짜 자유주의는 국가 권력은 축소되고 개인과 시장·공동체가 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헌법 제119조 1항의 정신에 충실한 자유주의다. 당선인에게 이런 자유주의 정신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도와드린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이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시장자유주의와도 결이 다른 듯하다. “자유시장경제의 결과가 좋기만 하진 않다는 걸 이미 경험하지 않았나. 소득분배에 문제가 생기고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면 결국 사회 갈등으로 이어지고 자본주의 시장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경제를 중시하되 국가는 그 부작용을 반드시 보완해 줘야 한다. 복지를 포함한 사회정책이 중요한 이유다. 이에 대해서는 당선인도 상당히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   평소 증세와 규제 완화를 교환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했는데. “윤석열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와 관계없는 나의 소신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평균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사회비로 지출하는데 우리나라는 12%다. 평균까지는 가야 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규제를 기업에 가해 놓고 세금을 더 올리면 안 된다. 우선 기업이 돈을 더 벌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면 세금도 더 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맡게 됐다. “사실 우리나라가 지방자치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중앙정부가 지방의원 밥 한 그릇에 얼마 이상 지출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두고 있는 마당이다. 이러니 지역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이 굳이 지방의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서울 집중화 현상이 심화되고 국토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됐다. 지방분권이 강화됐으면 오히려 호남과 영남의 지방정부가 서로 협조할 일이 많았을 거다.”   대선을 통해 계급과 지역, 세대와 성별에 따른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 때 소위 갈라치기를 많이 하는 과정에서 심해졌다고 본다. 일자리가 줄어들수록, 우리 기대 수준만큼 경제가 성장하지 못할수록 갈등은 커진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표를 얻기 위해 남성과 여성, 있는 자와 없는 자, 영남과 호남을 갈라치는 아주 질 나쁜 정치를 하고 있다.”   이런 갈등 구조 속에서 당선인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보다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 때처럼 다 퍼주며 매표 행위를 할 수는 없다. 사회정책을 펴고 복지를 해도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 새 대통령은 ‘참아달라’ ‘양보해 달라’고 당부하며 국민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 비전이 설득력 있을 때 국민은 기다려줄 것이다.” 김영준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2.03.19 00:02

  • “새 정부, 좌우로 분열 말고 진보·보수로 공존해야”

    “새 정부, 좌우로 분열 말고 진보·보수로 공존해야”

     ━  [SUNDAY 인터뷰] 102세 철학자 김형석    ‘102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분열을 통합으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102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3월 검찰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2주간의 칩거를 깨고 맨 처음 찾아간 인사였다. 당시 윤 전 총장은 김 교수에게 “제가 정치를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국민을 위해 뭔가를 남기겠다는 사람은 누구나 정치를 해도 괜찮다”며 “적극적으로 정치하라고 권하지도 않겠지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고 조언과 덕담을 건넸다.   김 교수에게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대선일인 지난 9일 김 교수를 서울 서대문구 원천교회에서 만났다. 다음날인 10일엔 이번 대선의 의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김 교수는 중앙SUNDAY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함께 새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당부를 전했다. 김 교수는 “문 대통령의 분열 정치를 바꾸려면, 정치의 방향부터 바꿔야 한다”며 “새 정부가 정치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5년 동안 나라는 더 힘들어진다”고 걱정했다.   오래전 부인과 사별한 그는 원천교회 인근에서 혼자 살며 집필·강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주요 문답. 윤 당선인, 분열 정치를 통합으로 바꿔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김형석 교수의 첫 만남을 보도한 중앙일보 2021년 3월 23일자 지면. 국민이 왜 윤 후보를 선택했다고 보십니까. “첫째, 그는 검찰총장일 때 대한민국을 지켜줬습니다. 헌법을 지킨 거죠. 그 공로를 국민이 인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둘째, 그는 그릇이 크고 사심이 없어요. 그 점 또한 국민이 인정했다고 생각해요.”   윤 당선인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정부는 국민과 더불어 계속됩니다. 대통령은 그 가운데 5년을 맡는 거예요. 대통령이 나에게 주어진 5년 동안 할 일이 뭔지,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분열을 통합으로 만드는 거지요. 인간적으로는 문 대통령을 깨끗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취임사 때는 국민 통합을 얘기해 놓고 지금까지 분열만 만든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지난번 3·1절 기념사 때도 김대중 정부가 첫 번째 민주정부라고 하던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나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체제부터 전두환 정권까지는 민주주의의 암흑기였고, 노태우 정부를 거쳐 김영삼 정부 때부터 법치국가가 됐지요. 법치국가가 곧 민주국가니까요.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다 한 것처럼 말하는 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겁니다. 새 대통령은 분열을 통합으로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두 달 후면 새 정부가 출범합니다. 어떤 걸 바라시는지. “일본·중국과 1년에 100명씩 교환대학생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일본과 중국에 국비로 100명씩 보내 주고, 일본과 중국에서 100명씩을 받는 거죠. 그리고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에서는 우리가 100명씩 받아주는 겁니다. 그렇게 교환대학생 제도가 성공하면 대통령 10명이 하는 것보다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일본은 나쁜 나라라고 치부해 버리면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는 건데, 그건 잘못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일본의 움직임을 잘 보세요. 러시아·중국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낙후된 나라이고, 미국·유럽은 수준 있는 나라들이에요. 낙후된 나라들이 미국이나 유럽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30~50년쯤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일본처럼 우리도 미국이나 유럽과 우호 관계를 잘 유지하라는 거지요. 나중에 러시아나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우호 관계도 깊어질 거예요.”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사회 갈등이 심화됐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이기적인 경쟁만 하면 사회가 무너지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 사회는 올라갑니다.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국가나 사회가 올라가는 단계에 필요한 게 갈등입니다. 갈등이 전혀 없는 민족은 살아남지 못해요. 아무 갈등 없이 열매나 따 먹고 살았던 하와이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은 소멸했어요.”   어떤 분야의 갈등이 가장 심하다고 보시는지요. “정치 이념의 갈등이죠. 미국·유럽·캐나다는 좌우 분열이 진보와 보수로 바뀌면서 공존하게 됐어요.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면서 ‘북한 같은 나라가 돼도 좋으니 통일만 하면 된다’는 식인데 그건 아니에요. 그것은 역사를 100년 끌어내리는 일로, 자유와 평화를 포기하겠다는 건데…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보다 더 나쁜 겁니다. 문재인 정부는 갈등을 분열로 만들었고, 결국 갈등은 병이 됐어요.”   갈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갈등이 분열이 되면 갈등은 그 생명력을 잃게 돼요. 해결책은 좌우로 분열하지 말고 진보·보수로 공존하는 겁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열린 사회로 가야 해요. 그리고 하나 더, 권력을 가지고 갈등을 해결하려 하면 승자와 패자나 생긴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대화로 해결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실패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요. 왜 그럴까요? 문 대통령의 정치적 이상이 좌파나 진보보다 앞서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다 보니 그 안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청와대가 운동권으로 구성됐던 거고. 새 정부가 문 대통령의 분열 정치를 바꾸려면 정치의 방향부터 바꿔야 해요. 정치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5년 동안 나라가 더 힘들어질 겁니다.”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시는데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아침 6시쯤 일어나서 몸을 풀어 줍니다. 식사는 늘 똑같아요. 우유 반 잔에 호박죽 반 잔, 계란 반숙에 샐러드, 그리고 토스트나 찐 감자를 먹어요. 점심이나 저녁은 생선이나 고기 위주로 먹고요. 차로 이동할 때는 무조건 잡니다.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아서 어머니는 내가 스무 살까지 사는 것만 봐도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과로나 무리는 안 해요. 100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90에서 멈춥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무리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항상 공부해야 합니다. 일과 공부를 안 하면 몸도 마음도 빨리 늙어요. 주변에 100세까지 산 사람 7명이 있는데 공통점이 있더군요. 첫째, 욕심이 없어요. 둘째, 남 욕을 하지 않아요. 사람은 정서적으로도 늙습니다. 내 친구인 안병욱(1920~2013) 교수는 ‘젊게 사는 방법은 공부·여행·연애’라고 하더라고요.”    내 즐거움·행복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까요. “60~75세까지가 가장 좋았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75세까지는 모든 게 성숙해지고, 내가 나를 믿고 따를 수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나이가 되니까요. 75세까지 성장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문제예요. 살아보니 90세까지는 늙는 게 아니에요. 90세까지는 누구나 일할 수 있어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은 인간답게 사는 노력, 과정 그 성취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다 맡아서, 내 인격을 갖추게 되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오니까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함께한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어요.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낳는 행복도 있지요.”   성공과 행복 중 한 가지를 선택하셔야 한다면. “사회적으로 윗자리에 가느냐 못 가느냐를 성공의 기준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에요. 한 가지 더, 너무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능력이 완성되지 못했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결국 떨어지고 말거든요.”   인생에서 남는 건 무엇일까요. “100년 이상 살아보니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남는 게 없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사람,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쓴 사람,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도 남는 게 있어요. 내 즐거움, 행복이라는 건 내가 만들어서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남이 만들어서 주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보답하기 위해서, 주기 위해서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살아 보려고 친구들과 노력했는데 여러분도 이웃들과 더불어 그런 뜻을 가지고 새 출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2022.03.12 00:02

  • “한글 발음대로 쓴 영어 메뉴판, 궁금증 유발 전략 통해”

    “한글 발음대로 쓴 영어 메뉴판, 궁금증 유발 전략 통해”

     ━  [SUNDAY 인터뷰] 뉴욕 한식당 ‘아토믹스’ 박정현 셰프    지난 5일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2021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시상식이 열렸다. ‘미식업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이번 시상식에서 박정현(37) 셰프가 이끄는 뉴욕의 파인다이닝 한식 레스토랑 ‘아토믹스(Atomix)’가 43위에 올랐다. 한국인 셰프가 운영하는 한식당이 50위 안에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뉴욕 ‘아토믹스’의 박정현 셰프와 레스토랑 운영을 맡고 있는 아내 박정은씨. [사진 매티 킴] 2018년 5월 처음 문을 연 아토믹스는 6개월 만에 미쉐린 1스타를 받았고, 그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18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위를 거머쥐었다. 이듬해 10월에는 미쉐린 2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경희대 호텔관광학부 조리학과를 졸업한 박 셰프는 졸업 후 런던과 멜버른의 유명 레스토랑을 거쳐 한국과 뉴욕의 파인다이닝 한식 레스토랑 ‘정식당’과 ‘정식’에서 일했다. 2012년 동갑내기 아내 박정은(37)씨와 결혼 후 2016년 맨해튼에 캐주얼 한식당 ‘아토보이’를 열었고, ‘아토믹스’는 이들의 두 번째 레스토랑이다. 참고로 ‘아토’는 순우리말로 ‘선물’이라는 뜻이다. ‘2021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시상식에 참가했다가 뉴욕으로 돌아온 박 셰프를 서면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미식업계의 오스카상’ 43위에 올라   뉴욕 ‘아토믹스’ 박정현 셰프의 요리들. 메인 요리에 ‘반찬’을 곁들이는 게 특징이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만든 식기와 요리가 조화를 이룬 모습 또한 따뜻하면서도 독창적이다.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리스트에 선정된 이유를 꼽는다면. “처음 요리를 시작한 15년 전만 해도 ‘좋은 레스토랑’ 하면 프랑스 또는 미국식이 인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세계 여러 나라의 오리지널리티(전통과 독창성)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다. 아토믹스 역시 한식 컨셉트와 스토리를 독창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은 것 같다.”   ‘아토믹스’의 컨셉트는. “한식의 지혜와 맛을 기반으로 다양한 테크닉과 식재료를 두루 사용하는 모던 레스토랑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식 상차림과는 다르게 코스 요리를 제공하지만 그 속에서 다양한 한식 스토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또 식기·메뉴카드·유니폼 등을 한국 아티스트들과 작업하면서 고급스러운 한국 문화 또한 자연스레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뉴욕 ‘아토믹스’ 박정현 셰프의 요리들. 메인 요리에 ‘반찬’을 곁들이는 게 특징이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만든 식기와 요리가 조화를 이룬 모습 또한 따뜻하면서도 독창적이다. 아토믹스의 코스 요리는 1인당 270달러(약 31만6000원)라는 높은 가격이지만 서너 달치 예약이 이미 잡혀 있을 만큼 인기가 좋다. 스낵 2종류,  메인 요리 7종류,  반찬 3종류, 밥 2종류, 디저트 2종류 등 총 16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는데 이 메뉴는 3개월에 한 번씩 바뀐다. 특히 메인 요리와 함께 ‘밥’ ‘반찬’을 곁들여 내는 구성은 외국 레스토랑에선 볼 수 없는 아토믹스만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가자미식혜, 여러 종류의 무, 고추장 샐러드 등을 곁들여 내는데 이는 밥 위에 반찬을 올려 먹거나 비벼 먹는 다양한 맛의 경험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각자의 기호대로 여러 가지 맛을 조합해서 먹는 ‘반찬 문화’는 외국인이 부러워하는 한식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나리(Minari), 쑥(Ssuk) 등 한글 발음대로 식재료를 소개한 메뉴판. [사진 아토믹스] 한글 발음대로 적은 메뉴판이 유명하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유명 레스토랑에 가면 대부분 아시안 식재료를 일본 발음으로 적거나 영어로 번역해 적는다. 그게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우리는 간장(청장·중장·진장)·된장·다시마·장아찌·두부·초피·송이버섯·표고버섯·조청·감태 등의 식재료와 찜·조림·나물·반찬·죽 등의 조리법 명칭을 알파벳으로 적되 한글 발음 그대로 적고 있다. 미나리(Minari), 쑥(Ssuk) 이런 식이다. 외국인 손님들이 ‘이게 뭔가’ 궁금해 할 때 자연스레 한식과 관련한 대화를 나누는 게 우리 방식이다.”   뉴욕 ‘아토믹스’ 박정현 셰프의 요리들. 메인 요리에 ‘반찬’을 곁들이는 게 특징이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만든 식기와 요리가 조화를 이룬 모습 또한 따뜻하면서도 독창적이다. 아토믹스 팀이 메뉴판에 쏟는 정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앞면에는 단청 등의 한국 전통문양이 예쁘게 들어가 있다. 또 메뉴마다 박 셰프의 개인적인 경험 등 음식에 관한 짧은 설명과 식기를 만든 아티스트 소개까지 한국 문화 정보가 촘촘하게 적혀 있다.   전 세계에서 K컬처에 대한 관심이 높다. 뉴욕과 유럽에서 느끼는 K푸드는 어떤가. “뉴욕에 한식당이 많이 오픈했고 위치도 이스트빌리지, 미드타운, 트라이베카, 브룩클린 등 다양해졌다. 한국 식재료와 음식을 파는 마트 풍경도 달라졌다. 처음 뉴욕에 온 10년 전만 해도 주로 한국인이 이용했는데 요즘은 외국인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올해는 특히 영화 ‘미나리’ 덕분에 뉴욕의 큰 마켓들에서 미나리가 아주 인기라고 한다.(웃음) 뉴저지, 오레곤 등에서 우리 농산물을 키우는 한국인 농부들도 많아졌다. K팝-K무비-K푸드가 유기적으로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공동체 식문화 진화에 힘 보태고 싶어   ㄷ자 형태의 바로만 구성된 실내. [사진 아토믹스] 서양식 코스 상차림 때문에 ‘모던 한식은 진짜 한식이 아니다’라는 비판도 많다. “음식은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중요한 만큼 모든 한국인에게는 각자의 한식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겐 어머니가 해주신 밥, 누군가에겐 떡볶이가 한식을 대표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토믹스의 상차림은 한식으로 안 느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한식 글로벌화’에 아직 정답은 없다. 전통 그대로를 유지하기보다, 뉴욕에 사는 외국인 또는 뉴욕에 여행 온 여러 나라 사람에게 한식과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셰프들과 협업 이벤트도 많이 갖는다.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나 또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모든 셰프들은 색다른 식재료에 관심이 많다. 특히 영어로 일일이 번역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한국의 나물류와 뿌리채소들을 아주 좋아한다. 발효 요리에도 관심이 많다. 나물을 예로 들면, 한국에선 생나물이든 삶은 나물이든 간장·된장 등에 가볍게 무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보기엔 아주 가벼워 보이지만 발효 음식 특유의 깊이 있는 맛이 일품이다. 보통 양식에선 감칠맛을 내기 위해 오랜 시간 스톡(고기·생선·뼈·채소 등을 우려낸 국물)을 끓이고 또 그걸 졸여서 소스를 만든다. 그런데 한국에는 깊은 맛을 내는 소스가 집집마다 항상 구비돼 있다니까 엄청 신기해한다.”(웃음)   한식 셰프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이번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1위를 수상한 덴마크 레스토랑 ‘노마’는 이미 여러 차례 이 리스트에 올랐다. 그래서 르네 레드제피 셰프의 ‘이 리스트에 선정되면서 덴마크와 노르딕 음식에 큰 의미와 변화가 생겼다’는 말이 진지하게 들리더라. 식문화가 주변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은 그만큼 엄청나다. 더 나은 음식 문화를 위해 작은 부분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2021.10.30 00:21

  • “내년 5월 2차 발사 때까지 문제점 개선 어렵지 않아”

    “내년 5월 2차 발사 때까지 문제점 개선 어렵지 않아”

     ━  [SUNDAY 인터뷰] ‘누리호’ 개발 주역 고정환 항우연 본부장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이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에 전시된 75t 액체로켓 앞에 섰다. 고 본부장은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첫 한국형발사체(KSLV-2) 누리호 개발의 주역이다. [사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인터뷰 시작부터 울먹였다. 애써 돌린 고개 너머로 눈물이 비치는 듯했다. 21일 오후 9시, 누리호가 우주로 떠난 지 4시간이 흘렀다. 늦은 오후의 전율과 흥분이 잦아들고 나로우주센터 발사대에 깊은 어둠이 내린 시각이었지만, 낮부터 스며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은 온몸에 남아 수시로 올라왔다. 순수 국내기술로 만든 첫 한국형발사체 누리호의 주역 고정환(54)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 얘기다.   그는 2015년 발사체개발본부장을 맡은 이래 7년째 누리호 개발을 이끌어 왔다. 미국 텍사스A&M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 본부장은, 2000년 항우연 입사 이후로 발사체 개발에 참여해 왔다. 중앙SUNDAY가 누리호 발사 전인 18일과 발사 직후인 21일 두 차례 고 본부장을 만났다.    외국서 기술전수 안 해줘 책·전시물 참고   왜 울먹이나. “잘 모르겠다. 전날까진 평정심을 지켜왔는데, 누리호 발사 예정시간을 5시간 앞둔 오전 11시에 발사대 아래 밸브 이상이 발견되면서부터 계속 눈물이 났다. 지난 10여 년간 쏟아온 노력을 단 16분으로 평가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 같다.”(3단으로 구성된 누리호의 발사 후 총 비행시간은 967초. 16분하고도 7초다.)   누리호가 목표 고도인 700㎞까지 올라가고도 마지막에 위성 모사체의 궤도진입에 실패했다. “너무 아쉽고 억울하다. 마지막 성공에 너무 가깝게 다가갔는데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사실 2,3단이 잘 분리되고 3단 점화가 되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 발사 전까지만 하더라도 3단부가 고도 261㎞의 우주에서 점화가 될까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문제없겠구나 생각했는데 3단 연소 종료가 될 때 보니 시간이 조금 모자랐다. 3단에 달린 7t 엔진은 목표 연소시간이 521초인데, 다 타지 못하고 427초에 종료됐다. 이 때문에 목표 속도인 초속 7.5㎞까지 오르지 못하고 6.4㎞에 그쳤다. 위성 더미가 우주궤도에 안착하지 못한 이유다. 내년 5월 2차 발사 땐 반드시 개선해서 최종적으로 꼭 성공을 이뤄내겠다.”   원인이 뭐로 추정되나. “조사위원회에서 데이터를 받아 조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원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추정하기에는 3단 추진체 탱크의 내부 가압 장치에 이상이 생겼거나, 탑재된 컴퓨터가 연소 종료 신호를 일찍 보냈을 수도 있다. 7t 엔진 자체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점화가 되고 나서 400초 이상 문제없이 연소하고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원인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1,2단부용 75t 엔진 개발에 주력하느라 7t에 다소 소홀했던 건 아닌가. “그건 아니다. 7t엔진의 추력이 75t의 10분의1이라 쉽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공에서 500초 이상 가장 긴 시간을 연소해야 하고, 대기압이 매우 낮은 탓에 노즐 팽창비가 75t보다 훨씬 커 개발에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더 많다. 그래서 그간 다양한 시험을 많이 해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2차 발사가 예정된 내년 5월까지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겠나. “3단이 400초 이상 비행했으니 기본적인 기능은 거의 다했다고 본다.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최종 성공에 이르기까지 있을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얻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간 나로우주센터에는 자주 내려왔나. “최근 2주간은 계속 나로우주센터에 머물렀다. 저녁엔 예전 예내리 포구였던 자리에 지은 기숙사에서 잠을 잤다. 인적 없는 캄캄한 밤에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고 하면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새벽에 수시로 깨기도 했는데, 그러고 나면 잠을 못 이루고 새벽을 맞을 때도 많았다. 내가 예정대로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어깨를 짓눌렀다.”   누리호 개발계획이 애초 예정보다 좀 늦어졌다. “원래는 작년에 누리호를 첫 발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초기엔 예산 지원이 늦어지면서 설비와 장비 구축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엔 다들 아는 얘기지만 액체로켓 엔진 연소 불안정과 추진제 탱크 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정이 또 늦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거꾸로 애초 계획을 대폭 당기면서 진행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사실 우주로켓 엔진기술은 우주강국들에선 1950년대부터 시작한 오래된 기술이다. 이걸 자력 개발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인공위성을 쏘려면 누리호와 같은 운송수단, 즉 발사체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을 보유해야 우리나라 땅에서 마음껏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교과서에 정확히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들여올 수 있는 기술도 아니라는 점이다. 미사일 개발에 전용될 수도 있는 대표적 이중용도 기술이다 보니 미국과 같은 선진 외국에서 기술전수를 해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우리 스스로 개발하는 방법 밖에 없다.”    러시아 엔지니어들 원포인트 레슨 덕 봐   로켓엔진을 개발해오면서 어려웠던 건 없나. “일정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웠다. 우주발사체 개발은 어느 정도 연구개발을 통해 선행기술을 확보한 뒤 시스템 개발에 들어가야 한다. 엔진만 해도 보통 7~8년 정도를 보고 해야 한다. 누리호의 경우는 모든 걸 처음부터 한꺼번에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나로호의 B플랜으로 진행한 30t 액체엔진 부품 개발 기술이 있긴 했지만, 예산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완성을 하지 못했다. 당시엔 설비조차 없어 러시아에 가서 시험을 하기도 했는데, 도중에 폭발사고 등 문제가 생기면서 더 이상 시험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선 지식이 부족하고, 외국에선 기술전수도 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나. 기본 설계도 같은 건 공개된 게 있나. “설계도 같은 건 없었다. 굉장히 오래된 60년대 러시아 책 같은 걸 보면 개념도 정도는 나온다.  이걸 바탕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기술자들을 비공식으로 만나 힌트를 얻고 자문계약을 통해 도움을 얻는 정도였다. 설계는 우리가 직접 해야 했다.”   그게 가능한가. “미국이나 우주 강대국의 박물관에 가보면 로켓엔진이 전시돼 있다. 그런 전시물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힌트를 얻기도 했다. 나로호 때 발사체 1단 부분을 러시아에서 통째로 들여오긴 했지만, 이후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러시아 엔지니어들을 통해서도 비공식적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나로호 개발 당시 기관단총을 든 러시아 요원들이 나로우주센터에 상주하면서 기술유출 감시를 엄격히 하지 않았나. “그러긴 했다. 러시아 기술자들과 회의할 때도 보안요원들이 모든 대화를 다 받아 적을 정도였다. 러시아의 1단 로켓엔진이 보관된 조립동에는 접근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라 퇴근 후 숙소까지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저녁에 좋은 일이 있을 땐 러시아 엔지니어들을 초대해 고기 굽고 소주 한 잔 하면서 친해졌다. 그러고 나서 궁금한 걸 물어보면 가르쳐주기도 했다. 결국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 “내년 5월에 2차 발사 계획이 돼 있다. 이번 1차 발사에서 생긴 문제의 원인을 찾고 고치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하면  5월이 아니라 조금 더 뒤로 갈 수도 있다.  2차 발사용 기체는 우리 팀에서 이미 투트랙으로 준비하고 있다. 그땐 국내 기업 AP위성이 만든 소형 성능검증 위성을 쏘아 올린다. 3차 발사에선 KAIST 인공위성연구소가 만드는 차세대 소형위성 2호를 발사하기로 돼 있다. 그 다음 4차, 5차, 6차에서는 군집위성을 쏘아올릴 계획이다.”   정부나 정치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간 우주 프로젝트가 덩어리 단위로 내려오다 보니 중간에 연구개발이 끊어지는 예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예산 문제로 계속 힘들어진다. 참여 기업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를 하면 연구원 차원에서 다른 기술을 개발하려고 해도 여유나 기회가 없다. 예산의 융통성이 필요하다. 연구원을 믿고 맡겨주시면 좋겠다.”   ■ 고정환 「 1967년 2월생으로 부산 중앙고를 나와 서울대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서울대에서 석사를 하고 미국 텍사스A&M대에서 1996년 항공우주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 남아 연구원으로 일하던 고 본부장은 2000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입사해 선임·책임연구원, 발세체품질보증팀장 등을 거친 뒤 2015년부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 고흥=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2021.10.23 00:02

  • “변방은 중원 권력의 출생지, 잠재적인 미래 힘이다”

    “변방은 중원 권력의 출생지, 잠재적인 미래 힘이다”

     ━  [SUNDAY 인터뷰] ‘중국 기행-변방의 인문학’ 연재 마친 윤태옥   3년여간 중앙SUNDAY에 ‘중국 기행-변방의 인문학’을 연재한 윤태옥 필자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국도 변방이지만, 내일의 주도권을 키우고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바람이 부는 가운데 그의 시선이 세상의 중심을 향하는 듯하다. 박종근 기자 그는 자신을 ‘여행객’이라고 부른다. 일곱 권의 책을 내고 십수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니,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일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행은 재미를 만끽해야 하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하는 것인데, 혼자 튀어 보이는 ‘작가’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게다가 내가 글을 전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나”라고 묻자 그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냥 필자. ‘변방의 인문학 필자 윤태옥’이라고 하면 좋겠다.” 윤태옥 필자. 그는 중앙SUNDAY에 지난 3년여간 꼬박 ‘중국 기행-변방의 인문학’을 연재했다. 지난달 28일 자를 끝으로 37번째 원고를 보낸 뒤 그는 대한민국을 누비고 있다. 그의 누리길 사이사이, 그를 만났다. ‘변방’은 대체 어디인가. 변방이라면, 중심은 어디인가. ‘인문학’에서 ‘학(學)’은 대체 어떻게 길어 올린 것인가. 윤 필자에게 물어봤다.    14년간 중국 여행하며 블로그에 글 써   왜 중국인가. 그리고 ‘변방’은 어디를 말하는 건가. “우리가 사는 동아시아를 보자.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도 중원이 중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중원 바깥의 서역, 북방초원, 동북(만주), 동남해안, 서남내륙, 티베트 등이 변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변방은 잠재적인, 미래의 힘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변방이 중앙 진출과 지배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변방은 출생지이고 중앙은 변방이 장성해서 성공한 무대이다.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은 문무백관과 환관, 궁녀가 성공한 황제를 받드는 좌표이다. 흉노(匈奴)제국은 중원의 한나라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을 받았다. 흉노가 약해진 틈에 독립한 선비(鮮卑)족은 내몽고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남하해 중원을 장악했다. 몽골초원에서 태어난 칭기즈칸과 그 후예는 중원은 물론 유라시아까지 정복했다. 청 제국은 만주에서 내려와 자금성뿐만 아니라 서역과 티베트까지 취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역시 변방에서 힘을 키워 중원의 장제스에 역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변방이 아닌 순수 중원 국가는 송, 명나라 정도인데 송은 북방의 힘에 눌렸고 명은 쇄국하다가 동아시아 전체를 기울게 했다.”   현재의 한국, 그 이전의 한국도 변방인가. “동아시아는 한자문화권이다.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한국은 한자문화권의 변방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린 한자를 2000년 가까이 쓰고 있다. 간체자를 쓰는 중국과 다르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만의 문자는 아니지만 명백히 우리 문자의 하나다.”   2021년 3월 20일 자에 게재한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 대협곡. 자주국방의 기치를 드높이는 국군의날,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개천절과 한글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한국은 중국의 변방이요, 한자도 한국의 문자다’라는 말이 썩 편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윤 필자는 “이런 말을 주변에 하면 나를 친중(親中),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시리즈 제목(변방의 인문학)에 학(學)을 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학’을 붙이는 게 겸연쩍다. 기행(紀行)을 통한 역사적 상상력과 소감을 섞은, 독특한 여행기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공공역사(Public History)로 봐주는 학자도 있다. 3년 반이 쌓였으니, 기행의 깊이와 너비로 보면 ‘학’을 붙여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산물(産物)의 조건은 동력이다. ‘변방의 인문학’을 만들어 내기 위한 근원적인 행위, 즉 발걸음을 살펴봐야 했다. 윤 필자의 블로그 ‘왕초일기’는 ‘왕초보의 골프 일기’를 줄인 말이다. 8300여 개의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블로그를 시작한 게 2000년 6월이니, 오늘까지 그간의 날보다 많은 숫자다. 그는 “골프에서 시작했지만, 여행으로 넓어졌고, 생각나는 대로 일단 쓰고 본다. 아니, 끄적거린다”고 말했다.   만주족 역사기행 중 사용한 지도에 메모가 가득하다. 2019년 11월 30일 자에 그래픽으로 재탄생했다. 블로그에 중국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2006년 베이징으로 1년 동안 ‘휴가’를 갔다. 2009년부터는 아예 여행객으로 나서면서 중국 일기로 이어져 왔다. 햇수로 14년이 되었다.”   14년 동안 중국 곳곳을 누볐을 텐데. “내가 가보지 못해 글로 쓸 수 없었던 곳들도 있다. 티베트는 단체여행에 실려 다니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10년 넘게 튕기다가, 이제는 영영 못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홍콩과 마카오는 ‘화려한 변방’으로 탐구하고 싶었으나 홍콩 민주화 시위로 포기했다. 동남아시아는 ‘바다의 역사’라는 주제로 지도에 동선과 날짜까지 세세히 적어놓고 있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무기한 미룬 상태다.”   중국 태항산은 중원과 변방을 잇는 천하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 2019년 10월 12일 자에 실린 사진. [사진 윤태옥] 지도를 꼼꼼히 챙긴다. “스마트폰 앱 지도가 아닌 종이 지도다. 지도는 여행의 준비와 현장에서 필수적인 도구이다. 지도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고 상상력과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사진은 기록 매체로서 훌륭한 도구다. 감동은 눈을 통해 마음으로, 기억을 담는 기록은 주로 사진으로 한다. 전문가용 카메라도 있지만, 아마추어 하이엔드급으로 만족한다. 스마트폰 사진도 유용하다. 무겁고 비싼 카메라를 ‘모시고 다니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진이 아니라 여행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글은 언제 쓰나. “매일 새벽, 그 전날의 여행일기를 블로그에 쓴다. 블로그는 메모장이고 일기장이고 내 여행과 일상의 데이터베이스인 셈이다. 여행 중이 아닐 때는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니 전체의 맥을 잇는 것은 여행이다. 여행을 계속해가는, 내 뱃속에서 작동하는 동력은 아마도 호기심인 것 같다. 가장 좋은 놀이는 공부이고,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공부한 것으로 하는 여행이 아닐까 한다. 호기심이 공부이고 그것이 여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동남아의 바다’와 티베트 못 다뤄 아쉬워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동상.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 중원을 장악했다. 변방의 인문학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중국은 이웃이다. 어쩔 수 없는 이웃이다. 지리적으로 붙어사니까 교류와 융합도 있고 갈등도 있다. 말로 하는(싸우거나 교류하거나) 것은 외교장관의 일이고 총 들고 하는(역시 싸우거나 교류하거나) 것은 국방장관의 몫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친교로 교류하는 것이 아닐까. 굳이 24시간 긴장하며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외교장관도 하고, 국방장관도 하고, 저널리스트가 되어 천하대세를 논하며 주야장천 거품 무는 것은 개인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의 운명은 친중·반중, 친미·반미, 친일·반일, 친러·반러를 한꺼번에 다 해야 하는, 지정학적 신공을 펼치며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서북의 중원’과 ‘동남의 해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정학적 운명을 갖고 있다. 그것을 쿨하게 인정하고 변방은 변방이고, 변방에서 내일의 주도권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코로나19로 중국 길이 막히자 윤 필자는 국내 여행이 더 애틋하게 여겨진다고 했다. 윤 필자는 최근 ‘해바라기길’을 다녀왔다. 순천만~여수~낭도~고흥~벌교~순천만의 일주 코스다. 이름은 윤 필자가 붙였다. “해가 뜨면 해를 따라간다. 그리고 해질 때까지 해와 어깨동무하듯 함께 간다.” 그는 이렇게 알려줬다. 여행 전에 배우고, 여행 뒤 새로운 배움을 이렇게 나눈다. 그래서 그의 시리즈에 ‘학’이 붙었음을, 이제 알겠다. “학교는 책 속으로 가는 여행이고, 여행은 길 위에서 읽는 책이다.” 그의 말이 귓전을 때린다.   ■ 윤태옥 「 1960년 서울 출생. 84년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1993~2000년 M.net 편성국장, 기획부장. 2001년 팍스넷 팍스TV 총괄 부사장. 2001~2005년 크림엔터테인먼트 총괄 부사장. 2007년~2008년 팍스인슈 대표. 2009년~현재 다큐멘터리 제작, 와이더스케이프(중국 인문다큐 전문 제작사) 대표. 」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1.09.25 00:21

  • “노인 10명 중 1명 앓는 치매, 원인 치료제 10년 내 나올 것”

    “노인 10명 중 1명 앓는 치매, 원인 치료제 10년 내 나올 것”

     ━  [최준호의 첨단의 끝을 찾아서] 묵인희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장    ‘충남 금산의 한 농촌마을, 자동차보험사 직원 황두원은 팔순 노모, 일곱 살 딸과 함께 어렵게 살아간다. 치매를 앓는 노모는 수시로 제정신을 잃어버린다. 냉장고 전원 코드를 뽑아 음식을 상하게 하는가 하면, 손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잘라 버린다. 정신이 돌아온 노모는 자책하며 자해소동을 벌인다. 주인공 두원의 일상 삶이다. 어느 날 저녁 두원이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이, 할머니와 같이 집 밖으로 나간 어린 딸이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다. 할머니가 사고 당시에 함께 있었지만, 치매 탓에 현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해 9월 개봉한 영화 ‘오! 문희’의 줄거리 앞부분이다. 영화는 치매노인을 모시고 사는 서민의 애달픈 삶을 슬픔과 해학으로 그려낸다.    고혈압·당뇨·고지혈증 땐 발병 위험 묵인희 국가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장이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사무실에서 알츠하이머 치매의 발병 원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중앙치매센터가 조사한 2020년 국내 65세 이상 추정치매환자는 83만 명. 65세 이상 노인 인구수(813만 명)의 10.2%에 해당하는 수치다. 노인 치매 환자수는 갈수록 증가할 전망이다. 인구 고령화가 진전되는 탓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수는 2050년 1901만 명으로 정점을 이룬 뒤 내려가지만, 노인치매환자는 계속 늘어 2060년에 333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휘영청 보름달 차오르는 한가위 연휴가 시작됐다. 2년째 이어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도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시작됐다. 늙은 감나무가 힘들게 버티고 있는 고향집, 아들·딸을 기다리는 노부모 10명 중 1명은 지금도 기억을 잃어 간다. 유전공학의 발달 덕에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하고도 18년이나 지났지만, 치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인간은 왜 치매에 걸릴까. 21세기 과학기술은 치매를 극복할 수 없을까. 지난해 8월 출범한 국가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의 묵인희(59) 단장을 지난 8일 만났다.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이 뭔가. “고령화 사회 속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치매를 국가 차원에서 통합해서 효율적으로 연구하고자 만든 국가사업단이다. 그간 치매 관련 연구개발(R&D)은 소규모로 기관마다 나뉘어 있었다. 기초연구 따로 임상연구 따로 하다 보니 연계성도 없었고, 결과가 나와도 사장되는 문제가 반복됐다. 사업단의 현재 목표는 치매 발병을 5년 늦추고, 증가 속도를 50% 줄이는 거다. 이렇게 하면 치매환자가 1년에 2만 명 줄어들게 된다. 또 연구개발을 하는 사이 원인치료 방법도 개발될 수 있다.”   치매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치매라는 건 정상적인 학습과 기억이 저하되는 걸 말한다. 전체 치매환자의 70%는 알츠하이머다. 이 외에 혈관성 치매가 17%, 루이체- 파킨스병 치매가 3.4%, 전두엽 치매가 1%, 알코올성 치매가 0.9% 등이다.”   치매는 증상 악화를 늦출 수는 있어도, 개선하긴 어렵다고 하는데. “알코올성·혈관성 치매는 조기발견하면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치매에는 아직 제대로 된 원인 치료제가 없다. 현재로선 증상 악화를 늦추는 게 최선이다. 이런 증상 완화제는 전 세계적으로 4종이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수년에 불과하다. 증상 완화 약물을 통해 남아 있는 시냅스를 강화하는 방법인데, 시간이 지나면 강화할 시냅스조차 없어진다.”   알츠하이머 치매가 발병하는 원인은. “뇌신경세포 바깥에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쌓이고 신경세포 내부에 변성된 ‘타우’ 단백질이 축적되면 신경세포가 죽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끊어지고 신경 회로망이 망가지면서 기억 학습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베타아밀로이드라는 건 원래 뇌 속에 존재한다. 보통 땐 농도가 낮고, 자정기능이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질병이 되면 농도가 짙어지고, 자정기능도 떨어지게 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원인을 알면 증상을 개선하는 치료도 가능한 것 아닌가. 어떤 연구가 진행 중인가. “지난 6월 7일 미국 생명공학 기업 바이오젠이 세계 최초로 치매 원인 치료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치매를 일으키는 베타아밀로이드에 항체가 붙어서 면역세포가 이를 인지하고 베타아밀로이드를 분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결과가 썩 좋지 못하다. 효과가 23% 수준에 그치고, 부작용도 보이고 있다. FDA는 3상보다 더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4상을 하라고 조건부 승인을 내줬다. 가격도 비싸다. 주사 한 번에 400만원인데 한 달에 한 번은 맞아야 한다. 1년이면 6000만원인데, 계속 맞아야 한다. 그래도 실망하긴 이르다. 전 세계적으로 치매 증상 개선을 위한 원인 치료를 위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임상 3상에 들어간 원인 치료제만 28개다.”   국내 치매연구는 어느 정도인가. “국내에도 원인 치료제에 도전해 성과를 내는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벤처기업인 젬백스앤카엘이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후보 물질(GV1001)로 지난해 국내 임상시험 2상 단계를 마쳤다. 아리바이오도 임상 2상을 마쳤다. 우리 사업단에서도 임상 2상에 들어간 게 하나, 1상에 들어간 것도 하나 있다. 사업단 과제의 3분의 1이 치료제 혹은 조기진단의 타겟을 발굴하기 위한 원인규명 연구이다. 지난해부터 매년 6개 과제, 현재 12개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이외 3분의 1은 치매 예측과 진단, 나머지 3분의 1은 원인치료제 개발 및 예방 프로그램 개발이다.”   인류가 언제쯤 치매를 극복할 수 있을까. “원인 치료제는 향후 10년 안에 분명히 나올 것이다. 하지만 비용이 싸야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치매는 발병원인이 다양하므로 치매 치료의 효능을 높이려면 개개인에게 맞는 정밀의학으로 가야 한다. 이런 정밀의학에 바탕을 둔 맞춤형 치료제가 나오려면 20년은 더 걸려야 할 거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이 돼 신경세포가 죽어 버리면 되돌릴 수는 없다. 치료제를 쓰더라도 신경세포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조기진단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동네 병원 차원에서 임신진단 키트처럼 비싸지 않은 치매 조기진단 키트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약국에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검증이 덜 됐기 때문이다.”   치매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내에도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최근 들어 치매를 조기진단하는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아직까지 신의료 기술허가를 받은 것은 없지만 앞서 말한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 축적 등 뇌 속에 병변이 나타나는지를 검사하는 거다. 혈액이나 머리카락·콧물·침·소변 등에서 관련 단백질을 검출하는 방법이 뇌영상 촬영방법에 비하면 저렴하다. 이런 게 앞으로 건강검진에 포함되야 한다. 가장 정확한 건 아밀로이드 ‘양전자단층촬영술’(PET)을 이용해 뇌 속을 찍어 보는 방법인데 비용이 150만원으로 비싸고, 환자가 아니면 잘 찍어 주지 않는다.”   사업단 과제의 또 다른 부분이 예방이라 했는데. “최근 들어 치매 예방 프로그램이 전 세계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게 핀란드의 ‘핑거 프로그램’이라는 거다. ▶고위험인자 관리 ▶근력운동 ▶사회활동 ▶식단조절 ▶인지강화훈련, 이렇게 다섯 개 프로그램이다. 유럽에서 임상적 검증을 끝내고 최근 국내에도 연구차원에서 도입했다. 우리 사업단에서는 유튜브를 이용해 따라 하게 하는 비대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유산소·근력운동 예방 효과 좋아   어떤 집안은 치매 환자가 많고, 또 어떤 집안은 치매가 없는데. “유전적 소인이 아주 중요하다 보니 그럴 수 있다. 알려진 거로 대표적인 게 APOe4 유전인자다. 알츠하이머 치매 발병에 영향을 주는 강력한 위험인자다. 하지만 이 유전인자가 있다고 100% 치매가 발병하는 건 아니다.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다. 다른 요소들이 영향을 주면, 치매 증상이 생길 수도, 안 생길 수도 있다.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요소가 35%, 어쩔 수 없는 게 65%다. 즉, 치매 유전인자가 있다면 발병할 확률이 높긴 하지만, 노력해서 발병을 막을 수도 있다.”   APOe4 유전인자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현재 대형병원에서 8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PCR 검사를 한 번 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건강검진에 이런 항목도 들어가면 좋은데, 아직 포함되지 않고 있다.”   유전인자 외에도 치매에 영향을 주는 게 있나. “청장년 때는 청력 손실과 고혈압·비만 등이 치매 발병의 위험인자들이다. 이후엔 흡연·우울·사회적 고립·당뇨병·운동 부족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부분이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35%의 요소들이다.”   이 외에 치매 예방을 위한 구체적인 팁이 있다면. “치매 고위험인자 관리가 중요하다. 당뇨·고지혈증·고혈압 이 세 가지는 꼭 체크하면서 약을 먹어야 한다. 인지기능 강화훈련도 좋다. 대표적인 방법이 독서다. 책을 읽으면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시냅스가 튼튼해진다. TV나 유튜브를 보는 것은 독서보다 효과가 떨어진다. 흔히 치매 예방에 화투가 좋다고 하는데, 안타깝지만 임상 결과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그래도 소셜 액티비티(Social activity) 차원이라면 바람직하다. 외국 요양원에선 퍼즐 맞추기도 많이 한다. 결국 뇌세포 운동을 통해 시냅스를 강화하는 거다. 유산소 운동과 근력강화 운동은 효과가 좋다.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 간 유대활동, 댄스 등도 좋다. 손을 많이 움직이는 것 좋다.”   ■ 묵인희 「 서울대 자연대 동물학 학사, 미국 애리조나대 신경과학 박사,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 의과대학 치매융합센터장,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장,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 」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2021.09.18 00:02

  • “한·미 동맹뿐 아니라 일본·중국과 협력 강화도 중요”

    “한·미 동맹뿐 아니라 일본·중국과 협력 강화도 중요”

     ━  [SUNDAY 인터뷰] 주북한 독일 대사 두 차례 지낸 토마스 섀퍼   토마스 섀퍼(Thomas Schäfer) 전 북한 주재 독일 대사는 평양에서만 두 번(2007~2010, 2013~2018년) 대사직을 수행한 북한 문제 전문가다. 베테랑 직업외교관이었던 섀퍼 전 대사는 2018년 독일 외교부에서 은퇴한 후 쓴 책 『김정일에서 김정은까지: 강경파가 어떻게 득세했는지』를 최근 펴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섀퍼 전 대사를 만나 남북한과 북한-미국 관계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토마스 섀퍼 전 주북한 독일 대사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일시적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신인섭 기자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No Deal)’로 결렬된 후 그동안 코로나19 등으로 남북한, 북·미 관계가 올스톱된 것 같다. 언제쯤 정상화할 것 같은가. “남북 간, 북·미 간에는 이전에도 원래 정상적 관계가 없었다. 지금까지 시간계획, 대화 성사 여부는 모두 북한에 달려 있었다. 북한 외 다른 나라들은 언제나 북한과 대화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접촉의 전제로서 정치적인 목표를 제시해 왔다. 미군 철수 요구라든지 한·미 관계에 교란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든지. 북한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에 가까워지면 유화적 제스처를 보냈다. 북한은 긴장과 유화 국면을 적절히 섞어 활용해 왔다. 3년 후 미국 대선도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등장할 것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와 비슷한 성향의 후보가 나올 때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이 최근 영변원자로를 재가동했다는 정황들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영변원자로 재가동 뉴스가 맞는다면 긴장 관계를 다시 고조시키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났을 때 원자로 가동중단 대가로 제재 완화를 요구했던 그 카드를 상기시키는 이슈다.”   북한이 가까운 시일 내에 더 큰 도발을 할 가능성은 있나. "예를 들어, 단거리 미사일 발사나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그러나 핵이나 장거리 미사일 실험까지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 통신선을 불시에 재개했다 다시 닫았는데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보나. "이 또한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 같다. 한미연합훈련과 연계해 훈련 중단을 요구하면서 일시적으로 열었다가 국면이 끝나니 다시 닫은 것으로 보인다. 긴장완화하겠다는 뜻은 없고 제스처에 그치는 것 같다. 진정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최근 북한의 동향을 보면 김여정이 전면에 나서고 김정은은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여정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해 강한 표현의 발언을 했다. 김정은이 전면에 나서지 않아 건강이 안 좋다든지 뭔가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후계자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해 본다.”   한류 규제라든지 북한 사회 내부 통제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내가 북한 대사로 있을 때도 일종의 포고령 같은 게 있었다. 어떤 것을 위반하면 어떤 처벌을 받는다는 식이었다. 북한은 외부문화가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느끼는 것 같다.”   오랜 제재와 코로나19로 북한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은데. "코로나19 초기 단계인 지난해 3월 독일을 비롯한 북한의 서방 공관들은 다 철수했다. 러시아와 중국, 시리아 정도만 남은 것 같다. NGO(비정부기구)나 유엔도 철수한 거로 알고 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매우 어렵다면 세계식량기구(WFP)나 FAO(세계식량농업기구) 등을 통해 지원요청을 했을 것이다. 아직은 그런 움직임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보듯이 미국은 국익에 따라 해외주둔 미군의 철수와 배치를 유동적으로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재래식 무기 부문에선 한국이 북한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위협이 된다. 그 때문에 한국은 동맹을 필요로 한다. 미군 철수 이야기가 혹시라도 거론된다면 이는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면 북한의 도발이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북한은 2012년부터 미군 철수 등 정치·군사적 요구를 강하게 해 오고 있다. 그 이전엔 경제적 반대급부 요구가 많았다. 게다가 미국의 고립주의, 비개입주의 경향은 더 강해지고 있다.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그렇다. 유럽은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지하려고 노력을 했다. 한국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도 중요하지만 이웃나라 일본과의 협력도 중요하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국과의 협력도 물론 중요하다.”   내년 3월엔 대선이 치러진다. 향후 남북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나. "먼저 그 전에 긴장이 고조되는 안 좋은 단계가 올 수 있다. 그런 다음에 북한은 올림픽을 계기로 대화나 접촉, 긴장완화를 제안할 수 있다. 같은 패턴이 평창올림픽이 개최됐던 2018년에도 있었다. 북한은 중장기적 시간 계획을 잡아서 그 패턴에 따라 움직인다.”   독일은 통일된 지 벌써 31주년을 맞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기약이 없어 보인다.   "북한은 상당히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정책과 노선을 세운다. 한국을 비롯해서 북한과 관계된 나라들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시간은 북한의 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북한 간 그리고 북한과 주변국 간의 격차가 더 커지고 있다. 그럴수록 북한 사회 내 불만이 더 커질 것이다. 북한에서도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강경파도 있고 중국식 개혁을 원하는 온건파도 있다. 동독 주민들은 처음엔 독재정권에 맞서서 “우리가 시민이다”고 외쳤는데 점점 발전하면서 구호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로 바뀌었다. 북한도 그렇게 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처음 촉발이 어려울 뿐이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2021.09.11 00:20

  • “미국 9·11 이후 더 안전해졌지만, 테러 조직 확산도 부추겨”

    “미국 9·11 이후 더 안전해졌지만, 테러 조직 확산도 부추겨”

     ━  [SUNDAY 인터뷰] 앤드류 베이스비치 보스턴대 명예교수   “미국이 공격받았습니다(America is under attack).”   2001년 9월 11일 아침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 중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앤드류 카드 비서실장은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항공기 납치범들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 중 두 번째 빌딩에 충돌한 직후였다.   이 짧은 문장은 이후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고 이후 ‘끝없는 전쟁’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은 “우리 병사들을 데려오겠다”는 공약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미국이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몰입한 사이 중국은 ‘중요한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9·11 테러 2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이 미국과 세계에 주는 함의를 9일(현지시간) 앤드류 베이스비치(74) 보스턴대 명예교수와 함께 짚어봤다. 그는 베트남전과 걸프전에 모두 참전한 엘리트 군인 출신의 석학이다.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오늘날 안보 위협은 나라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감염병과 산불·홍수처럼 내부에도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군복도 공군력도 없는 탈레반에게 밀려   앤드류 베이스비치 미국과 세계는 9·11 이전보다 더 안전해졌나. 여전히 테러 위협이 존재하나. “둘 다 맞다. 미국은 테러 공격을 식별하고 대비하며 방어하기 위해 실질적 방어망을 구축해 놨기 때문에 훨씬 안전해졌다. 공항과 항만 등 입국 시 보안 검색을 강화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도 모두 방어 능력을 향상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9·11이 반복될 가능성은 작다. 반면 테러 조직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의 9·11 대응이 테러 조직의 확산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아프간이 다시 탈레반 손에 넘어갔다.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이나 알카에다 등 테러 조직의 온상이 될 가능성은. “아직 단정하긴 이르다. 새로운 탈레반 정권이 어떤 성격을 띨 것인가에 달렸다. 9·11 이후 아프간이 침공당한 뒤 20년간 쫓겨난 상황을 반복하고 싶진 않을 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다른 나라와 좀 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할 수 있다. 미국인은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만, 탈레반 정책과 아프간의 미래는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지난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퍼다인대 직원들이 9·11 테러 20주년을 기념해 교내에 미국 국기들을 세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결국 바이든의 혼란스러운 아프간 철군에 대한 평가는 탈레반에게 달린 건가. “대피 작전은 제대로 계획되지 않았고 잘못된 가정에 바탕을 뒀다는 것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을 탈출시켰지만 그 과정은 엉망이었다. 창피한 일이다. 정말 중요한 건 대피 계획 실패 여부가 아니라 그 전에 벌어진 20년 전쟁에 대한 평가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미국이 20년 전쟁을 치르고도 어떻게 적이 더 우세할 수 있는가, 그게 중요한 질문이다.”   미국이 당초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면 안 됐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 탈레반이 알카에다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게 명백해졌을 때 미국은 ‘그 어느 나라도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를 숨겨주면 중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는 정당화가 되지만, 그 후 나라 재건 프로젝트로 들어간 부분은 잘못됐다. 관리도 부실했다. 처음부터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을 찾으려면 냉전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미국이 두 개의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을 뿌리까지 파고들면 냉전 종식에 대한 인식이 자리한다. 이데올로기적인 측면과 군사적 측면이 있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냉전 승리는 자유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아메리칸 스타일에 대안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군사적으론 냉전 종식 후 미국의 우월감이 극대화됐다. 아프간과 이라크에 미군을 투입한 것에도 정권을 장악한 뒤 더 나은 삶을 보여주겠다는 인식이 깔렸다. 탈레반처럼 공군력도, 중화기도, 군복도, 장화도 없는 군대가 미군의 목표 달성을 막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현실이 되지 않았나.”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공격당하는 모습. 미국은 한 달 뒤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대규모 보복 공습에 나섰다. [뉴시스] 베이스비치 교수는 “9·11 테러는 냉전 승리에 도취돼 있던 미국에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 충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버액션한 게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 와중에 미미한 존재였던 중국이 부상했고 러시아도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미국이 초강대국의 힘을 믿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응징에 나섰지만 그 과정에서 초강대국 지위가 흔들리게 된 건 아이러니다. “미국은 자신의 입지에 대한 현실적 평가가 부족했다. 가진 힘과 우위를 과대 해석한 측면도 있다. 아프간에서 우리는 힘의 한계를 봤다. 기나긴 전쟁 개입은 미국을 약화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미국이 스스로에 대한 느낌, 단결력, 우리 제도와 믿음에 대한 자신감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가장 뚜렷한 방증이다.”   9·11 이후 15년 지나 2016년 당선된 트럼프가 이 사건의 영향이라니, 무슨 뜻인가. “수많은 미국인이 자격 없는 트럼프에게 왜 표를 줬을까. 지난해 대선 때는 왜 4년 전보다 1000만 명이나 더 트럼프를 뽑았을까. 많은 미국인의 불만 중 하나는 끝없는 전쟁이었다. 트럼프 당선을 이끈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미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져 있었고 우리가 왜 거기에 가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지나   미군과 영국군이 지난달 20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주민들의 해외 이송 작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말 9·11 테러 후 20년 만에 아프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AP=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인 2009년 아프간 철군을 주장했지만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병력을 늘렸다. 그때 바이든 주장이 채택됐다면 트럼프 당선 결과는 달라졌을까. “답하기 어렵다. 기나긴 전쟁이 트럼프를 찍은 유일한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의 분배 등 경제 문제, 인종주의, 성차별 등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기득권층을 깨부수고 기존 제도를 뒤엎겠다는 트럼프에 투표한 것이다.”   바이든은 중국에 맞서 동맹을 규합하려고 한다. “신냉전은 실수가 될 것이다. 중국은 환경 문제 등에서 협력할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꼽힌다. 중국과 냉전을 벌이면서 어떻게 협력도 동시에 하겠다는 건지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바이든은 때론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연상시키면서도 동맹을 복원하고 세계 리더 자리를 되찾겠다고 하는데 상충되지 않나. “아직은 초기인 만큼 더 지켜봐야 한다. 사상 초유의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시작한 정권이다. 산불과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 수습도 큰 과제다.”   9·11 테러가 일어난 해인 2001년 개도국이던 중국이 이젠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경쟁자로 부상했다. “9.11은 미국의 경로를 완전히 바꿔놨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사상자라는 대가를 치렀다. 지난 20년간 우리가 해외에서 돈을 낭비하는 동안 중국은 경제를 키워왔다. 미국은 이제야 인프라 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베이스비치 교수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백인이 유리한 상황을 누리는 시대는 지났다고 단언했다. 또 미국의 국가 안보에 대한 가장 긴급한 위협은 더 이상 중앙아시아처럼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질병, 기후변화, 환경 악화, 사생활 침해 등이라고 지적했다. 정작 ‘집’에서 안락함과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게 더 큰 위협이란 얘기다. 그는 “미국은 밖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 부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며 “코로나19와 산불·홍수 등 정작 우리를 위협하고 자유를 제한하며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경고했다.   ■ 앤드류 베이스비치 「 196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프린스턴대에서 외교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차 걸프전에도 참전했으며 대령 예편 후 존스홉킨스대를 거쳐 보스턴대에 자리를 잡았다. 부모도 모두 2차 세계대전 때 군 복무를 했고, 아들은 이라크전에 장교로 참전했다 2007년 전사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처음부터 해서는 안 될 전쟁이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아들의 죽음이 전쟁을 개시한 조지 W 부시 대통령 책임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내용의 칼럼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가톨릭 보수주의자로 소개했다. 」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park.hyunyoung@joongang.co.kr

    2021.09.11 00:20

  • “가짜 농민 투기 근절 위해 농지 소유주 전수조사 시급”

    “가짜 농민 투기 근절 위해 농지 소유주 전수조사 시급”

     ━  [SUNDAY 인터뷰] 임영환 경실련 농업개혁위원   “이 모든 사태는 결국 농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시작됐어요. 농지법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그토록 오랫동안 얘기해 왔건만…. ”   최근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잇따라 드러난 데 대해 임영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농업개혁위원(법무법인 연두 변호사)이 내놓은 냉정한 진단이다. 실제로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국회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심 사례 30건 중 12건이 농지법 위반에 해당됐다. 지난 2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도 대부분 개발 호재가 있는 농지의 사전 매입과 관련한 것이었다.   헌법 제121조에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규정돼 있다. 원칙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민이 갈수록 줄면서 농지를 재산 증식과 투기 수단으로 삼으려는 일부 외지인들의 행보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농지 소유 문제를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다.   임영환 경실련 농업개혁위원이 농지 투기 근절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임 위원은 10여 년 전부터 경실련 등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농업 문제와 농지법 개혁에 관심을 쏟아온 ‘농지법 전문 변호사’다. 경실련이 지난 7~8월 실시한 국회의원과 광역·기초단체장 농지 수요 실태조사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고 지난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농지법 개정안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도 적극 참여했다. 임 위원은 “투기만 노리는 ‘가짜 농민’ 대책은 물론 농지를 앞으로 어떻게 보전해 나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농지 투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행 제도가 ‘가짜 농민’을 양산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지를 취득할 수 있는 예외 사례가 계속 늘고 있다. 농업진흥구역의 경우 비농민의 농지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만 그 외 지역의 농지는 1000㎡(약 300평)까지 주말농장용으로 아무 규제 없이 취득할 수 있다. 문제는 지역 개발에 따른 농지 투기가 대부분 농업진흥구역 밖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취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 농사를 짓는지 안 짓는지에 대한 관리 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LH 사태를 계기로 농지법이 개정됐는데. “농지 취득과 관련해 과거보다 꼼꼼하게 서류를 제출하도록 강화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후 관리 체계는 여전히 부실한 실정이다. 농지에 대한 전수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행하는 실태조사는 읍사무소 직원이 도면을 들고 현장에 나가 지역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며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직원 한 명이 그 많은 땅을 어떻게 다 살펴볼 수 있겠나. 그러니 소유주의 자진 신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불법과 편법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어떤 부분부터 개선해야 할까. “농정을 체계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인 농지가 얼마만큼 확보돼 있고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농민이 실제로 농지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고 비농업인은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고 있는지, 그 추이는 어떻게 변하는지 모니터링하는 게 관건이다. 투기꾼을 잡는 건 이 같은 농지 관리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과 중 하나다. 하지만 농지 전수조사는 일제 강점기 때 한 차례 실시된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LH 사태 이후 정치권과 학계에서도 여러 의견과 개선책이 제기되고 있다. “농지 소유 규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대통령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행 규제라면 이를 시대 변화에 맞게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임 위원은 “비농민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소유를 통해 시세 차익이나 임대 수익을 얻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농지 임대료가 높아지면 당연히 생산비용도 높아질 것이고 결국 밥상 물가도 영향을 받게 된다. 또 농산물에 대해 제값을 못받게 되면서 결국 농업을 접게 되는 농민도 늘게 된다. 임대료가 뛰어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자영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임대차보호법이 생겼듯이 농지에 관한 임대차보호법도 함께 강구할 필요가 있다.”   1996년 농지법 시행 이전에 취득한 농지나 상속 농지도 규제 예외인데. “최근엔 상속 농지 문제가 더 부각되고 있다. 현재 국내 전체 농지 중 50~60%가 상속 농지로 추산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농민들의 고령화로 상속 농지가 눈에 띄게 늘고 있지만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상속받은 땅을 처분하거나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일단 소유하고 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다 보니 농업 생산량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임 위원은 그러면서 농지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식량 안보’에 주목했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풍부한 시대에 아무것도 아닌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국가적 차원에선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밀의 경우 매년 가격이 널뛰고 있다. 최근엔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추세다. 전염병 유행처럼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농지 보전이 필수다. 식량 위기는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다.”   향후 과제는. “일단 농지 전수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이게 바탕이 돼야 전문가들과 정부·국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현실에 맞는 대책을 강구할 수 있지 않겠나. 그 속에서 지자체들도 각자 특성에 맞게 비농민의 농지 소유 면적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제한할지에 대한 합리적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거다. 인력과 예산 문제로 당장 시행하기 어렵다면 시범사업 차원에서 몇몇 지역에서 먼저 실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1.09.04 00:22

  • “생명은 공생관계, 나를 위한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한 것”

    “생명은 공생관계, 나를 위한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한 것”

     ━  [SUNDAY 인터뷰]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마스크 한 장이 남과 나, 공과 사의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공생의 가치를 보여줬다.”   이어령(87) 전 문화부 장관이 27일 오전 열린 서울대학교 제 75회 후기 학위 수여식에서 전한 메시지다. 이날 비대면으로 열린 온라인 졸업식에서 상영된 동영상을 통해서다. 축사에 담긴 의미를 더 묻기 위해 지난 9일 서울 평창동 자택의 녹화 현장을 찾았다.   그는 수척해 보였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귀가 자꾸 울리고 목도 마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축사한 사람들은 복장이 어땠느냐”고 물은 뒤 넥타이와 재킷을 갑옷처럼 단단하게 갖춰 입고 자리에 앉았다. 10분을 위한 녹화가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 전 장관은 암 투병 사실을 2019년 세상에 알렸고 별다른 치료 없이 집필에 몰두해왔다.   이날 이 전 장관은 “마스크를 누가 쓰라고 해서 쓸 뿐이라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사회냐”며 “마스크 착용에 담긴 ‘공생’의 의미를 졸업생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터득해야 우리 사회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찮고 흔한 마스크가 70억 인류 얼굴 바꿔   지난 9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서울대 졸업식 축사를 녹화하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김상선 기자 2008년 서울대 입학식에서는 ‘떴다 떴다 비행기’라는 주제로 축사를 하셨는데 이번 졸업식에서는 마스크 한 장이 떴습니다. “2008년 무렵 우리나라와 시대 상황은 뜨기만 하고 날지를 못하는 종이 비행기와 같았지요. 그래서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의 동요 노랫말은 유치원생이 아니라 입학식을 하는 젊은이들은 물론 우리나라 전 국민이 불러야 하는 노랫말이었습니다. ‘우리 비행기’라는 말을 입학생 개인 이름, 학교나 기업체명, 무엇보다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보세요. 세계 10위 경제권으로 부상(浮上)한 한국을 ‘이머징 스테이트(emerging states)’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코로나19라는 ‘이머징 바이러스(emerging viruses)’로 인해 마스크가 떠올랐습니다. 종이 비행기처럼 자체 동력과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수면 위로 갑자기 떠오른다는 이머징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네요. 종이 비행기와 마스크의 공통점은 또 무엇이 있습니까. "종이 비행기도 마스크도 하찮고 흔한 것들이지만,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본다는 말대로 오늘의 상황 전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지요. 70억 인류의 얼굴을 일시에 바꿔 놓은 게 바로 그 마스크 한 장이 아닙니까. 인터넷에는 마스크를 쓴 모나리자까지 등장하고 있어요.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단 마르셀 뒤샹도 하지 못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뭉개버린 것입니다.”   마스크는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모나리자의 입을 가린 마스크에서 우리는 지금껏 그냥 지나쳤던 모나리자의 눈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환갑을 지난 옛 제자들의 마스크를 쓴 얼굴에서 20대 젊음 그대로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나는 코로나 패러독스 효과라고 부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젊은 학생들이 교과목에도 없던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의 이론을 학습하게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까닭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해 울고 있는 것이다’ 같은 릴케의 시를 모르는 사람들도 무관한 사람끼리 운명처럼 뒤얽혀 있는 두렵고도 신비한 생명체의 비밀을 익히게 된 것이지요.”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한 마스크”라는 말씀은 ‘자리행 이타행(自利行 利他行)’이나 ‘자타불이(自他不二)’와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경영학에서 말하는 ‘윈윈 전략’이지요. 원래 우리 말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같은 말들이 많아요. 하지만 서구 문명이 주도해온 실제 경쟁사회에서는 모두가 공염불이지요.”   마스크의 기능과 본질이 공과 사, 자와 타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선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코로나 패러독스가 현실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스크를 컴퓨터라고 생각해보세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이만 시스템은 0과 1의 대립과 차이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앞으로 등장하는 양자 컴퓨터는 0과 1이 포개져 있어요.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적 차이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함께 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이솝 우화 속 게임 규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알면 됩니다. 뭍에서 뛰는 토끼와 바다에서 헤엄치는 거북이에게 땅에서 달리기 경주를 시키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거북이가 지는 게임입니다. 오늘날 2030 젊은이들이 절망하는 것이 바로 불공정한, 잘못된 게임 규칙과 그것을 일방적으로 획일화하는 잣대입니다. 만약 게임 룰을 바꿔 헤엄치는 경주를 하면 어떨까요. 토끼는 패자가 아니라 익사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단일의 물질 자본(돈)을 잣대로 하는 사회를 다양한 생명을 자본으로 삼는 사회로 바꿔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은 이것도 저것도 함께하는 시스템     공생의 가치를 담은 마스크의 의미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경제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가 ‘생명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서둘러 간행한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축사는 건강 때문에 여러 번 고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몸이 불편하고 나이도 아흔 줄이에요. 늙고 병들었지만, 떠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학위 수여식에서 덕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닌 ‘너와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 한 장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한다면 출신 연령, 성별 그리고 건강 조건에 관계없이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갈 동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어령 전 장관은 투병 와중에도 새로 음악 작업을 선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오는 9월 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재개관을 기념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준비한 작품 ‘천 년의 노래, 리버스’ 작사 작업에 공동으로 참여한 것이다. 당초 건강을 이유로 고사했지만 다섯 번이나 찾아온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오고초려’에 협업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동안 써온 글을 토대로 가사를 만들었다.  1972년 발간한 『한국인의 신화』에서 발췌한 1장 인트로 ‘신시(神市)의 아침’ 부분의 마지막 가사에는 이렇게 포스트 코로나의 희망을 담아냈다.   “폭력과 힘을 이기는 인내와 끈질김/ 우리 민족이다/ 횡포에 음악으로, 강압에 시로 대항하는/ 우리/ 긴 동굴의 시간을 기다리고/ 마침내 맞이하는 아침/ 신시의 아침에서 만나자.”     ■ 서울대 졸업식 축사 전문 「 영광스러운 졸업식에 축사를 하려고 나왔지만 제 눈앞에서는 검은 카메라 렌즈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랑스러운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축하의 꽃다발도, 축하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100년 가까운 서울대 역사 가운데 오늘 같은 졸업식을 치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좋든 궂든 여러분들은 비대면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그룹에 속한 졸업생이 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앞당겨 학습하게 되었고, 동시에 살결 냄새 나는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세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강의 듣는 수업만이 아니라 잔디밭 교정을 거닐며 사사로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는 것 역시 대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디지털 공간의 ‘접속’과 아날로그 현실의 ‘접촉’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융합’하는 디지로그(digilog=digital×analog) 시대를 살아갈 주역이 된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기침 하나가 내 일상을 뒤집어 놓는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 생명의 내재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물질 자본이 생명 자본으로 전환하는 현장도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의 학습 효과로 인해 누구나 쓰고 다니는 똑같은 마스크 한 장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시각과 생각을 얻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유를 물으면 “나와 남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간단한 대답 같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쓴다”라는 사적·이기적 답변이 아니면 “남들을 위해서 쓴다”의 공적·이타적 답변 밖에는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나(自)에게 득(得)이 되는 것은 남(他)에게는 실(失)이 되고 남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나에게는 해가 되는 대립 관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인 배재의 논리가 지배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마스크의 본질과 기능이 그 어느 한 쪽이 아닌 양면을 모두 통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해서 쓰는 마스크”라는 공생 관계는 지금까지 생명의 진화를 먹고 먹히는 포식 관계, 남을 착취하는 기생 관계로 해석해 왔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똑같이 마스크를 쓴 얼굴이지만 그것을 쓰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포스트 코로나의 앞날이 결정될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70억 명의 세계인을 향해 당신은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지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나와 남을 위해서”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서 쓰라고 하니까 쓴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획일주의와 전제주의 밑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여러분은 자타(自他)와 공사(公私)의 담을 넘은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주역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손 안에 있는 학위 수여증은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보증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비대면으로 치루어진 졸업생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저의 축하 메시지입니다. 」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2021.08.28 00:02

  • “베트남은 ‘사랑하는 곳’…중국만은 꺾고 싶은 염원 알아”

    “베트남은 ‘사랑하는 곳’…중국만은 꺾고 싶은 염원 알아”

     ━  [SUNDAY 인터뷰] 베트남 축구 영웅 박항서 감독   빙부상을 당해 잠시 귀국했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박항서 감독은 “계속 성적이 좋아 베트남축구협회와는 허니문으로 가고 있다”며 일부 유튜버들이 제기한 불화설을 일축했다. 박종근 기자 ‘베트남 축구영웅’ 박항서 감독이 조용히 귀국했다가 소리 없이 출국했다. 7월 10일 장인의 부음을 들은 박 감독은 그날 저녁 비행기로 귀국해 상을 치른 뒤 고향의 노모를 찾아뵙는 일 외에는 조용히 지냈다.   박 감독은 지난 6월 16일, 베트남 대표팀을 맡은 4년 시간 중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진출.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초, 동남아 국가 중 유일하게 카타르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들어선 것이다. 베트남은 최종예선 B조에서 일본·호주·사우디·중국·오만과 맞붙는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박 감독은 어떤 매체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거취와 관련해 온갖 풍문이 떠도는 데다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어떻게 왜곡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다.   지난 28일 베트남으로 돌아가기 직전에야 박 감독은 중앙UCN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서울 올림픽공원 내 스포츠산업지원센터에서 열린 인터뷰는 1시간 넘게 진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어느 팀과도 붙어볼 만하다’ 자신감     사상 첫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베트남축구협회가 만든 포스터. [중앙포토] 가장 시급히 할 일은 뭡니까. “들어가면 최소 2주 격리해야 합니다. 최종예선을 앞두고 8월초 소집해서 훈련할 명단을 확정하는 게 급합니다. 베트남은 남쪽 호치민에 있는 내국인도 북부 하노이로 오면 2주 자가격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점까지 고려해 9월 2일 사우디와의 첫 원정경기에 출전할 명단을 확정할 생각입니다.”   베트남 축구는 뭐가 강해졌나요. “베트남 축구의 강점이라면 국민들의 축구사랑, 정부의 관심이죠. 프로 1부 14개, 2부 12개 팀이 있고 3부도 있을 정도로 시스템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선수들의 체력과 체격이 좋아진 편이고, 동남아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서 어느 팀과도 할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3년 전 인터뷰 때 “선수들 아침 식사로 쌀국수 대신 우유를 먹게 했다”고 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쌀국수는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아침식사지요. 지금도 쌀국수는 나오지만 그것만으로는 단백질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니 우유나 계란 등을 보충하라는 겁니다. 대표팀에 유명한 영양학 교수를 초빙해 식단과 영양이 왜 중요한지 강의를 들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왜 시합 전후에 이 음식을 먹어야 되는지 전문가가 이야기하니까 납득하더라고요.”   최종예선 상대 중 본선 진출을 위해 꼭 이겨야 할 팀은? “목표가 본선 진출이라 이야기 한 적 없어요. 월드컵 본선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현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요. 이제 동남아를 벗어나 처음으로 아시아 정상권과 경기를 합니다. 다섯 팀은 각자 색깔을 갖고 있는 강팀이죠. 이런 팀을 상대로 베트남 축구의 현실과 부족한 게 뭔지 테스트하고 부딪쳐보면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라고 봅니다.”   얼마 전 베트남 대표인 부이티엔중 선수가 “중국과 함께라면 꿈에 그리던 최종예선 1승도 할 수 있다”고 말해 파장이 일었다. 박 감독은 “그 얘기를 듣고 대표선수 채팅방에서 ‘개인이 한 이야기는 책임을 져라. 자기가 감독도 아닌데 중국을 이긴다는 얘기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얘기만 하라’고 주의를 줬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감독은 “베트남이 중국을 이기겠다는 의지는 강합니다. 역사적인 부분도 있고, 많은 베트남 국민이 중국과의 경기는 꼭 이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만 갖고 되는 건 아니고 우리가 잘 준비해야죠” 라고 중국전에 임하는 각오도 밝혔다.   월드컵 2차예선 최종전을 앞두고 “최종예선에 통과한다면,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말해 논란이 있었는데요. “말하다가 중간중간 잠깐 쉰 건 통역이 놀라서 묻는 바람에 그랬고요. 그 이야기는 DJ(에이전트 이동준 대표)가 얘기했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내년 1월까지 계약이 돼 있습니다. 월드컵 최종예선 통과하는 게 제가 대표팀 감독으로서 최고의 올해 목표다 그 부분을 이야기한 거지요. 나머지 뜻은 전혀 없고, 계약을 약속한 것은 그대로 지킬 겁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면 베트남에 남겠지만 나가지 못한다면 떠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나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나를 관리해주는 회사 대표가 있기 때문에 대표가 모든 걸 해줄 거라 전적으로 믿고 있고요.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 보면 제 일에 집중을 못하기 때문에…. 1월 31일 계약 종료인데 플러스1이 남아 있어요. 그 플러스1(계약 1년 연장)이라는 건 베트남축구협회와 내가 합의가 돼야 하는 부분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계약 만료) 3개월 전에 협의를 해야 하는 거라고 하니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정점, 잊혀지지 않을 나라   감독에서 은퇴하면 베트남에서 유소년 축구학교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베트남이 유소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한국처럼 학원축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프로 팀이 다 유소년 육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북부 하노이 쪽에는 큰 그룹이 하는 PVF라는 아주 좋은 축구센터가 있습니다. 베트남이 길기 때문에 중부 남부에 거점을 만들어 권역별로 세 군데로 나눠서 하면 좋겠다 싶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외국인이 축구센터 만드는 건 내국인과 같이 하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베트남 기업이나 이런 데서 제안이 오면 할 수 있지만….”     QR코드를 찍으면 박항서 감독 인터뷰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 감독은 유튜브에 대해 감정이 안 좋다. 일부 유튜버가 조회수를 올리려고 ‘박항서, 태국행 확정’ ‘베트남축구협회와 갈등’ 같은 근거 없는 가짜 뉴스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인터뷰 막판 ‘즉문즉답’ 게임을 했다. ‘나에게 베트남은 ○○○○이다’ 질문에 박 감독은 “사랑하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정상에 있지 못했을 때 가서 베트남 국민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좋은 선수·스태프들 만났고, 저에게는 사랑하는, 잊혀지지 않을 국가일 수도 있고, 제 인생에서 정점에 와 있던 곳이죠.”     ■ 소년 시절 박항서, 개구쟁이에 공부도 잘한 골목대장 「 프로축구 럭키금성 소속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박항서(오른쪽). [중앙포토] 2019년 1월에 박항서 감독의 고향인 경남 산청군 생초면을 찾아 ‘동네 행님’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들은 ‘소년 박항서’에 대해 “늦게 축구를 시작했지만 공도 예쁘게 차고 중학교 때는 전교 3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도 잘 했다”고 회상했다.   개구쟁이 박항서는 의협심이 강하고 지는 걸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축구선수 출신인 선배 한 분이 황당한 일화를 들려줬다. “여름방학에 서울서 형들이 내려와 동네 여고생들과 강가에 놀러갔지. 중학생인 항서가 따라오기에 ‘넌 저리 가라’고 쫓아냈더니 부아가 난 항서가 우리가 나중에 먹으려고 냇가에 담가 뒀던 수박·참외 담은 통 안에 똥을 싸고 도망갔다 아이가.”   박 감독은 ‘가짜 뉴스’라며 펄쩍 뛰었다. “그분이 원래 뻥이 좀 심합니다. 수박을 훔쳐서 깨버리기는 했겠죠. 제가 키는 작아도 싸움은 좀 했고, 불의나 불이익 당하는 걸 못 참아요. 형들한테 달려들다가 두들겨 맞기도 많이 했죠”라며 껄껄 웃었다.   머리카락 얘기도 나왔다. 촬영하는 젊은 직원을 가리키며 그는 “저분처럼 5대5 가르마 탄 분들 진짜 싫어해요”라고 농담을 한 뒤 “저도 머리 좀 났어요. 솔직히 모발 이식을 좀 했지요. 남들은 옛날보다 더 보기 좋다고 하는데 처는 ‘당신의 캐릭터가 없어진다. 나이 들어서 머리에 신경 쓰냐’고 그러는데 나이 드니까 더 외모에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UCN 부사장 jerry@joongang.co.kr

    2021.07.31 00:20

  • “mRNA 백신 신속 개발, 주류와 다른 방향 연구 산물”

    “mRNA 백신 신속 개발, 주류와 다른 방향 연구 산물”

     ━  [SUNDAY 인터뷰]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   요즘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자부심도 맛보지만 초라함도 느낀다. 방역 선진국이지만 정작 백신 개발·확보에서 뒤처진 현실 말이다. 남들처럼 백신을 초고속 개발하려면 결국 기초과학 역량이 튼튼해야 한다는 게 상식적인 답일 텐데,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기초과학 선진국이 되려면 과연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더구나 빼어난 인재들이 의대나 법대로만 몰리는 현실에서 말이다.   케임브리지대 과학사- 과학철학과 장하석(54) 석좌교수에게 그 해법을 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직함에서 드러나듯 그는 이를테면 ‘훈수꾼’이다. 한 분야에 매몰돼 연구에 매진하기보다 과거 과학 연구의 혁신적 사례들을 분석해 그것들의 과학적·과학철학적 의미를 캐는 게 전문 분야다. 그런데 그런 작업에 매달린 끝에 도달한 결론이 무척 파격적이다. 과학 연구에서 하나의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라 일원주의·환원론·실재론 같은, 유일한 진리에 집착하는 모든 과학적 입장과 도그마를 문제시한다. 그렇다면 우주 로켓은 어떻게 쏘아 올리나. 그런 일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단 하나의 정답이 필요한 것 아닌가.   문학작품처럼 과학도 다양한 관점 중요   케임브리지대 과학사-과학철학과 장하석 석좌교수.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물은 H2O인가?』에서 과학 다원주의 주장을 펼쳤다. [중앙포토] 장 교수의 주장은 우리 주변의 과학적 사태들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거다. 모든 자연현상을 모조리 설명하는 단일한 과학 원리 같은 건 찾기 어려워 보인다는 얘기다. 여러 개의 과학 이론이 ‘실재’에 부합하는 나름의 진실을 각각 갖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과 과학에 대해 지금보다 좀 더 겸허하고, 보다 열려 있어야 한다. 서로 모순된다 하더라도, 다양한 과학 이론 시스템들을 동시에 인정하자는 다원주의적 주장이다.   이런 생각이 담긴 장 교수의 책 『물은 H₂O인가?(Is Water H₂O?)』(김영사·사진)가 한국어판으로 막 출간됐다. 난해함 때문인지 2012년 영어 원서 출간 후 9년 만이다. 역시 자명하다고 여겨왔던 과학 지식을 문제 삼는다. 물의 분자식 말이다. 과학 문외한은 전체 5개 장의 각 1절만 읽어보라는 장 교수의 조언을 따랐다.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낑낑대다 보니 새로운 생각을 접하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기자가 옳게 이해했다면 물은 H₂O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지난 18일 장 교수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영국의 코로나 상황이 다시 심상치 않다고 들었다. “여기 케임브리지는 심각하지는 않다.”   과학사가, 과학철학자 입장에서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평가한다면. “코로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해 뭐라고 하기가 그런데, 일단 예상보다는 백신이 빨리 개발됐다. 여러 나라 정부가 허가를 빨리 내주고 지원도 많이 했지만 결국 지난 수십 년간 관련 분야에 대한 기초과학 연구를 계속 해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화이자나 모더나는 소위 mRNA(메신저 RNA)를 활용한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백신을 개발했는데, 어떤 면에서 이들은 좀 허황된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전혀 새로운 개념의 백신을 개발하게 된 거다. 진부하게 해석하자면, 항상 이렇게 광범위한 기초과학 연구를 하고 있어야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화이자나 모더나 사람들이 다원주의적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약회사가 함부로 허튼짓은 안 한다. 돈을 벌 비전이 있기 때문이었겠지만 mRNA 방식을 그렇게 연구했다는 거는 어떻게 보면 모험을 한 거다. 그렇게 주류와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게 내가 말하는 과학 다원주의의 기초다. 그러니까 하나에 올인하지 않는 거다. 어느 길이 끝까지 뚫릴지 모르니까 여러 길을 뚫어 놓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다원주의의 첫 스텝이다. 그러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 간에 교류와 협업도 이뤄질 수 있다.”   과학계 주류는 다원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특히 심한데, 세계적으로도 과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가령 문학작품은 관점에 따라 의견차가 있을 수 있고 다른 해석도 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 반면 과학 문제에 있어서는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고, 그 진리를 찾아 모두가 동의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한다. 그런 과학계 주류에게는 다원주의 주장이 파격적으로 들릴 거다. 하지만 우리가 과학의 정답주의를 벗어나면 더 좋은 성과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를 뜯어보면 생각보다 다원주의적인 경향이 상당히 많았다.”   물은 H2O인가? 장 교수의 과학 다원주의를 물의 경우로 생각해 보면 이렇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물은 더이상 수소 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가 결합한 단순한 화합물이 아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소+산소=물’ 공식이 확립된 건 18세기 말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책에서는 ‘라봐지에’로 표기)가 주도한 ‘화학혁명’을 통해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조기 퇴출됐다. 플로지스톤 시스템은 라부아지에 시스템과 다른 방식으로 수소와 산소, 물의 관계를 설명한 이론이라고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성급히 폐기되지 않고 라부아지에 시스템과 공존했더라면 이 분야 과학이론이 더 빠르게 발전했으리라는 생각이 장 교수의 다원주의다.   학계에서 별난 주장 취급받는 건 아닌가. “상당히 반응이 좋은 편이다. 꼭 나 때문이 아니라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비슷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원주의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개별 연구자 입장에서는 자기가 파고드는 분야에 진리가 있다는 일원주의를 포기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잡생각 하지 말고 연구에 집중하자, 저런 이상한 생각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우리는 이 길을 뚫는다, 역시 이런 태도가 많긴 하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빗댄다면 폭력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각 정당이 자기들만 옳다는 주장을 펴고 투쟁까지 마다하지 않는 장이 다당제 민주주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발한 다당제 민주주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보다 잘 살 수 있게 해준다. 과학도 유년기에는 진리는 하나고, 우리 모두 그것만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과학이 성숙해지면서 서로 관점이 다르다고 상대를 압박하지는 말자,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고 그런 태도가 실천되어야 한다.”   다원주의도 결국 하나의 입장이니까 남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는다면. “철학적으로 심각한 얘기다. 또 정치에 비유하자면, 다원주의의 한계는 다원주의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은 용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가령 독일에서 나치당 창당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하지만 독재가 좋다는 생각이나 표현의 자유 자체는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돌아와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 사람들의 연구를 막지만 않으면 된다. 실용적인 문제도 있는데, 정말 이상해 보이는 연구도 지원해줘야 하느냐다. 영국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가이아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인데, 미친 시도가 어떻게 유용할지 알 수 없으니 도박하듯 영국 정부가 과학 예산의 1%만이라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얘기를 해보자. 코로나 백신 개발을 못 하는 건 역시 기초과학이 허약하기 때문인가. “박정희 정권 때까지만 해도 과학 육성은 기술 개발해서 경제발전에 쓰자는 단기적인 거였다. 박 대통령은 어떻게 보면 비전이 긴 분이었는데, 우리도 중화학공업 일으킬 수 있다, 자동차 만들 수 있다, 그런 거였지 기초과학을 육성해 당장은 상상 못 하는 기술을 언젠가 개발하자는 건 아니었다. 그런 식은 이제 밑천이 떨어졌다. 코로나 백신을 개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잘살게 됐다. 이제는 해볼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다.”   이미 과학 분야 연구개발 투자비가 상당하지 않나.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정부가 성과를 기준으로 지원하는 느낌이다. 기초학문 연구가 작년에 돈 받았다고 올해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문화적으로도 좀 힘들다고 본다.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과학도 드라마처럼 문화 일부로 생각해야   역시 빨리빨리 문화가 문제인가. “정부 지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문화도 문제다. 기초과학을 연구하려는 학생이 없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85학번인데, 당시 대입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이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하던 시기가 있었다. 순수과학에 대한 그런 정열이 왜 사그라들었는지 안타깝다. 확실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기초과학을 연구한다는 건 학생 개인에게도 모험이다. 연구할 인력이 없는데 정부가 아무리 기초과학을 지원한들 뭐하겠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관심 갖게 하려면. “과학을 문화의 일부로 여기게 해야 한다. TV 드라마나 예술작품을 즐기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미개인들조차 신화가 됐건 원시적인 종교가 됐던 그런 틀을 통해 아, 자연은 이런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곳이다 하는 세계관을 갖는 게 인간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현대인은 자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학교 졸업만 하면 관심을 끊는다. 부모님들이 과학 대중서라도 읽고, 아이들을 동물원에라도 데리고 가고, 생물학과 진학하겠다고 할 때 말리지 말아야 한다.”   공부를 잘하는 비결이 있다면. 해외 유학 갈 때 불안감은 없었나. “매혹을 느끼는 학문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나는 운이 좋아 집안의 지원이 튼튼했지만 훌륭한 학자나 예술가 가운데 가난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일에 빠졌던 사례가 역사적으로 많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장하석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공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과학사가, 과학철학자다.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차남,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의 동생이다.

    2021.06.26 00:23

  • “지방대가 살아야 지방이 산다…교육 다양성 적극 허용을”

    “지방대가 살아야 지방이 산다…교육 다양성 적극 허용을”

     ━  [SUNDAY 인터뷰] 정용덕 금강대 총장   “우리 대학의 목표는 ‘정원 채우기’가 아닙니다. 잠재력 있는 학생을 스카우트해서 미래의 인재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정용덕 금강대 총장의 발언 중 ‘학생 스카우트’라는 표현에 귀가 번쩍 띄었다. 지방소재 대학들이 정원 미달로 애를 먹는다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충남 논산시에 위치한 금강대는 등록금 무료의 인문사회과학 중심 기숙형 대학이다. 정 총장은 “금강대를 ‘한국형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대학으로 가꾸고 싶다”고 했다.   수도권 대학도 지방만큼 정원 줄여야   충남 논산의 캠퍼스 본관 앞에 선 정용덕 금강대 총장. 금강대는 인문사회과학 중심 대학으로 등록금이 무료다. 김성태 객원기자 21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 금강대 공공정책연구원에서 만났을 때 그는 “지방대학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방에 위치한 소규모 대학이란 조건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게 하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미국의 ‘리버럴 아츠’ 대학들은 대개 한적한 교외에 있지만 명문 대학으로 꼽힌다. 다만, 비싼 등록금이 문제다. 금강대는 불교 천태종단의 지원으로 운영되기에 등록금이 아니라 오히려 장학금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던 1995년 그는 고 김광웅 교수 등과 더불어 공공리더십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동부와 서부의 ‘리버럴 아츠’ 대학들과 영국의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 내 각종 칼리지 현황을 조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금강대가 오는 3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여는 국제학술회의도 주목된다. 정 총장을 만난 목적은 이 학술회의에 대해 들어보려는 것이었는데, 대화는 우리나라 대학이 처한 위기의 현실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대학을 평가할 때 서울 소재 큰 규모 대학의 잣대로만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내년 개교 20년을 앞둔 금강대가 학교의 위상을 대내외에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준비했는데, 행사의 규모나 짜임새에서 서울의 주요 대학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번 학술회의의 주제는 ‘인공지능 시대의 공공정책과 인성교육’이다. 인문사회과학 중심인 금강대의 특성상 아무래도 인성교육에 방점이 찍히는 것 같다. 인공지능 시대의 본격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면서, 기계가 아닌 인간의 특성이나 윤리·도덕을 살려 나가는 길을 동시에 모색해보자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한다. 다음은 일문일답.   인공지능 시대가 인류에게 가져올 긍정적인 측면부터 봐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전개될 것이다. 무릇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래왔듯이 인공지능도 인류 문명의 진보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본격화되면 우선 단순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일들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육은 어떻게 바뀔까? “아마 전통적인 교육 내용과 교수법은 점차 유용성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교수에겐 단순 지식 전달보다 함께 토론하며 학생이 생각하는 방법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커리큘럼을 짜고 하는 일은 여전히 교수의 주요 업무일 테고, 어떤 경우에도 마지막 판단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내리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특별히 강조해야 할 인성교육의 내용은 무엇일까? “낙관적인 전망은 과학기술을 어떤 목적으로 발전시키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해 우리가 계속 고민하고 대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공지능이 인문사회과학의 영역과 만나야 하는 지점이다. 인간을 능가하는 수준의 지능을 가진 기계와 함께 사는 지혜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고 본다.”   등록금 대학 자율 결정 등 고려할만   학령인구 감소와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지방소재 대학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올해에 지방에 있는 거의 모든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상태로 진행된다면 수년 내에 많은 수의 대학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지방대학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는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 등록금이 수년째 동결되고, 팬데믹 상황에서 온라인 강의 준비로 이전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소재 대학의 어려움을 해소할 방법이 있을까? “정원을 줄일 때 지방뿐만 아니라 수도권 대학들도 같은 비율로 줄였으면 한다. 또 등록금을 대학 자율로 결정하게 하거나 아니면 국가가 일괄 지원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 서구의 교육 선진국처럼 교육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학술회의는 당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린다.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전 교육부 장관)가 ‘한국 교육의 성찰 : 성과와 과제’를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한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원준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스트랜지 마이클 스웨덴 말뫼대 교수, 피니 매리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행정대학원 교수, 키쿠치 마사오 일본 메이지대 교수, 박휴용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 신동호·전광수·정상교 금강대 교수 등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배영대 학술전문기자 balance@joongang.co.kr

    2021.06.26 00:21

  •  “미술은 100% 자유, 피카소 그림에 화투 합성도 매력 있다”

    “미술은 100% 자유, 피카소 그림에 화투 합성도 매력 있다”

     ━  [SUNDAY 인터뷰] 양수리서 그림 전시회 연 조영남   칠순 조영남씨는 일인다역을 거뜬히 해낸다. 신인섭 기자 일흔여섯 영남씨는 오늘도 바쁘다. 어제도 바빴고 내일도 그럴 것 같다. 어제는 이를테면 재판 때문에, 오늘·내일은 미술 전시 때문이다. 5년을 끈 초유의 미술품 대작 사기 사건에서는 피고인 화가로, 그러면서 본업인 가수로, 지난 2월부터 중앙SUNDAY에 매주 한 면 연재하는 회고록 ‘예스터데이’의 필자로, 거기다 약방의 감초처럼 수시로 호출되는 방송인으로, 웬만한 젊은 사람에게도 벅찬 일정을 너끈히 소화하는 그를, 나이대접을 잠시 접고, 영남씨라고 젊게 부르자.     이런 영남씨건만 우리가 그에게 항상 다정했던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에게는 적지 않은 ‘안티’가 생긴 듯하다. 최근엔 전 부인 윤여정씨의 아카데미상 수상과 관련된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윤씨가 상을 받아 “바람피운 남자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한 것 같다”고 한 발언 말이다. 예민한 페미니즘 감수성에 둔감했거나 이를 무시한 결과다. 10여 년 전엔 도발적인 제목의 책 때문에 논란의 복판에 있었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100년만의 친일선언』 말이다.   어쩌면 그의 삶과 예술세계 자체가 논쟁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근엄한 성악도에서 ‘딴따라’ 대중가요 가수로, 어느 순간 화가 겸업으로, 영남씨가 변신을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명확해야 마땅한 장르 간 구획, 거기서 오는 오래된 안정감이 공격받는다고 느꼈던 건 아닌가.   ‘조수가 대작’ 사기 사건 후 작가 대접   16일 개그맨 김종석씨가 운영하는 갤러리 카페 ‘양수리빵공장’을 찾았다. ‘현대미술가 조영남 수리수리 양수리 화투전’이 열리는 장소에서 영남씨의 예술과 삶, 논란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서다.   현대미술은 결국 돈과 같이 간다. 대작 사기 사건에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요즘 미술 작품은 한 땀 한 땀 공들이기보다는 조수를 써서 ‘생산’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행은 사법적 개입의 대상이 아니었다. 1층에서 5층까지 카페 겸 갤러리 공간 한켠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참고하세요! 내년(22년)에는 현대미술가 조영남님의 그림값이 30% 이상 인상예정이랍니다’.   중앙SUNDAY에 연재하는 회고록 ‘예스터데이’ 육필 원고. 신인섭 기자 카페 주인 김종석씨는 “지난 4일 오픈 이후 모두 14점이 팔렸다. 그중 9점은 2030 MZ 세대가 구입했다”고 귀띔했다. 전시는 다음달 4일까지다. 영남씨와 마주 앉았다.   지난해 미술품 대작 사기사건 대법에서 승소한 이후 몇 번째 전시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90점 정도 전시한다. 전시 장소가 넓다 보니 옛날 작품 중에서도 덜 보여드렸던 걸 가지고 나왔다.”   화투 그림이 유명하지만 바둑·태극기도 그림에 활용한다. 뿔테안경을 활용해 조각작품도 만들었는데, 대표작을 꼽는다면. “다 대표작이지.”   작품 제목을 그림에 써넣는 게 특이하다. “캔버스에 제목을 쓰는 작가가 있고 안 쓰는 작가가 있는데 나는 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는 글과 그림이 섞여 있다. 그런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목과 작가 이름을 화면에 써넣는 거다.”   영남씨는 팝아티스트 아닌가. 서양 미술에서는 그런 전통이 없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작품을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위해 제목을 적는 거다. 그런 점에서 나는 B급 아티스트다. 작가로서 고집이 없다. 다른 화가들은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는 것을 멋으로 알고, 작품을 통해 뭔가 오소독스하게(정통으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데, 나는 사람들 얘기를 잘 듣는다. 내 그림 속 화투가 좋다고 하면 다음 그림에 화투를 더 많이 집어넣는 식이다.”   일종의 쌍방향이다. “맞다. 플렉서블(flexible)하게, 작가라는 티를 전혀 안 내고 싶다.”   지난해 대법 승소도 작용했을 텐데 이제  작가 대접을 받는 것 같다. 최근 ‘홍대 이작가’가 구혜선·솔비 같은 ‘아트테이너(아트+엔터테이너)’의 작품들을 혹평하면서도 조영남은 미술작가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에 바둑판을 합성한 작품을 그린 게 1990년대 후반이다. 과거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2020년에, 영국의 현대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나무 그림(‘물가의 더 큰 나무들’)에 화투를 그려 넣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화투나무가 있는 풍경’ 같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거다.”   밀레나 호크니 같은 거장들의 유명작품 덕을 좀 보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해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정확하게 본 거다. 현대미술은 한계가 없다. 피카소가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한다, 그런 얘기 한 적 없다. 미술은 그냥 100% 자유다.”   문학으로 치면 남의 작품을 짜깁기하는 패러디나 혼성모방 느낌인데, 그림에서는 이런 시도가 미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에 내가 화투를 붙였다고 치자. 그럼 ‘피카소 형님, 제가 한 수 위로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다. 피카소 그림을 더 매력 있게 만드는 거란 말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건 그렇지.”   이런 식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나. “누구나 될 수 있지만 화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대상과 비슷하다는 감동보다는 인식의 새로움을 주는 게 현대미술의 요체인가. “미술 아니었던 것들이 현대미술에서 미술작품이 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확 열렸다. 그렇게 마음을 열어놓고 사니까 사는 게 편해진다.”   남들이 잘나가면 끌어내려 괴상망측   그림을 그리면 기분이 좋아지나. “딸이 옆에서 들락날락해도 별로 신경 안 쓰고 몰두하게 된다.”   지난달 고법에서도 지난해 대법 판결과 비슷하게, 조수가 작품 일부를 그린 미술작품 판매를 사기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와 일련의 미술품 대작 사기 소송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느낌인데. “지난해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얘기했지만, 국가가 세금을 들여서 가수이면서 현대미술 애호가였던 사람을 완전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준 사건이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안 그릴 수 없는 입장이 됐다. 나라에 고마울 수밖에.”   송사 전후를 비교하면 작품 호당 가격이 올랐다고 들었다. “그림 호당 가격이 50만원에서 70만원으로 올랐다.”   조각 작품 ‘안경변주곡’(1992). [사진 아산갤러리] 그림 한 호는 우편엽서 크기다. 가로·세로 90×70㎝ 크기의 30호 작품의 경우 호가가 2000만원이라는 얘기다. 대법원 판결 이후 팔린 그림 총액이 7억원에 이른다는 보도에 대해 묻자 “판매는 잘 되지만 정확한 금액을 얘기하기는 그렇다”고 했다.   결국 예술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에 사법부가 개입한 셈인데. “저개발국가에서 개발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이 이미 선진국 반열이라는 진단도 있다. “선진국 되려면 아직 멀었다. 결국 조수 문제에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 아닌가. 그래서 지난해 조수를 공모하겠다고 했더니 대학교수인 한 후배가 그랬다가는 또 큰일 난다고 말려서 그만뒀다. 이게 무슨 선진국이냐. 선진국이라면 하고 싶은 얘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 윤여정 상 탄 날도 그렇다. 소감을 묻길래 뻥 하고 복수를 당한 느낌이어서 솔직하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희한하게 해석하더라. 이런 식이어서는 윤여정과 관련된 나의 현재 상태에 대한 내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지 않나. 이준석이 얼마나 깝깝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낙후된 나라에서 선진국 정치인 흉내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조수 문제는 미술품 대작과 관련된 시비도 시비지만 알려진대로라면 영남씨가 조수 수고비를 지나치게 낮게 책정해 사람들의 공분을 부른 측면도 크다. 이 부분, 영남씨는 할 말이 꽤 있는 듯했다. 결국 민사 영역의 진실을 짧은 인터뷰 문답으로는 제대로 알아내기 어렵다. 영남씨는 “조수는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전시를 제안하는 갤러리 측에서 조수 급료를 지급하도록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안티가 적지 않은 듯한데, 안티와 공존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내가 일찍이 ‘안티 예찬’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10여 년 전 친일 시비가 일었을 때 맷집을 키웠다. 결국 한 번 돌아선 사람을 다시 내 쪽으로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과 일일이 다투다가는 결국 죽는다. 마광수가 죽었고, 이문열이 기를 못 펴지 않나. 다만 최근 윤여정 관련 안티는 이해하기 어렵다.”   영남씨는 그러면서도 “이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나라”라고 했다. 여러 시간대가, 그러니까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여 있다는 얘기였다. “남들이 잘나가면 끌어내려야 속 시원한 특징이 나라를 움직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집단적인 뜨거움이 결국 나라 전체적으로는 “괴상망측한 경쟁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는 거다. 한국인들의 극성맞은 성격이 미술의 백남준, 음악의 윤이상, 영화의 봉준호 같은 창의적인 인물의 탄생과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그럴 듯했다. 기자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2021.06.19 00:02

  • “조국·김명수 자기성찰 없이 뻔뻔, 상상하기 힘든 인간형”

    “조국·김명수 자기성찰 없이 뻔뻔, 상상하기 힘든 인간형”

     ━  [SUNDAY 인터뷰]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   최근 칼럼집 『생각의 저편』을 펴낸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현 정부의 적폐 청산을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비판했다. 박종근 기자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83)씨는 현실에 발붙인 문학주의자, 균형감 있는 보수주의자로 통한다. 문학만이 최고라고 강변하지 않고,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1974년 그는 등 떠밀려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았다가 기관에 연행된 후 다니던 신문사에서 해직됐다. 이듬해 김현 등 이른바 ‘문지 4K’와 함께 문학과지성사를 차려 지금의 문학전문 출판사로 키웠다. 문학지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70~80년대 창비 진영의 참여문학에 우호적이었다. MB 정부 시절 진보 문학단체인 작가회의가 불법시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확인서 제출을 거부해 정부 지원금 3400만원을 못 받게 되자 같은 금액의 개인 돈을 작가회의에 내놓기도 했다.   해직 기자 출신, 문학과지성사 일궈   생각의 저편 그는 2016년 말 세상의 움직임에 매우 큰 기대를 품었다고 했다.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을 묶어 최근 펴낸 『생각의 저편』(문학과지성사)의 ‘서문’에 따르면 그렇다. 2017년 4월 신문에 게재됐던 ‘‘인간의 얼굴’을 한 거버넌스’라는 글에서는 “행복의 정치경제학을 약속하는 인물에게 내 귀중한 한 표를 드릴 참”이라고 쓰기도 했다. 임박한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찍겠다는 뜻이었다.   그랬던 칼럼의 기조가 어느 순간 바뀐다. 대략 2019년 중반, 조국 사태 즈음부터다. 올 초 글에서는 “다수의 횡포를 넘어 독재로의 후퇴가 어른거릴 정도”라고까지 할 정도로 현 정부에 대한 거센 비판자로 돌아섰다.   이런 반전을 어떻게 봐야 할까. 보수주의자의 한계인 걸까. 그의 균형감각을 대치 정국을 바라보는 하나의 가늠자로 삼을 수 있을까. 지난 1일 서울 서교동 문지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신문 게재 순으로 책에 실린 칼럼들을 보면 처음에는 정부에 우호적이었다가 갈수록 비판적이 된다. “세상에 대한 기대를 얘기한 글은 2016년 말 촛불혁명 때 쓴 건데, 촛불시위의 정치적 의미보다 정서적 의미가 내게는 따듯하게 다가왔다. 현장에 가지는 않았지만, 미국 같은 나라의 폭력시위와 달리,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차분하게 내면의 빛을 밖으로 발산하는 촛불이 참 아름다웠고, 새롭게 나타날 정치적·사회적 양상에 대해 기대를 품게 했다. 노무현 정부가 민주주의의 일상화에 크게 기여했다면 이 정권에서는 사생활화까지로 발전하겠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내면화되서 장애인, 동성애자, 소수자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는 일 말이다. 그런데 내가 실망한 건 조국 사태 이후다.”   어떤 점에선가. “그렇게 오만하고 자기성찰이 없는 유형을 별로 보지 못했다. 일제시대나 6·25 전쟁통에서도 그런 오만은 없었다. 조국만이 아니다. 대법원장은 자기가 거짓말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같은 분은 정말 꼿꼿하게 법대로 하면서 자기 내면과 사회현실 사이에 갈등이 없도록 하셨는데. 그래서 86세대가 갖고 있는 집권층의 뻔뻔함이랄까, 그게 참 실망을 줬다. 자기성찰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지식인이나 사회활동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인데, 그런 점에 대한 의식 없이 그렇게 한다는 건 나로서는 참 상상하기 힘든, 그런 인간 타입이다.”   86세대 전체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정치적 야심이 있거나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어느 세대에나 있다. 86세대 가운데 권력지향적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집권층 속에 들어가 있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가장 아름답게 쓴 사람은 시인 윤동주였다.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원죄의식을 가진 서구사회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윤동주는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준 아름다운 시인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분들이 그 세대를 주도하고 있다고 할까. 그게 문제고 그 세대가 바뀌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86세대가 변해야 한다는 건가,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는 건가. “둘 다다. 86세대가 반성도 해야 하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세대가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선배 세대를 지난 세대로 밀어붙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게 2020년대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 전조가 지금 30대 이준석으로 비치는 게 아닐까. 섣부른 정치 얘기 같지만 정치 얘기라기보다는 세대적인 감각이라고 해야겠다.”   이준석 세대에서는 어떤 희망을 보나. “새로운 것은 항상 새로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라든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내로남불식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지금 집권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이준석 세대는 별로 싸운 세대가 아니다. 고용주와 싸우지도 않았다. 디지털 세대로 우리 같은 활자 세대보다 의식이 훨씬 자유롭고, 풍요 속에서 살아온 세대다. 콤플렉스가 없다. 우리 같은 경우는 선진국에 대한 콤플렉스, 부자 나라에 대한 콤플렉스, 콤플렉스 덩어리였는데 말이다. 물론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헤매는 젊은이도 많지만 세대 전체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의 어느 세대 못지않게 풍요롭고 자유롭고 콤플렉스가 없다. 그런 세대가 우리 지도층이 된다면 편협하거나 오만하거나 고집부리는 그런 풍조는 좀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거는 거다.”   지나치게 좋게 보는 것 아닌가. “취업을 못 하거나 집이 없어 고통받는 젊은 사람들 숫자가 우리 세대보다 많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더 심각하기는 할 텐데 그들의 시련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는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거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소개한 『추월의 시대』의 30대 저자들은 한국사회가 ‘추격의 시대’를 지나 ‘추월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썼던데, 젊은 세대의 그런 자신감이 그렇게 환하고 좋더라. 일본 사람들도 갖지 못한 자신감이 아닐까 싶고, 그런 세대의 출현이 참 고맙고. 우리 세대는 모든 게 뒤떨어져 있다는 자학의 시대로부터 일본·미국에 뒤떨어질 게 없다는 자신감의 시대까지, 80년의 변화를 살아온 셈이다. 스스로 행운의 세대였다는 생각을 한다.”   맹목적인 이분법과 거리를 두려 했던 김씨의 행보는, 문학에서는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출된다.   “현실-문화-문학의 복잡한 연결 회로는, 특히 오늘날과 같은 착잡한 사회에서는, 직선적이며 단선적인 순진한 시각으로는 정확히 포착되지 않으며, 올바로 해명될 수도 없다. 다양성이나 다원주의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1991년 책 『두 열림을 향하여』에 실린 글이다. 이번 책에서도 김씨는 ‘역사에의 관용’이라는 글에서, 한국사회를 지금까지 발전시킨 힘이 어쩌면 투기나 부정 같은 부도덕·불의였을 수 있다는 ‘반전의 해석’을 제시한다. 절대선 위에서 지금의 풍요를 쌓아 올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때문에 역사의 전개를 보다 관대하게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현 정부의 타협 없는 적폐 청산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평했다.   “한 세대의 강점과 약점, 아름다움과 추악스러운 점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새롭게 하면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당 시절이나 박정희 시절에서 얻을 점도 많지만 잘못된 점도 많다. 역사의 변증이라고 하면 거창한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걸 느끼는데, 적폐라는 게 전에도 있었지만 지금 정권에도 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잘못이나 무능력, 이런 것들을 고쳐나가면 되는 거지 굳이 적폐라는 말을 써야 하는지, 반드시 개혁이나 혁명, 적폐청산, 이런 거창한 말로 또 하나의 적폐를 만들어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쟁하는 공존 등 네가지 방향 제시   결국 이 모든 일의 배경에 대통령이 있다. “내가 문재인씨를 참 좋아했다. 지금은 많이 불신하게 됐지만. 최근에도 검찰총장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는데도 그냥 임명하지 않았나. 그렇게 무례할 사람으로 안 보였는데 자기 고집에 갇힌 건지 더 많은 무리를 저지른다. 그분의 겸손함, 인정스러움, 관용적인 태도를 희망적으로 봤는데 조국이나 추미애를 법무부 장관으로 쓰면서 내면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그대로 잡고 싶으면서도 추미애를 내세워 검찰개혁을 하고 싶은 갈등 아니었나 싶은데, 이제는 일방적으로 자기 고집으로 선회한 게 아닌가 걱정된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신문으로 보는 것으로는 그렇더라.”   김씨는 앞으로 한국사회가 이뤘으면 하는 “형용모순의 변증”이라며 네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 인공의 자연화. 마지막으로 겸손한 자신감이다. 가령 ‘성장 없는 발전’의 경우 지구 자원의 고갈이나 기후변화 없는, 그러니까 양적인 성장이 아닌 지속가능한 성장을 뜻한다. ‘겸손한 자신감’은 역시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진 것 같은 86세대 집권층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   김씨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그런 점을 부끄러워하거나 자랑하거나 하지 않고 내 성격이 그렇다는 정도로 여겨왔다”고 했다. 대척점에 있는 창비에 대해 “마포 신수동에 출판사가 나란히 있을 때부터 창비 쪽을 바라보며 저쪽 편 처지를 생각해 버릇 해왔던 것 같다”고 했다. 상대 처지를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  「 “선악의 도덕을 기초로 판단은 엄격하되 평가는 보다 큰눈으로 헤아려야 할 일이었다.” -‘역사에의 관용’, 2019년 6월 21일   “논의가 진영론으로 옮겨가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경직, 후퇴한 것이다.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진영론이 전개되었다면 그것은 또 오늘의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386세대의 분열을 시사한다.” -‘세대론 수감’, 2019년 12월 13일 」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2021.06.12 00:02

  • “미국 긴축 시계 빨라져, 정부도 테이퍼 텐트럼 대비해야”

    “미국 긴축 시계 빨라져, 정부도 테이퍼 텐트럼 대비해야”

     ━  [SUNDAY 인터뷰]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미국의 긴축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19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지난달 정례회의 의사록을 공개했다. 여기엔 일부 위원이 “경제가 계속 빠르게 회복할 경우 자산 매입 속도를 조정하는 계획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며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내용이 있었다.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 처음으로 연준 내에서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가능성이 언급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전광우(72)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24일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연준이 금리 인상 시기를 당초 계획했던 2023년에서 앞당길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 정부와 금융당국도 이를 염두에 두고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이사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 인디애나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09년엔 금융위원장을 맡아 금융위기 극복에 기여, 이론·실무에 모두 능한 거시경제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 소비자 물가지수 13년 만에 최대 상승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전 국민에게 나랏돈을 퍼주는 등 국가 부채를 늘리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연준 내에서 테이퍼링 신호가 나왔다. “경기 회복세가 그만큼 가파르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6.4%로 올 1월 전망치보다 1.3%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지난해 10월 낸 전망치보다는 3%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   연준이 조바심을 낼 만큼 인플레이션 우려 상황인 건가. “미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4.2% 올라 2008년 9월 이후 13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한 인터뷰에서 ‘연준이 너무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했는데, 연준은 공식적으로는 인플레이션 요인이 일시적이며 과도기에 있다는 입장이다.”   어느 쪽 의견에 동의하나. “중간쯤이다. 최근 4~5개월의 흐름을 보면 인플레이션을 장기적 추세라 단언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지난해까지 억눌렸던 소비가 근래 들어 ‘보복 소비’로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일시에 몰린 경향이 있다. 원자재 값이 뛴 것도 당장은 경기 회복 수요가 늘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앞으로 오를 거니 미리 확보하겠다는 선반영의 차원으로도 볼 수 있다. 분기별로 추이를 더 봐야 한다.”   ‘K형 회복’(차등 회복) 얘기가 많이 나온다. “미국 등 일부 선진국의 가파른 회복세와 달리 인도와 브라질 등 신흥국은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마다 백신 공급·접종 속도의 격차가 심한 상황이다. IMF도 올해 단기적인 ‘V형 회복’(빠른 반등) 가능성 외에 국가 간 회복 속도에 차이가 큰 K형 반등이 나타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테이퍼 텐트럼’(taper tantrum·긴축 발작)의 재현을 피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선진국이라고 앞으로의 경기 회복을 자신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바이러스 변이(變異) 리스크가 여전한 데다, 미국의 경우 지난달 고용 지표가 기대에 못 미치는 등(실업률이 6.1%로 전월보다 상승) 신중하게 판단할 부분이 있다. 비유하자면 병에 걸린 몸이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게 정말 완치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통제 때문에 일시적 효과가 나타난 건지 좀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연준은 언제쯤 금리를 올릴까. “2023년까지 현행 제로 수준(0~0.25%) 금리를 유지한다는 기존의 계획을 아직 수정하진 않았는데, 최근 상황으로 봐선 금리 인상 시기를 2023년보다는 앞당길 것 같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한국은행은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연 0.5%의 금리 동결을 결정했지만, 연내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전 이사장은 “국내 금리 인상 시점 역시 예단하긴 어렵지만, 한은이 연준의 정책 방향을 참고하되 (국내) 경제 회복 속도를 보면서 탄력적으로 조금씩 조정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연준의 비둘기파 성향이 너무 강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인플레이션 요인이 있어도 비둘기파 성향이 강해서 금리를 안 올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개인의 성향이나 정치적 배경보다는 조직의 책임감을 중시하고 그걸 공유하는 데 힘써왔다. 그게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다. 연준도 매파와 비둘기파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를 떠나 큰 틀에서 책임감 있게 정책 방향을 판단한다는 조직 전통을 가졌고,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그에 맞게 행동할 거다. 내부 격론은 있겠지만 크게 우려할 부분은 아니다.”   부채 문제는 선진국·후진국 안 가려   중국과 일본은 상황이 어떤가. “IMF는 중국의 올해 성장률을 8.4%로 전망했는데, 그보다 중국 정부가 차제에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하겠다며 체질 개선에 힘쓰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중국 경제는 막대한 부채, 그림자 금융, 부동산 거품이라는 3대 리스크를 떠안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고강도의 공기업 개혁과 암호화폐 규제 강화 및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DBC) 도입 촉진 등에 나서고 있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일본은 상황이 안 좋다. 지난해 도쿄올림픽 연기로 국가적 부담이 커졌고 이전에도 아베 신조 내각 때 잠깐 반짝했을 뿐 인구 고령화에 따른 경제 역동성 저하, 고질적인 부채 문제 등으로 고전 중이다. 부채 문제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안 가린다.”   우리나라도 부채가 급증세다. “재정 건전성 악화는 결국 미래 세대의 부담이다. 현재 세대가 가불해서 미래 세대에게 부채 갚는 일을 떠넘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재정 지출의 효율성을 키우는 쪽으로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부 취약계층을 집중 지원해줘야 하는 건 맞지만 온 국민에게 나랏돈을 주는 포퓰리즘에 기반을 둔 정책으로 국가 부채를 늘려선 안 된다. 테이퍼링이 본격화할수록 부채 부담이 가중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코로나19 시국에 경기 부양을 위한 부채 증가는 불가피한 게 아닌가. “시중에 돈을 푸는 게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기업들을 옥죈 족쇄를 풀어 역동적으로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효과적인 경기 부양책이다. 기업 입장에서 족쇄란 꼭 필요한 규제 이외의, 필요성이 작음에도 관행적으로 존재하는 각종 규제다. 특히 테이퍼링 논의가 나오기 시작한 현 시점에선 경제 활성화와 잠재성장률 제고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규제 완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 지금도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등의 수출 분야에서 기업들의 선방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 정부는 그런 면에서 좀 아쉽다. 시장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의 수정이 필요한 때다. 내년 대선으로 출범할 차기 정부도 이를 유념했으면 한다.”   2008년 위기 대응 리더십 참고할 만   경제 위기 대응의 모범 사례를 꼽는다면. “지금 상황과 꼭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보였던 리더십을 참고할 만하다. 2008년 3월 베어스턴스, 9월 리먼브라더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이 잇따라 파산하면서 전대미문의 금융위기가 터지고 국내 시장도 요동쳤는데 그해 10월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이라는 적극적인 초동 대처로 단숨에 분위기를 바꿨다. 11월부터는 환율이 안정되고 외국인 자금 이탈이 잦아들면서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빨리 턴어라운드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때 금융위원장으로 미국을 방문, 팀 가이트너 당시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를 만나 ‘고맙다’고 말했더니 그가 ‘양국 정상 간 돈독한 신뢰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답했다. MB가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과 평소 신뢰 관계를 잘 구축한 게 빠른 통화스와프로 이어졌다고 본 거다. 이처럼 아쉬울 때만 찾는 관계가 아닌, 평상시의 깊은 신뢰 관계 구축이야말로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을 주는 최고의 선제적인 리스크 관리법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양국 관계 개선에 성과를 보인 게 그래서 다행스럽다.”     ■ 테이퍼 텐트럼 「 선진국의 양적 완화 축소가 신흥국의 통화 가치와 증시 급락을 불러오는 현상. 2013년 벤 버냉키 당시 미 연준 의장이 양적 완화를 종료하기 위해 자산 매입 규모를 축소하겠다고 발언한 이후 미국 국채 가격이 폭락,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고 신흥국의 자본 유출이 이어졌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1.05.29 00:36

  • “MZ세대 러시안룰렛식 투자, 위험 관리해야 기회 잡아”

    “MZ세대 러시안룰렛식 투자, 위험 관리해야 기회 잡아”

     ━  [SUNDAY 인터뷰] 3연임 박종복 SC제일은행장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이 지난 3일 오후 서울 공평동 본점 집무실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한국 시장에 더 집중할 겁니다.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자산 관리 서비스를 한층 강화해 소비자들에게 다가서겠습니다.”   3일 서울 공평동 본점 집무실에서 만난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은 이같이 말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 금융 시장도 격변기를 맞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외려 기본에 충실한 소매금융(소비자금융)으로 승부하겠다는 포부다. 지난달 15일 한국씨티은행이 소매금융 사업 철수를 선언해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스탠다드차타드(SC)그룹 산하의 SC제일은행은 이제 한국에서 소매금융을 하는 유일한 외국계 은행이 된다.    젊은 세대들 간접투자 해야 유리   1955년생인 박 행장은 79년 옛 제일은행에 들어와 2007년 영업본부장을 맡는 등 35년 넘게 영업 부문에서 일한 현장 전문가다. 2015년 SC제일은행 첫 한국인 행장에 취임해 안정적 성과를 내면서 3연임에 성공했다.   CEO만 6년째다. 최근 소회는. “변화가 엄청났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 MZ세대(80년대 초~2000년대 초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90년대 중반~2000년대 초 출생한 Z세대)의 투자 열풍을 불러왔다. 해외 주식을 사고 파는 서학개미에 이어 암호화폐 투자자까지 급증했다. 신선하지만 걱정도 된다. 젊은이들이 너무 멀어진 집값에 다가서겠다며 지속 가능하지 않은 러시안 룰렛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 타이밍을 잘 잡는 일부는 횡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손해를 입을 확률이 높을 거다. 어른들이 좀 더 잘했어야 했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어떤 희망인가. “청년들을 비롯한 더 많은 소비자가 체계적인 자산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는 거다. 과거엔 자산 관리란 개념 자체를 상위 1%, 10%의 전유물로 여겼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물론 저금리와 저성장, 고령화 등의 시대적 변화로 이젠 남녀노소 중산층 모두 여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힘들게 됐다. 역으로, 자산 관리에 성공하면 위기를 얼마든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자산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성이다. 수익성도 중요하지만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면 위험해진다. 일관되고 차분하게 확률에 맞춰 장기 분산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이긴다.”   MZ세대는 고수익을 더 중시하지 않나. “젊을수록 위험자산, 나이가 들수록 안전자산 비중을 높이는 게 일반적 전략인 건 맞다. 다만 젊은 세대라도 일정 규모 종잣돈부터 마련하는 게 중요한데, 리스크 관리를 병행해야 그게 수월하다. 또 투자 경험이 적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에 리스크 관리가 되는 간접투자 상품을 통해 시장에 참여하는 게 좋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SC제일은행의 상품·서비스는 어떤 강점이 있나. “한국 고객들은 원화 자산과 국내 투자 비중이 매우 높다. 아무리 좋은 시장이더라도 한 곳에만 기대는 것보다 해외로 발을 넓혀 분산 투자 하는 게 낫다. 우리는 국내 자산 관리 시장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글로벌 은행의 이점인 해외 네트워크(59개국)를 통해 다양하고 우수한 상품을 발 빠르게 전하고 있다. 로컬 은행들도 외화 표시 상품과 해외 투자 상품을 취급하고 있지만 우리처럼 다양하게 제공할 순 없다.”    복합 점포 개설, 토스뱅크에 투자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SC그룹의 글로벌 표준에 맞게 상품과 운용사의 선정부터 판매, 사후 관리까지 일관성 있게 진행한다. 영업뿐 아니라 소비자보호·법무·회계 등의 전문가 모두 여기에 참여한다. 그룹 내 글로벌투자위원회에서 그걸 다 본다. 원칙에 맞지 않는 상품은 출시하지 않고, 고객이 이해하지 못한 상품은 판매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1만여 개의 그룹 내 글로벌 투자 상품 중 고객의 세대·성향 등을 고려한 맞춤형 상품을 엄선해 추천해준다. 고객들에게 신뢰받은 결과 지난해 펀드 상품 판매 규모가 전년 대비 약 96% 성장했다.”   자산 관리 서비스에 익숙지 않은 소비자도 많다. “SC제일은행의 자산 관리 서비스 ‘웰쓰케어’는 재테크 초보 고객부터 심층 상담을 원하는 고객까지 아우르는 듀얼 케어(dual care)의 개념이다. 예컨대 고객들이 쉽게 찾아 일상적으로 상담할 수 있도록 국내 모든 영업점마다 프라이빗뱅커(PB) 약 300명을 배치했는가 하면, SC그룹의 세계 각국 전문가들을 연결해주는 심층 상담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최근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컨설팅을 확대하고 있는데, 지난 1~3월 체험 서비스에 3000명 이상이 참여를 신청하는 등 호응이 좋다. 유튜브 채널로 다양한 콘텐트도 제공 중이다. MZ세대도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다.”   향후 계획은. “보여주기식의 단발성 사업이 아닌 명확한 전략적 목표에 따라 지속 가능한 사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 젊은 세대를 위한 서비스 강화에 나선 것도, 빅테크의 역할이 강화된 금융업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 소매금융과 증권 비즈니스를 포괄한 복합 점포 개설에 나서고 있는 것도, 연내 출범하는 세 번째 인터넷전문은행 토스뱅크에 투자(SC제일은행이 지분 6.67%를 보유)한 것도 그래서다. 최근 글로벌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도 더 힘쓰겠다. SC제일은행은 지난해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의 지배구조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A+’로 대상을 받았다. 금융사 포함 국내 823개 기업 중 1위였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1.05.08 00:20

  • 기본소득이 약자 보호? ‘부의 소득세’가 취약계층에 적합

    기본소득이 약자 보호? ‘부의 소득세’가 취약계층에 적합

     ━  [SUNDAY 인터뷰] 변양호 전 금융정보분석원장    변양호 전 금융정보분석원장 “청년들에게 1000만원 지원”(이재명), “1000만원 받고 2000만원 더”(이낙연), “3000만원 받고 7000만원 더”(정세균). 집권 여당의 대선주자들이 마치 도박판에서 판돈을 올리듯 현금 살포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군 복무를 마친 전역자에게 3000만원을,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사회 초년생에게 1억원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불을 댕긴 건 이재명 경기도지사다. 지난해부터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자고 주장해 온 그는 4일 한 간담회에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청년들에게 세계여행비 1000만원을 지원해주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경제정책 어젠다 2022 논란이 되면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얼버무리지만, 지난해 총선에서 ‘돈맛’을 톡톡히 본 여당이 내년 대선을 겨냥해 또다시 현금을 뿌리겠다는 의지란 분석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기왕 현금을 뿌릴 거면 제대로 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옛 재정경제원 금융정책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을 지낸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 등 경제부처 장·차관 등을 역임한 5명의 기재부 출신 관료들은 최근 발간한 『경제정책 어젠다 2022』에서 ‘부(負)의 소득세’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부의 소득세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기준점보다 많이 버는(자산을 제외한 소득 기준) 사람은 지금보다 세금을 좀 더 내고, 그보다 적게 버는 사람에겐 정부가 그만큼 보조금 지급하는 것이다.〈표 참조〉 다만 전제가 있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기존 복지 시스템을 통폐합하고, 규제를 완화해 기업의 경제적 자유와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든다는 조건이다. 결과적으론 현금을 주자는 게 아니라 ‘경제 시스템을 확 바꾸자’는 제안인 셈이다. 6일 이 책을 기획한 변 고문을 서울 중구 VIG파트너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부의 소득세는 여권의 기본소득과 대비된다. 일종의 대안인가. “그렇게 보는 시각이 있는데, 그런 의도에서 기획한 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부의 소득세 시스템으로 가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제대로 된다는 생각을 해 왔고, 칼럼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이미 소개도 했다. 그걸 각 분야 전문가와 함께 좀 더 구체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인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화두를 던진 측면이 있다. 우리는 단임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대선이 아니면 이런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가 됐든 우파가 됐든 이 시스템을 하겠다는 정치인, 세력이 있으면 돕겠다는 의지도 갖고 있다.”   직접 정치를 할 수도 있다는 얘긴가. “그건 절대 아니다. 난 정치엔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다. 공직에 대한 욕심도 없다. 돕겠다는 건 누구 대선 캠프에 들어가 경제팀을 이끌고,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부의 소득세 체계나 시스템에 대해,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냐고 설명하고 조언하는 정도일 것이다.”   변 고문을 비롯해 이 책의 공동저자인 김낙회 전 관세청장,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 최상목 전 기재부 차관은 정치적으로 ‘무색무취’다. 공동저자 모두 경제관료 출신으로서 그저 한국경제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는 게 변 고문의 설명이다. 인세도 받지 않는다.   현금 지원을 한다는 측면에선 기본소득과도 비슷하다.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은 전 국민에게 동일한 현금 지원을 하자는 건데, 이념적으로 그게 왜 약자 보호인지 잘 모르겠다.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생계급여 등 기존의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돈을 더 마련해서 주자는 것으로 돈도 많이 들고 역진(逆進)적이다. 우리 경제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얘기하는 부의 소득세는 적게 버는 사람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 불평등을 없애고, 규제 완화를 통해 경제적 자유와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평등·자유·공정은 반드시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야 의미가 있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하려면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져야 한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경제 시스템을 개조하자는 것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하리라 보나. “가능하다기보다는 한국경제를 위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잠재성장률이 우리만큼 급속도로 떨어진 나라가 별로 없다. 그만큼 한국경제가 쪼그라들고 있다는 얘기다. 당장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민간에 자유를 줘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으므로 대타협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이 시스템으로 가면 특히 좌파 진영은 의미 있는 사회 안전망(보조금)을 얻을 수 있고, 우파 진영은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재원과 정확한 소득 파악이다. “평균 소득보다 적게 버는 분들만 선별해 지원하므로 기본소득보다 훨씬 적게 든다. 복지 시스템 통폐합으로 일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소득 파악은 우리나라 세정(稅政) 능력이면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본다.”   변 고문은 인터뷰 말미에 “당연한 거지만,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려면 대통령 등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능한 정치세력의 등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정일 기자, 사진=전민규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1.05.08 00:20

  • 20년간 평가 안 받고 연구 몰두…“세상 바꿀 원리 찾을 것”

    20년간 평가 안 받고 연구 몰두…“세상 바꿀 원리 찾을 것”

     ━  [SUNDAY 인터뷰] KAIST 첫 ‘싱귤래러티’ 교수 2명   카이스트 첫 싱귤래러티(singularity·특이점) 교수로 선정된 백세범(왼쪽)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와 양용수 물리학과 교수. 앞으로 10~20년간 논문 평가를 받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과학기술을 만들어낼 선도자 임무를 맡게 된다. 김성태 객원기자 교수사회에서도 연말은 스트레스의 계절이다. 한 해 동안 논문은 얼마나 썼는지, 인용은 얼마나 됐는지 등 연구성과를 보고서로 자세히 써내야 한다. 이런 평가에 따라 호봉이 오르고, 승진도 된다. 테뉴어(영년직) 심사 또한 마찬가지다. 여느 직장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먹여 살릴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계량화된 평가를 통과하기 위해 논문의 질보다 양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고만고만한 논문을 ‘찍어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국내 과학기술계에서는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세계 1위라는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은 고사하고 새로운 성장엔진 하나 못 만들어내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다.   1년간 6차례 특별심사위, 경쟁률 11대 1   KAIST가 이런 문제에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해 2월 발표한 ‘싱귤래러티(singularity·특이점) 교수’제도가 그것이다. 당시 KAIST는 ‘임용 후 10~20년간 논문 평가를 받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제도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다’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혁신적 과학기술을 만들어낼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형 연구자를 낳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KAIST가 채용공고를 낸 지 1년 만인 최근 첫 싱귤래러티 교수를 선정했다. 바이오및뇌공학과 백세범(46) 교수와 물리학과 양용수(36)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두 교수를 뽑는 과정은 난산이었다. 지난 1년간 총 6차례의 특별심사위원회가 열렸고, 그 사이 지원자가 적어 추가 접수까지 해야 했다. ‘10~20년간 논문평가 무(無)’가 획기적인 혜택이면서도 그만큼의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래도 경쟁률은 11대1은 됐다. 현재까지 평가로만 보면 두 교수의 실적은 평균 이하다. 백 교수는 2013년 KAIST 교수에 임용된 뒤 논문 수가 부족해 두 차례나 승진에 탈락한 뒤 지난 3월에서야 간신히 부교수가 됐다. 양 교수는 아직은 학생 같은 얼굴을 한 임용 4년차 조교수다. ‘과학기술 발전의 최정점’쯤으로 풀이되는 싱귤래러티란 이름을 처음으로 딴 교수 2인을 6일 중앙일보가 만났다.   먼저, 백세범 교수부터 인터뷰했다.   무엇을 연구하나 “대부분의 뇌 연구는 고전적인 생물학적 접근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나는 이론물리학적인 관점에서 그 기저 원리를 먼저 이해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는 뇌의 다양한 기능이 어떻게 최초로 발생하게 되는가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현재 다양한 주제에 대한 뇌과학·공학 연구가 활발하지만, 대부분 개별적으로 현상을 관측하고 응용하는 것일 뿐, 아직까지 뇌가 작동하는 근본원리는 파악이 안 돼 있다. 물리학에는 ‘F=ma’(힘은 질량 곱하기 가속도)와 같은 역학, 전자기학 등의 기본 원리가, 화학에서는 주기율표와 같이 정리된 형태의 기저 원리가 있는데, 아직 뇌과학에는 그런 게 없다. 나는 수많은 실험결과를 하나의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뇌신경회로 기능의 원리를 찾아 그 기저 이론을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면 물리학에서 뉴턴역학이라는 기본 원리의 정립과 비유될 수 있을 만큼의 돌파구를 뇌과학 연구에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도전적인 연구라고 하기에도 너무 벅차 보인다. “지난 10여년간 연구를 통해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허블과 비셀의 이론적 모델들이 상당한 정도로 수정돼야 함을 학계에 증명해왔다. 그간 내가 발표한 연구 결과들은 기존의 논문 수백여 편 이상이 폐기돼야 한다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을 보이고 있어, 기존의 상식에 익숙한 연구자들의 강력한 비판과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 내 연구를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들이 다수 축적돼 생물학적인 정당성을 확보해가고 있다. 아직은 단편적인 예시이지만 나의 연구 방식이 이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구체적 성과를 말하자면. “그간에도 주요 국제학술지에 신경망의 기능성 구조 발생에 관한 연구 결과를 실었지만, 특히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셀 자매지에만 3편,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와 저널 오브 뉴로사이언스 표지논문, 사이언스 등에 관련 논문을 다수 게재해 그간 쉽게 인정받지 못하던 연구의 핵심 주장을 폭넓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판단한다.”   처음엔 자신감 가득한 백 교수의 주장이 과장처럼 들렸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학문 족보’도 화려하다.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196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널드 글레이저(1926~2013) 교수라고 했다. 백 교수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 글레이저 교수가 80세, 그가 마지막 제자였다. 게다가 글레이저 교수의 지도교수 등 직계 스승 3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칼 앤더슨(1936), 로버트 밀리컨(1923), 앨버트 마이컬슨(1907)이 그들이다.   연구목표가 원대한데, 성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성공이 담보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 있는 성과가 계속 나오고 있고, 이런 시도가 계속 축적돼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노벨상이 목표는 아니지만 지도교수님들이 대를 이어 물려주신 노벨상 가업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은 있다.”   백 교수가 반농담처럼 웃었다. 이쯤 되니 백 교수의 IQ가 궁금했다. 그는 고교 때 검사해보니 155가 나왔다고 했다. UC버클리에서 들었던 수업은 모두 만점을 받아 비공식적으로 성적 1등이다.   우연이지만, 양용수 교수도 백 교수처럼 과학고가 아닌 일반고를 거쳐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를 졸업했고, UCLA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물론 10년 선후배지간이라 두 사람이 KAIST에 오기 전 만난 적은 없다. 양 교수는 백 교수와 느낌은 다소 달랐지만, 인터뷰 내내 겸손하지만 자신감에 찬 또렷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연구 목표가 뭔가. “유리와 같은 비결정질 물질의 3차원 원자들의 구조를 단일 원자 단위로 측정하는 것이다. 숯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질 물질은 원자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지만 유리는 아직 그 구조가 알려져 있지 않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필립 앤더슨 박사는 1995년 사이언스 기고문에서 ‘현재 고체물리학 이론에서 가장 깊이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미해결 문제는 유리(glass)와 유리 상전이(glass transition) 현상에 대한 이해일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또 다른 목표는 비결정질 물질의 원자단위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현재보다 1000분의 1 수준으로 투과 전자량을 줄인 3차원 전자토모그래피 현미경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의 토모그래피 현미경으로 유리질을 관찰하려고 하면 전자량이 많아 유리의 구조가 깨져버려 실체를 볼 수 없다.”   이 연구가 인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 “유리와 같은 비결정질 물질은 안정적 상태가 아니라 깨지기 쉽다. 현대 반도체 소자 공정의 초소형화에 따라 나노미터(㎚) 수준에서 개발되는 금속- 절연체- 반도체의 경계면에는 필연적으로 비결정질 구조가 나타난다. 미래 소자 산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결정질 구조와 이런 구조를 형성하는 동역학적 과정인 유리 상전이 현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퍼스트 무버형 과학자 성장 토대 구축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가. “그간 연구를 통해 전자토모그래피의 해상도를 원자단위까지 끌어올려 나노물질의 3차원 구조를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현재로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연구진만이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최근 4년간 이 기술과 관련해 네이처에 2편의 논문을 실었다. 연구 목표에 계획대로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백세범·양용수 두 소장파 교수의 연구 대상은 지금까지 세계 최고 학자들도 풀지 못한 난제다. 이제 한국에도 퍼스트 무버형 과학자가 성장할 토대가 구축되기 시작한 걸까. 신성철 전 총장은 지난해 2월 본지와 인터뷰에서 “싱귤래러티 교수로 KAIST 교수 650명 중 2%에 해당하는 10명을 뽑을 예정인데, 이 중 한 명이라도 성공하면 된다. 다 성공할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고 말했다. 그는 “쉬울 것 같으면 누구나 하지 않겠나. 임용 10년 뒤 평가가 만족스럽지 못해 추후 10년이 연장되지 않는 연구자는 매년 평가를 받는 일반적인 교수의 코스를 밟게 된다”고 덧붙였다.     ■ 백세범 (46) 「 백세범 ● 서울 영락고 ● 서울대 학사(원자핵공학ㆍ물리학), 물리학 석사 ● 미국 UC버클리 물리학 박사 ● UCLA 박사후연구원 ● KAIST 교수(2013~ )   」   ■ 양용수 (36) 「 양용수 ● 제주 오현고   ● 서울대 학사(물리학ㆍ수학) ● 미국 미시간대 물리학 박사 ● UCLA 박사후연구원 ● KAIST 교수(2018~ )        」   ■ 유리 상전이(glass transition) 「 비결정질 물질 중 대표적인 유리의 경우 급속냉각을 이용해 만들어지는데, 고열 속에 녹은 물질을 급속도로 냉각할 경우엔 안정상태인 결정질이 되지 못하고 준안정상태인 비결정질로 굳어버린다. 유리 상전이는 이런 현상을 말한다.  」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2021.05.08 00:02

  • 11만명 확진자 데이터 분석, 생활 밀착형 방역 재설계해야

    11만명 확진자 데이터 분석, 생활 밀착형 방역 재설계해야

     ━  [SUNDAY 인터뷰] 강대희 서울대 의대 코로나19 과학위원장   사실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유행이 시작됐다. 최근 1주일간 하루 평균 확진자는 667명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조정 기준에 따르면 2.5단계 범위에 속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정부는 거리두기 격상보다는 검사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 국민의 방역 피로감과 소상공인의 경제적 피해를 고려해 고심이 깊은 모습이다.     감염 만성화와 방역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20일 중앙SUNDAY와 만난 강대희 서울대 의대 코로나19 과학위원장(예방의학)은 “11만 명 확진자 데이터를 정밀 분석해 방역 지침을 과학적으로 새롭게 정비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5인 이상 집합금지나 저녁 10시 이후 모임 금지 등 강제 방역 대신 국민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생활 밀착형 방역을 재설계해 나들이 시기와 겹친 4차 대유행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강대희 서울대 의대 코로나19 과학위원장은 지난 20일 코로나19 4차 대유행에 대응하기 위해 11만 명 확진자 데이터를 근거로 한 방역지침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나윤 기자 확진자 발생 추이로 봐선 방역 강화가 필요한 것 같은데. “필요하지만 기존의 거리두기 단계 상향이나 집합금지 강화 방법으로는 안 된다. 지난 14개월간 국민의 피로도가 너무 쌓여가고 있고 일상 현장에서 국민이 느끼는 방역의 효율성도 많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라도 11만명 확진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감염이 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공지능기술이나 기계학습 방법을 사용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국민도 수긍하고 방역 지침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과학 방역이란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보면 알겠지만 출퇴근 시 지하철이나 버스만큼 초 밀접, 초 밀폐된 공간도 없는데 정작 지하철 감염과 버스 감염은 0건이다. 여기서 얻는 중요한 메시지는 4명이냐 5명이냐 혹은 카페냐 지하철이냐가 아니라 상시 마스크 착용 여부가 감염에 핵심이라는 뜻이다. 확진자 발생 특징별로 시간, 장소, 성별, 연령별로 면밀히 분석하고 그에 맞는 방역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집단감염 발생했으니 ‘무조건 금지’하는 방식으로는 방역을 더는 끌고 갈 수 없다.”   처음부터 데이터 기반의 방역 지침을 세우지 못한 이유는. “작년부터 꾸준히 제언해왔지만 질병관리본부청을 포함해 방역에 참여하고 있는 인력의 피로도가 너무 높은 상태다. 당장 방역 현장에 투입되기도 급급한데 분석하고 공부하고 정책 마련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데이터 분석은 데이터 분석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가령 코로나 종합정보센터를 만들어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방역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방역을 엄격하게 하면 소상공인 피해는 불가피해 보이는데. “노래방이나 식당이 대표적으로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영업소다. 노래방이 감염에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부분 지하에 있으면서 환기가 안 되고 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부는 노래방이 고위험시설이라고 낙인찍을 게 아니라 자외선 LED 살균기나 다른 살균 기기를 지원해 업주가 방역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장사할 수 있도록 이끌었어야 한다. 출입자 명부나 실내 거리두기 지침 준수 여부 등 규제적 방역 정책도 중요하지만, 실내살균 효과가 검증된 설비 등의 효과성과 안전성을 시급히 검토하여 일부 도입해 보는 것도 해볼 만하다. 시도도 해보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23일 서울역 광장 임시선별검사소를 찾은 시민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신규 확진자는 0시 기준 797명으로 106일 만의 최다 규모다. [뉴스1] 서울시의 자가진단키트 활용 정책을 두고 논란이 많은데. “자가진단키트는 정확도가 관건이다. 정확도는 코로나 유병률과 정확도 산정에 참여한 연구 대상의 특성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확도가 검증되지 않은 키트를 현장에 섣불리 투입했다가 이른바 ‘가짜음성’으로 오히려 방역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의심 증상이 있을 때마다 키트를 이용해 수시로 빠르게 검사할 수 있게 되면 조기 선별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의심 증상자들이 숨지 않고 최대한 검사를 많이 할 수 있도록 유인해야 하는 게 선제적이고 예방적인 방역 프로토콜이다.”   백신 확보가 원활하지 않다. ‘11월 집단면역’ 가능할까. “이제라도 대통령이 나서서 백신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얼마나 확보했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공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11월에는 집단 면역이 생길 테니 괜찮다’라고 계속 이야기만 하니 국민 불신이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백신 확보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 국가 행정력으로 안 되면 민간을 활용해서라도 백신을 가지고 와야 한다.”   대통령도 못 가져오는 백신을 일개 기업이 어떻게 확보할 수 있나. “백신을 만드는 회사는 제약회사다. 특히 모더나는 신생 벤처기업이다. 따라서 기업과 기업이 비즈니스 차원으로 접근해 빅딜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 기업이 국익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고 책임져 주면 훨씬 쉽게 풀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체 백신 개발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백신 개발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했으면 좋겠다. 국가 백신 개발이니셔티브 (National Vaccine Initiative) 개념으로 정부, 기업, 연구자, 의사 등이 모두 모여 빅텐트를 쳐준다. 아이디어부터 시작해 종류별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접근을 해야 한다. 국가는 임상에 대한 환자 풀(pool) 확보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국가 연구개발비를 과감하게 투자해 주는 것이다. 작년부터 정부가 백신 개발 나서겠다고 하지만 부처별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파우치 박사와 같이 우리나라도 국가 백신 최고 책임자 (Chief Vaccine Officer)를 임명하여 새로 신설된 방역기획관, 복지부, 과학기술 정통부, 질병청, 식약처 등 관련 정부 부처가 긴밀히 협업하도록 한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정부 활동이나 경비지원만으로는 내년이 돼도 백신 개발이 어려울 것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강대희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2011~2017년 서울대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재임 시절 한국 의대 교육과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의대 커리큘럼에 의사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수업을 반영해 개편했다. 한국인 최초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 역학조사요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관련기사'백신 무기화' 격랑, 시험대 오른 한·미동맹코로나 자가검사키트 조건부 허가, 내달 시판코로나 신규확진 800명 육박, 중대본 “1300명도 대응 가능”

    2021.04.24 00:31

  • 두 노배우가 물었다, 로봇은 눈물을 흘리나요?

    두 노배우가 물었다, 로봇은 눈물을 흘리나요?

     ━  [SUNDAY 인터뷰] ‘공연계 레전드’ 박정자·윤석화    ‘명품 배우’ 박정자(79)는 1962년 이화여대 신방과 재학시절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무대에 오르며 배고픈 연극판을 60년 동안 굳건히 지켜왔다. 아니, 아홉 살 때인 1950년 부민관에서 연극 ‘원술랑’을 보고 무대에의 꿈을 가졌다고 하니, 칠십 년 넘도록 외길 인생을 걸어온 셈이다.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인 그가 극 중 팔순 노인의 역을 맡게 된 것은 사실 예삿일이 아니다. 마치 골프에서 자기 나이나 그 이하의 타수로 치는 ‘에이지 슈터(age shooter)’ 같다. 연극 ‘해롤드와 모드’(5월 1~23일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는 그가 62세였던 18년 전 시작한 대표작으로, 극 중 나이인 80세가 될 때까지 출연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무대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게다가 이 아름다운 프로젝트의 마침표를 함께 찍는 사람은 역시나 ‘명품 배우’로 불리는, 절친한 후배 윤석화(65)다.   두 사람은 얼핏 물과 기름 같다. 중성적이고 엄격해 보이는 박정자와 영원히 철들지 않는 소녀 같은 윤석화는 나이 차이도 14살이나 나고 작품에 대한 의견도 달라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같이 하는 시간이 많은 사이”(박)란다. ‘왕자 호동’(1991) ‘세 자매’(2000) 등 한 무대에 같이 서기도 했지만, 부쩍 가까워진 건 윤석화가 제작·연출한 ‘나는 너다’(2010)에 박정자가 출연하면서부터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 혜성처럼 등장한 친구가 있다고 해서 가보니 과연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하더군요. 젊을 땐 각자 다른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나이 들어 서로 벌거벗고 만나게 됐어요. 같이 목욕도 하고, 맨 얼굴, 맨 마음, 맨 몸으로 만나는 사이죠. 석화가 나 때문에 늙어준 것 같아요.(웃음)”(박) “연극이란 게 이상한 거예요. 처절하게 혼신을 다해도 해낼까 말까인데 돌아오는 건 없고, 그러다 보니 그림자가 짙죠. 같은 길을 가는 선배가 있어서 든든해요. 세월이 마치 발효 식품처럼 우리를 끌고 왔지만 저절로 쌓인 신뢰는 아니죠. ‘연극’이란 모티베이션으로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윤)    유난스럽고 변덕스러운 게 배우   윤석화(왼쪽)와 박정자 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했다. 정시종 기자 사실 두 사람은 똑같다. “유난스럽고 감정을 못 숨기고 원초적”(박)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어떨 때는 내가 아주 빨간데 석화는 파랗고, 또 석화가 빨가면 내가 파랗고 그래요. 그게 변덕이란 건데, 우리한텐 변덕도 대단한 에너지죠. 보통 배우들이 대중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성격은 아니에요. 유난스럽고 변덕스러우니까.(웃음)”(박) “작업을 위해 예민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런 열정 없이는 이런 일 못 하죠. 나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부드러운 여잔데, 선생은 일상도 카리스마인 게 차이긴 하죠.(웃음)”(윤)   둘의 공통점은 또 있다. 스스로 설 자리를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윤석화의 출세작 ‘신의 아그네스’ 대본을 한국에 들여온 게 그 자신이었고, 박정자도 대표작 ‘페드라’ ‘위기의 여자’ 등이 다 스스로 얻어낸 배역이었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선생이나 극단 자유의 김정옥 선생은 나를 너무 잘 아니까 센 역할만 주려고 했죠. ‘페드라’ 때도 내가 하겠다고 나서니 김정옥 선생은 깜짝 놀라더군요. 하지만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한다’고 버텼어요. 배우에겐 그런 순간이 필요해요. 한태숙 연출이 ‘신곡’을 할 때도 창녀 같은 비천한 역할을 달라고 했어요.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던 거죠. 관객은 박정자가 이런 역할도 한다고 놀라겠지만, 그게 신나는 일이지.”(박) “연극을 하는 열정으로 뭘 했어도 성공했겠죠. 연극을 통해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고 싶어서 부단히 펼쳐놨던 건데, 나이가 드니 더 이상 내 생각을 표현할 곳이 없어지는구나 싶어서 쓸쓸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무모하게 덤빌 마음은 들지 않네. 체온이 38.5도에서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걸까요.(웃음)”(윤)     두 사람에게 ‘해롤드와 모드’는 각별하다. “2003년 처음 막 올린 공연장이 윤석화가 운영하던 ‘정미소’였어요. 우리가 으쌰으쌰 힘 모아 공동 제작을 했고, 좋은 관객을 많이 만났죠. 그래서 이걸 여든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석화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군요.”(박) “왠지 계속하실 것 같아서 물었죠. 극 중 나이까지 하겠다는 열정이 후배로서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같은 여배우로서 멋지더군요. 농반진반으로 ‘그 후엔 내가 해도 되냐’고 하니, 그럼 마지막은 저더러 연출을 하라는, 그런 약속이었어요.”(윤) “약속이라기보다 참 보기 드문 우정이라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애정이 없으면 그런 선물을 주고받을 수 없죠.”(박)   ‘해롤드와 모드’는 어찌 보면 판타지다. 죽음을 동경하는 19세 청년 해롤드가 삶을 달관한 80세 모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혼반지까지 준비한 해롤드는 정말 모드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낸 모드의 인생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열아홉이든 여든이든 인간은 다 외롭거든요. 할머니도 청년도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죠. 그런 둘이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작가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박)   하지만 이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모드는 해롤드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 뒤 뜻밖의 선택을 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전개다. “아직 젊어서 이해가 안 가나 봐? 난 참 아름다운 용기라 생각해요.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긴 할 텐데, 모드는 생각으로 그치지 않았으니까. 상식, 종교를 떠나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죠. 나도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박)   일곱 번째 공연이니 좀 수월할까. 틀렸다. 연극은 언제나 ‘라이브’고, 배우는 나이를 먹는다. “앞으로는 이런 작품 못할 것 같아요. 늘 해오던 것이니 쉬울 거라는데, 너무 억울해요.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인데 말이죠. 지금 굉장히 예민하게 대본과 씨름하고 있어요. 누구와 잘 만나지도 않고, 연습장과 집만 오가죠.”(박) “팔순에 할 수 있는 대사량이 아니거든요. 백성희, 장민호 선생이 팔순에 어떤 작품을 했는지 봐도 그래요. 이건 박정자의 억척스러운 열정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윤) “60년 동안 연기를 했지만 점점 두려워져요. 어려선 뭣도 모르고 좌충우돌했지만 철이 드니 겁이 많아지네요. 관객들은 사람 냄새 난다며 좋아할지도 모르죠. 연극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니까.”(박)   하지만 세상이 급하게 디지털화되면서 연극도 달라지고 있다. 기술을 활용해 기발한 무대를 만들어야 ‘새롭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시대에 연극이 무슨 소용일까.   허물 벗은 뱀처럼 홀가분   “이미 70년대에 연출가 김정옥 선생이 ‘배우들이 TV만 하니까 이제 로봇 데리고 연극 해야겠다’길래, ‘로봇이 눈물 흘릴 줄 아느냐, 뜨거운 가슴 가질 수 있느냐’고 물었었죠. 공연장에 가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관객들이 찾아와 준 게 너~무 고맙고. 사실 이번에 출연료를 안 받아요. 아니 출연료로 티켓을 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300명을 초청했죠. 내 팔순을 자축하는 무대에 귀한 분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기쁜지.”(박) “연극이라는 게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환경도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어떤 예술과도 달리 서로 호흡을 주고받는 것이니까요. 호흡이란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호흡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극장이란 공간에서 서로 호흡을 나누며 어떤 예술도 줄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감동을 전하는 게 연극배우죠. 그래서 영국에서는 ‘스테이지 액트리스’에 대한 존중이 각별해요. 우리는 TV 예능에 나와야 배우로 통하니, 이거 진짜 내가 영국 가서 올리비에상이라도 받아와야 연극에 관심을 좀 가져줄까요?(웃음)”(윤) “난 요즘 허물 벗는 마음이에요. 어렸을 때 뱀이 허물 벗는 걸 봤는데, 그땐 너무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웠던 거야. 껍질을 벗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이 나이가 되니 홀가분해질 수 있는 거겠죠.”(박)   그래서일까. ‘한국 공연계의 레전드’로 불리는 둘은 이런 수식어에 손사래를 쳤다. 타이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유로워졌어요. 어느 영화에 밥집 할머니로 나와 달라고 해도 감독이 맘에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내가 꿈꾸는 연극은 가장 좋은 때에 이뤄질 것이라는 긍정만 갖고 살아요.”(윤) “배역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박정자는 박정자, 윤석화는 윤석화니까. 어느 자리에 있어도 우리 존재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웃음)”(박)   노년의 여배우는 어떤 배역을 맡고 싶을까라는 질문이 어리석었다. 이들은 ‘여배우’라는 보통명사가 감당할 수 없는 ‘박정자’와 ‘윤석화’니까.   유주현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2021.04.24 00:02

  • “미국 반도체 투자 당장 해야, 중국 눈치 볼 필요 없어”

    “미국 반도체 투자 당장 해야, 중국 눈치 볼 필요 없어”

     ━  [SUNDAY 인터뷰]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삼성전자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3월 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반도체 산업이 흔들린다’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진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한국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뉴스1] 지난 12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삼성전자 등 세계 주요 반도체 관련 기업 19곳을 백악관으로 불러 모았다. ‘랜선’을 통한 화상 회의였지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GM·포드 등 미국의 완성체 업체는 물론 한국·독일 등지의 주요 업체가 공장 가동을 중단했거나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국적과 관계없이 ‘반도체 가치 동맹’(AVC·Alliance Value Chain)을 만들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재정비해 미국 등 세계를 상대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미국 투자를 늘려 달라고 요구했다. “상원의원 23명과 하원의원 42명으로부터 반도체 투자를 지지하는 서한을 받았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투자 요청을 받아 든 삼성전자는 고민에 빠졌다. 삼성전자 전체 반도체 매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0%가 넘는 만큼 이날 회의에 대한 ‘화답’을 해야 하는데, 중국 또한 주 고객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20%에 이른다. 삼성전자 입장에선 중국의 눈치도 봐야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 함께 초대받은 대만의 파운드리 TSMC는 14일 중국 고객사와의 거래를 끊겠다고 밝혔다. 백악관 반도체 회의에 대한 화답이다. 이에 대해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고민할 것 없이 미국에 화답하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탄탄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 전 장관은 14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동안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 왔는데 한계에 이른 것 같다”며 “한국 정부뿐 아니라 국민도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결정을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기회”라고 강조했다. 진 전 장관은 미국 휴렛팩커드 연구원, IBM 왓슨연구소 연구원을 지내고 이후 삼성전자에서 15년 동안 일하며 세계 최초의 64메가 D램, 128메가 D램, 1기가 D램 개발을 지휘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다. 다음은 진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12일 화상 회의는 결국 미국 본토 투자 압박이다. 한국으로선 중국 눈치도 봐야 하지 않나. “한국 반도체는 이미 이전에도 샌드위치였다. 현재 반도체는 근본적으로 부족하다. 미국은 중국에 반도체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중국이 최첨단 제품 생산을 못 만들게 하는 거다. 중국이 반도체 생산을 하지 못해 생긴 부족분은 미국에 투자해서 미국에서 만들라는 거다. 한국 기업 입장에선 미국에 가서 만들면 된다.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 한국에서 기술자가 파견을 나간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지만 그 또한 일자리 창출이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한국 입장에선 중국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외교 전략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모호성’이다. 나는 누구와 친하고 누구와 적이다, 라는 구분을 확실히 하지 않는 것이 외교상으로는 가장 좋다. 현재 상황은 한국 반도체 기업의 대응을 넘어서 국가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정해야 할 때다. 미국과 동맹 관계가 중요한지, 중국과 전략적 협력관계가 중요한지 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줄타기를 잘해 왔는데 한계에 이른 것 같다. 한국 정부뿐 아니라 국민도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결정을 할 때가 온 거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태도를 정확히 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지금이라도 빠르게 미국과 동맹 관계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국이 반도체 설비 투자를 해달라고 한다? 그럼 당연히 해야 한다. 이것저것 생각할 거 없다.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중국과 손을 잡는다면 자칫 중국의 속국이 될 수 있다. 미국을 외면하고 중국 손을 잡는다고 해서 중국 정부가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같은 제재를 풀어줄 거 같나. 그럴 리가 없다고 본다. 국민이 이런 뜻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정부가 중국을 외면하고 미국 쪽으로 정책 가닥을 잡을 수 있다고 보나. “왜 안 되나?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고 보자. 중국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나. 중국은 북한과 혈맹관계다. 중국이 한국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과 1대 1로 맞붙은 나라들을 보면 전부 힘들어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중국이 반도체가 필요하면 한국에서 사 가면 되는, 그 정도면 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지금 이 상황이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좋은 기회다.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자국에 투자해 달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귀하신 몸’이 된 거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우리 할 일을 잘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도체 기술의 초격차를 유지해서 경쟁 우위에 있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해주는 이 기간이, 4~5년 정도가 우리가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다. 중국이 한국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딱 두 가지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올레드)와 반도체뿐이다. 그런데 올레드는 이미 중국이 다 쫓아왔다. 반도체 하나 남았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미국을 비롯해 중국, 대만 등은 정부가 반도체 육성에 적극적이다. 반면 한국은 민간기업이 ‘알아서 하는’ 분위기다. 한국 정부가 어떤 지원을 해야 한다고 보나. “국내에 투자하라는 압박을 하지 않는 것이 돕는 거다. 미국에서, 중국에서 투자하라고 압박인데 국내 투자까지 요청한다면 그야말로 삼중고를 겪게 된다. 외교 문제를 만들어서 반도체 업체가 필요한 소재나 부품 구매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인력 육성에 힘써서 환경 조성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 개발도 결국 우수한 인력이 있어야 하는 거다. 노사 문제 발생으로 공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2021.04.17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