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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배우가 물었다, 로봇은 눈물을 흘리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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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인터뷰] ‘공연계 레전드’ 박정자·윤석화 

‘명품 배우’ 박정자(79)는 1962년 이화여대 신방과 재학시절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무대에 오르며 배고픈 연극판을 60년 동안 굳건히 지켜왔다. 아니, 아홉 살 때인 1950년 부민관에서 연극 ‘원술랑’을 보고 무대에의 꿈을 가졌다고 하니, 칠십 년 넘도록 외길 인생을 걸어온 셈이다.

연극 ‘해롤드와 모드’로 찰떡 호흡 #박정자 마지막 무대, 윤석화 연출 #“여든살까지 하고 싶다” 약속 지켜 #14살 차이지만 같이 목욕하는 절친 #박 “석화가 나 때문에 늙어준 듯” #윤 “세월이 두 사람 신뢰 발효시켜” #연극 열정 대단한 ‘영원한 동지’ #박 “60년 연기했지만 점점 두려워져” #윤 “이제 자유로워 긍정만 갖고 살아”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인 그가 극 중 팔순 노인의 역을 맡게 된 것은 사실 예삿일이 아니다. 마치 골프에서 자기 나이나 그 이하의 타수로 치는 ‘에이지 슈터(age shooter)’ 같다. 연극 ‘해롤드와 모드’(5월 1~23일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는 그가 62세였던 18년 전 시작한 대표작으로, 극 중 나이인 80세가 될 때까지 출연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무대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게다가 이 아름다운 프로젝트의 마침표를 함께 찍는 사람은 역시나 ‘명품 배우’로 불리는, 절친한 후배 윤석화(65)다.

두 사람은 얼핏 물과 기름 같다. 중성적이고 엄격해 보이는 박정자와 영원히 철들지 않는 소녀 같은 윤석화는 나이 차이도 14살이나 나고 작품에 대한 의견도 달라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같이 하는 시간이 많은 사이”(박)란다. ‘왕자 호동’(1991) ‘세 자매’(2000) 등 한 무대에 같이 서기도 했지만, 부쩍 가까워진 건 윤석화가 제작·연출한 ‘나는 너다’(2010)에 박정자가 출연하면서부터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 혜성처럼 등장한 친구가 있다고 해서 가보니 과연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하더군요. 젊을 땐 각자 다른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나이 들어 서로 벌거벗고 만나게 됐어요. 같이 목욕도 하고, 맨 얼굴, 맨 마음, 맨 몸으로 만나는 사이죠. 석화가 나 때문에 늙어준 것 같아요.(웃음)”(박) “연극이란 게 이상한 거예요. 처절하게 혼신을 다해도 해낼까 말까인데 돌아오는 건 없고, 그러다 보니 그림자가 짙죠. 같은 길을 가는 선배가 있어서 든든해요. 세월이 마치 발효 식품처럼 우리를 끌고 왔지만 저절로 쌓인 신뢰는 아니죠. ‘연극’이란 모티베이션으로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윤)

유난스럽고 변덕스러운 게 배우

윤석화(왼쪽)와 박정자 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했다. 정시종 기자

윤석화(왼쪽)와 박정자 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했다. 정시종 기자

사실 두 사람은 똑같다. “유난스럽고 감정을 못 숨기고 원초적”(박)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어떨 때는 내가 아주 빨간데 석화는 파랗고, 또 석화가 빨가면 내가 파랗고 그래요. 그게 변덕이란 건데, 우리한텐 변덕도 대단한 에너지죠. 보통 배우들이 대중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성격은 아니에요. 유난스럽고 변덕스러우니까.(웃음)”(박) “작업을 위해 예민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런 열정 없이는 이런 일 못 하죠. 나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부드러운 여잔데, 선생은 일상도 카리스마인 게 차이긴 하죠.(웃음)”(윤)

둘의 공통점은 또 있다. 스스로 설 자리를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윤석화의 출세작 ‘신의 아그네스’ 대본을 한국에 들여온 게 그 자신이었고, 박정자도 대표작 ‘페드라’ ‘위기의 여자’ 등이 다 스스로 얻어낸 배역이었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선생이나 극단 자유의 김정옥 선생은 나를 너무 잘 아니까 센 역할만 주려고 했죠. ‘페드라’ 때도 내가 하겠다고 나서니 김정옥 선생은 깜짝 놀라더군요. 하지만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한다’고 버텼어요. 배우에겐 그런 순간이 필요해요. 한태숙 연출이 ‘신곡’을 할 때도 창녀 같은 비천한 역할을 달라고 했어요.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던 거죠. 관객은 박정자가 이런 역할도 한다고 놀라겠지만, 그게 신나는 일이지.”(박) “연극을 하는 열정으로 뭘 했어도 성공했겠죠. 연극을 통해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고 싶어서 부단히 펼쳐놨던 건데, 나이가 드니 더 이상 내 생각을 표현할 곳이 없어지는구나 싶어서 쓸쓸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무모하게 덤빌 마음은 들지 않네. 체온이 38.5도에서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걸까요.(웃음)”(윤)

두 사람에게 ‘해롤드와 모드’는 각별하다. “2003년 처음 막 올린 공연장이 윤석화가 운영하던 ‘정미소’였어요. 우리가 으쌰으쌰 힘 모아 공동 제작을 했고, 좋은 관객을 많이 만났죠. 그래서 이걸 여든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석화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군요.”(박) “왠지 계속하실 것 같아서 물었죠. 극 중 나이까지 하겠다는 열정이 후배로서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같은 여배우로서 멋지더군요. 농반진반으로 ‘그 후엔 내가 해도 되냐’고 하니, 그럼 마지막은 저더러 연출을 하라는, 그런 약속이었어요.”(윤) “약속이라기보다 참 보기 드문 우정이라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애정이 없으면 그런 선물을 주고받을 수 없죠.”(박)

‘해롤드와 모드’는 어찌 보면 판타지다. 죽음을 동경하는 19세 청년 해롤드가 삶을 달관한 80세 모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혼반지까지 준비한 해롤드는 정말 모드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낸 모드의 인생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열아홉이든 여든이든 인간은 다 외롭거든요. 할머니도 청년도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죠. 그런 둘이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작가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박)

하지만 이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모드는 해롤드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 뒤 뜻밖의 선택을 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전개다. “아직 젊어서 이해가 안 가나 봐? 난 참 아름다운 용기라 생각해요.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긴 할 텐데, 모드는 생각으로 그치지 않았으니까. 상식, 종교를 떠나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죠. 나도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박)

일곱 번째 공연이니 좀 수월할까. 틀렸다. 연극은 언제나 ‘라이브’고, 배우는 나이를 먹는다. “앞으로는 이런 작품 못할 것 같아요. 늘 해오던 것이니 쉬울 거라는데, 너무 억울해요.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인데 말이죠. 지금 굉장히 예민하게 대본과 씨름하고 있어요. 누구와 잘 만나지도 않고, 연습장과 집만 오가죠.”(박) “팔순에 할 수 있는 대사량이 아니거든요. 백성희, 장민호 선생이 팔순에 어떤 작품을 했는지 봐도 그래요. 이건 박정자의 억척스러운 열정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윤) “60년 동안 연기를 했지만 점점 두려워져요. 어려선 뭣도 모르고 좌충우돌했지만 철이 드니 겁이 많아지네요. 관객들은 사람 냄새 난다며 좋아할지도 모르죠. 연극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니까.”(박)

하지만 세상이 급하게 디지털화되면서 연극도 달라지고 있다. 기술을 활용해 기발한 무대를 만들어야 ‘새롭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시대에 연극이 무슨 소용일까.

허물 벗은 뱀처럼 홀가분

“이미 70년대에 연출가 김정옥 선생이 ‘배우들이 TV만 하니까 이제 로봇 데리고 연극 해야겠다’길래, ‘로봇이 눈물 흘릴 줄 아느냐, 뜨거운 가슴 가질 수 있느냐’고 물었었죠. 공연장에 가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관객들이 찾아와 준 게 너~무 고맙고. 사실 이번에 출연료를 안 받아요. 아니 출연료로 티켓을 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300명을 초청했죠. 내 팔순을 자축하는 무대에 귀한 분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기쁜지.”(박) “연극이라는 게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환경도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어떤 예술과도 달리 서로 호흡을 주고받는 것이니까요. 호흡이란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호흡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극장이란 공간에서 서로 호흡을 나누며 어떤 예술도 줄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감동을 전하는 게 연극배우죠. 그래서 영국에서는 ‘스테이지 액트리스’에 대한 존중이 각별해요. 우리는 TV 예능에 나와야 배우로 통하니, 이거 진짜 내가 영국 가서 올리비에상이라도 받아와야 연극에 관심을 좀 가져줄까요?(웃음)”(윤) “난 요즘 허물 벗는 마음이에요. 어렸을 때 뱀이 허물 벗는 걸 봤는데, 그땐 너무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웠던 거야. 껍질을 벗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이 나이가 되니 홀가분해질 수 있는 거겠죠.”(박)

그래서일까. ‘한국 공연계의 레전드’로 불리는 둘은 이런 수식어에 손사래를 쳤다. 타이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유로워졌어요. 어느 영화에 밥집 할머니로 나와 달라고 해도 감독이 맘에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내가 꿈꾸는 연극은 가장 좋은 때에 이뤄질 것이라는 긍정만 갖고 살아요.”(윤) “배역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박정자는 박정자, 윤석화는 윤석화니까. 어느 자리에 있어도 우리 존재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웃음)”(박)

노년의 여배우는 어떤 배역을 맡고 싶을까라는 질문이 어리석었다. 이들은 ‘여배우’라는 보통명사가 감당할 수 없는 ‘박정자’와 ‘윤석화’니까.

유주현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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